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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

제목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
한자명 朝鮮學生科學硏究會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25년 11월에 결성되어 1920년대 후반 서울 지역 학생 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던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 운동 단체.

[내용]

1925년 9월 27일 연희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李柄立) 등 학생 70여 명이 경성(서울) 시천교당에서 ‘학생 과학 연구회’란 이름으로 발기총회를 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보급하고 학생 사회를 단결시켜 식민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사회주의 연구를 전면에 내걸 수는 없었고, 표면적으로는 ‘과학 사상의 보급 및 도덕적 가치관의 확립’이라는 추상적인 목표만을 내걸었다. 경찰 당국은 연구회와 사회주의 단체의 연계를 의심하여 특별한 이유 없이 연구회를 해산시켰다. 여론의 반발이 일자 당국은 명칭을 달리할 것을 조건으로 발기회를 허용했고, 앞에 ‘조선’을 붙여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이하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11월 3일 창립총회가 열렸다. 연구회는 사회과학의 보급, 학생의 사상 통일과 상호 단결, 인간 본위 교육의 실시, 조선 학생 당면 문제의 해결을 4대 강령으로 발표했다. 또한 과학 연구와 과학 사상 보급을 목적으로 강연회와 학술 강좌를 개최하며 회원을 늘려갔다.

연구회는 경성 내 전문학교 또는 고등보통학교의 10대 후반~20대 학생들로 이뤄졌다. 창립 초기에는 중앙 고등보통학교와 연희 전문학교 학생들이 많은 편이었다. 간부 중 상당수는 화요회(火曜會) 계열에 속하며, 이들은 연구회 활동을 전후로 조선 공산당과 고려 공산 청년회에 가입했다. 결국 연구회는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 속에서 생성된 학생 운동 단체였다.

1926년 4월 26일 순종 황제가 서거했다. 이때 조선 공산당은 천도교 측과 협력하여 순종 황제의 인산일(장례일)에 만세 운동과 대중 시위를 벌이려 했다. 연구회에는 고려 공산 청년회로부터 만세 운동 지침이 전달되었다. 연구회는 서울 지역 각 학교 대표들을 통해 학생들을 포섭해 갔다. 5월 20일 각 학교 학생 대표 40여 명이 모여 운동 계획을 협의했다. 회의에서 박두종, 이천진, 박하균, 이병립, 이선호 등 5명이 준비 책임자로 선임되었는데, 모두 연구회 간부들이었다. 그런데 6월 6일 운동을 준비하던 천도교와 조선 공산당이 일제에 의해 사전 발각되어 대대적인 검거가 일어나자, 연구회는 독자적으로 만세 운동을 추진했다. 6월 9일 학생들은 격문을 배포하고 10일 인산 당일 계획대로 만세 시위를 단행했다.

6⋅10 만세 운동으로 연구회의 중심 인물들이 투옥되었지만 연구회의 활동은 지속되었다. 고려 공산 청년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서울 지역 여러 학교의 독서회와 자치회 건설에 노력했다. 또 학생 운동을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투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서울 지역 사립 학교 대표자들을 중심으로 비밀 결사인 ‘ㄱ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독서회 건설과 비밀 결사 운동의 결과, 연구회는 1929년 광주 학생 운동 과정에서 서울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광주에 조사원을 파견하는 등 운동의 전국 확산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광주 학생 운동 후 연구회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회원 다수가 검거되는 등 운영 자체가 어렵게 되었다. 남은 회원들은 전문학교생의 단결과 친목을 도모하던 조선 학생회로 적을 옮기기 시작했고, 1933년 연구회가 조선 학생회에 합류하면서 해체되었다.

▶ 관련자료

ㆍ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