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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포

제목 3포
한자명 三浦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일본
유의어 삼포(三浦)
별칭•이칭

[정의]

조선이 일본인들의 무역과 왕래⋅거주를 허용했던 세 곳의 포구.

[내용]

3포는 부산포(釜山浦)⋅내이포(乃而浦)⋅염포(鹽浦)를 함께 부르던 명칭이다. 지리적으로 부산포는 부산진(釜山鎭), 내이포는 웅천(熊川), 염포는 울산(蔚山)에 속해 있었다. 내이포는 제포(薺浦)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은 국내에 들어오는 일본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1407년(태종 7) 부산포와 제포를 처음으로 개항하였으나 대마도 정벌(1419년) 이후 모두 폐쇄하였다. 이후 대마도주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1423년(세종 5) 먼저 내이포와 부산포를 개방하고, 추가로 1426년(세종 8) 염포(鹽浦)까지 개항하게 되었다. 이 조치에 따라 조선은 일본인들에게 3포를 정식으로 개항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처음 3포의 개항장에 왜관(倭館)을 설치해 교역과 접대의 장소로 활용했다. 그리고 무역 등의 목적으로 잠시 3포에 들어왔던 인원들을 제외하고 60호까지만 거류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왜관에 방문하는 일본인의 숫자와 무역의 횟수 등이 점차 증가하면서 장기 체류 내지는 정착하는 일본인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조선 조정은 이러한 현상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관원들과 3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결국 조선 관원의 왜인에 대한 통교 및 접대 방식에 불만을 갖게 된 일본인들은 1510년(중종 5) 부산포와 제포 등을 공격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 사건이 바로 삼포왜란(三浦倭亂)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해당 지역의 왜관은 다시 폐쇄되었다. 1512년 임신조약(壬申條約)을 통해 양국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제포만 먼저 개항했다. 이후 개항장들은 폐지와 존속을 반복하면서 조선 후기까지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 관련자료

ㆍ3개 포구
ㆍ3포(三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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