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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

제목 문묘
한자명 文廟
유형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고려, 조선
유의어 공묘(孔廟), 공자묘(孔子廟), 근궁(芹宮), 문선왕묘(文宣王廟), 부자묘(夫子廟), 선사묘(先師廟), 성묘(聖廟)
별칭•이칭

[정의]

유교의 성인(聖人)이었던 공자(孔子, BC 551~BC 479)를 모시기 위하여 성균관, 향교 내에 설치한 사당.

[내용]

문묘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자(子思子)⋅맹자(孟子) 등을 배향(配享)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문묘를 설치했던 것은 신라였다. 714년(성덕왕 13) 김수충(金守忠)은 당(唐)에서 귀국하면서 공자와 제자들의 그림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성덕왕(聖德王, 702~737)의 지시에 따라 이 그림들을 국학(國學)에 배향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묘 제도가 시작되었다. 고려와 조선을 지나면서 문묘 제도는 계속 유지되었다.

문묘의 구조는 대성전(大成殿)을 정전(正殿)으로 한다. 그리고 대성전의 좌우에 동무(東廡)⋅서무(西廡)를 배치한다. 조선에서는 대성전에 공자를 중심으로 안자⋅증자⋅자사자⋅맹자의 4성(四聖)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 10인, 송(宋)의 대표 주자학자 6인을 좌우에 배향했다. 동무와 서무에는 각각 중국 명현(名賢) 47인과 우리나라의 명현 9인을 배향했다. 성균관의 문묘와 지방 향교의 문묘는 지역의 크기에 따라 제도가 조금씩 달랐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성균관 문묘는 1398년(태조 7)에 건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없어졌지만 1601년(선조 34) 중건했다. 이후 여러 차례의 보강과 수리 작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유학자의 입장에서 문묘에 종사(從祀)되는 것은 가장 큰 영예로운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이르러 문묘 종사 문제는 특정인의 학덕을 기리는 일을 넘어, 그가 속한 학파와 정파의 위상과 연결되며 정치적 갈등의 주요 요인이 되기도 했다.

▶ 관련자료

ㆍ공자묘(孔子廟)
ㆍ근궁(芹宮)
ㆍ문묘(文廟)
ㆍ문선왕묘(文宣王廟)
ㆍ성묘(聖廟)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