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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병마사

제목 도병마사
한자명 都兵馬使
유형
시대 고려 시대
관련국가 고려
유의어 도당(都堂)
별칭•이칭

[정의]

고려 시기에 국방 문제 등 국가적인 주요 의제를 협의하던 재상들의 협의 기구.

[내용]

도병마사는 일반적으로 989년(성종 8)에 설치된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의 판사제(判事制)에서 기원했다고 보고 있다. 병마 판사제는 동서북면에 병마사 등을 파견하여 방위 임무를 맡기고, 중앙에서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의 고위 관원을 판사로 삼았던 제도였다. 도병마사에 대한 기록은 1015년(현종 6)에 처음 확인되므로, 그 이전에 제도적으로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도병마사의 고위 임원은 양부(兩府)로 통칭되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중추원(中樞院)에서 충당되었다. 먼저 도병마사의 최고직인 판사는 최고 정무 기관인 중서문하성의 다섯 재신(宰臣)이 겸하였다. 여기에 6명의 중추원 추밀(樞密)이 사(使)로 임명되었으므로, 도병마사의 상층부를 이루는 이들 고위 관원을 ‘재추(宰樞)’로 통칭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정4품 이상 시랑(侍郞) 등의 관원 중에서 부사(副使)가 임명되었으며, 종4품 소경(少卿) 이하 관원에서 판관(判官)이 임명되었다. 판관 이상의 관료들은 논의해야 할 사항이 있을 때 도병마사에 모여 정책을 심의하였다.

초기에는 양계(兩界) 지역의 군사 문제를 주로 다루었으나, 점차 국가적인 주요 사무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1170년(의종 24) 무신 정변 이후에는 중방(重房) 등이 도병마사의 기능을 대신하면서 그 역할이 유명무실해졌다.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말엽에 이르면 도당(都堂)이라 칭하면서 원래의 부사와 판관은 없어지고,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추밀원의 추밀만이 모여 회의하는 기구가 되었으며, 국방 문제뿐만 아니라 국사 전반에 걸친 주요 의제로 논의 대상이 확장되었다.

1279년(충렬왕 5)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개칭되면서 참여하는 재신, 추밀의 숫자가 늘어나고 기능이 더욱 확대되었으며, 조선 초 의정부(議政府)로 개편되었다.

▶ 관련자료

ㆍ도병마사(都兵馬使)
ㆍ도당(都堂)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