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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서

제목 도화서
한자명 圖畵署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도화원(圖畵院)
별칭•이칭

[정의]

조선 시대 궁중에서 필요한 그림을 전담하던 관청.

[내용]

국가에서 운영하는 그림 전담 기관은 고려 시대부터 성종 이전까지 도화원(圖畵院)이라고 하였으며, 조선 초기에는 5품 관아로서 운영하였다가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대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되면서 격을 낮추어 도화서로 불렸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도화서는 예조(禮曹)에 속한 종6품 아문(衙門)이다. 건축과 기기 제작과 관련한 업무, 곧 기술직은 주로 공조(工曹)에서 관장하는데, 도화서가 공조가 아닌 예조에 소속된 것은 화원의 작업이 의례(儀禮)와 깊은 관련이 있어 단순 기술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화서에서는 국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공신⋅사대부들의 초상화, 병풍의 그림, 지도, 각종 행사와 관련한 모든 사항을 정리한 서책인 의궤(儀軌)에 들어가는 그림 등 궁궐에서 쓰이는 다양한 그림을 담당하였다. 도화서 화원들은 궁궐 내에서 쓰이는 그림 외에도 상류 양반들의 감상용 문인화(文人畵)도 제작했다.

도화서는 대표자인 제조(提調) 1인, 제조를 보좌하면서 실질적인 책임을 맡은 별제(別提) 2인, 그리고 실무를 담당하는 화원(畵員) 20명으로 구성되었다. 제조는 그림에 조예가 깊은 종1품이나 종2품 당상관이 겸직하였으며, 별제는 종6품 경관직(京官職)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원(畵員)의 선발과 승진을 실질적으로 담당했다. 그러나 화원은 20인 중 원칙적으로 종6품부터 8품까지 1명, 9품의 2명을 합하여 5명만 실직을 받을 수 있었고, 임기 만료 후 특별히 계속 근무하는 사람의 정원 역시 3명으로 한정되었으므로, 실직이 없는 화원들은 작업이 있을 때만 불려와 일당을 지급받았다. 이 때문에 도화서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상당히 과중했던 것에 비하여, 처우는 상대적으로 열악하였다.

화원 선발과 승진의 방법은 취재(取才)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죽화(竹畵)를 비롯하여 산수(山水)⋅인물(人物)⋅영모(翎毛)⋅화초(花草) 등의 화목(畵目)이 지정되어 있으며, 응시자는 이 중 두 가지를 택하여 응시하였다. 또 전문적인 화원을 양성하기 위해 화학생도(畵學生徒)를 운영했는데, 이는 그림에 소질이 있는 소년을 뽑아서 도화서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거쳐 화원으로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후기 그림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대부터 도화서 화원을 증원하고 처우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실시하여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대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할 때는 화원의 정원을 20명에서 30명으로 확대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왕정의 핵심 기구로 만든 후 규장각에서 펴내는 다양한 서책에 뛰어난 도화서 화원들을 임시로 차출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고 우대하는 정책을 폈으며, 이 정책은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때까지 지속되었다. 도화서는 이후 갑오개혁을 전후로 폐지될 때까지 조선 미술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 관련자료

ㆍ도화서(圖畵署)
ㆍ도화원(圖畵院)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