국민 정신 총동원 운동
제목 | 국민 정신 총동원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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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國民精神總動員運動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중일 전쟁 이후 일제가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적⋅물적 통제와 수탈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벌인 대중 동원 운동.
[내용]
국민 정신 총동원 운동(이하 ‘운동’)은 일본 내에서 중일 전쟁 직후 치안 대책 강화를 전제로 위로부터 국민의 조직화가 강행된 것에서 출발한다. 운동은 1937년 8월 일본이 국민 정신 총동원 실시 요강을 결정하고 10월에 국민 정신 총동원 중앙 연맹이 결성되면서 개시되었다. 이는 정보위원회, 내무성 및 문부성을 주무 기관으로 하고 일본 내 각 성(省)이 협력하여 실시하는 정부 주도의 관제 운동이었다.
이후 운동은 조선에도 파급되어 1938년 7월 조선 내 운동을 이끌어갈 중앙 조직으로서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이 탄생했다. 창립 당시 연맹의 명예총재로 오노(大野綠一郞) 정무총감이 추대되었고, 12월에 조선사령관 출신 육군대장 가와시마(川島義之)가 총재가 되었다. 연맹 이사장은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鹽原時三郞)였다. 조선연맹 아래에는 각 행정 기구의 장이 책임자가 되는 도연맹(道聯盟)⋅부군도연맹(府郡島聯盟)⋅읍면연맹⋅정동리부락연맹(町洞里部落聯盟)의 지역 연맹, 부⋅군⋅읍⋅면 내 관공서, 은행, 회사, 공장, 학교의 소속 인원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단체연맹, 그리고 각 연맹의 말단 기구로 대개 10호를 단위로 하는 애국반(愛國班)을 두었다. 일제는 연맹의 지방 조직을 행정 조직과 사실상 일체로 만들었다. 그 결과 1938년 12월 당시 조선연맹 산하에 410만 명의 애국반원을 포용하여 빠른 속도로 조직이 완료되었다.
운동의 주된 역할은 지원병 제도라든지 일본어 상용화, 창씨개명, 신사 참배의 강요 등 당시 일제가 추진하던 일련의 정책을 포괄하여 조선 사회에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운동은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되었다. 첫째,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위한 정신 교화 운동이다. 이는 각종 관제 행사의 철저한 실시로 한국인을 일본 정신으로 재무장시켜 전시 정책에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이었다. 신사 참배 강조, 황국 신민의 서사 낭송, 국기의 존중, 일본어 생활의 독려 등 일상생활에서의 ‘내선일체 완성’을 목표로 했다. 둘째, 전쟁 수행을 경제적인 면에서 뒷받침하는 전시 협력 운동이다. 전시 협력 운동은 비상시 국민 생활 기준 양식 실행, 국산품 애용, 철저한 소비 절약과 저축, 근로 강조 등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운동이 상명하복(上命下服)식의 지나친 관료주의적 발상에서 조선 민중을 통제⋅억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데다 한국인들의 소극적인 태도와 무관심으로 인해 일본이 기대했던 만큼의 큰 효과는 거둘 수 없었다. 이후 운동은 1940년 10월부터 더욱 강력한 통제력과 억압적인 성격을 지닌 국민 총력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 관련자료
- ㆍ국민 정신 총동원 연맹(國民精神總動員聯盟)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국가 총동원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