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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학파

제목 강화학파
한자명 江華學派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조선 후기 정제두(鄭齊斗, 1649~1736)가 강화도에서 일으킨 학파.

[내용]

강화학파는 1709년(숙종 35) 61세의 정제두가 강화도 하곡에 자리 잡은 후 형성된 학풍을 가리킨다. 강화학파의 학문적 경향은 조선 시대 주류 사상인 성리학과 달리 외부가 아닌 마음속에서 사물의 이치를 파악함으로써 실천을 강조한 양명학(陽明學)으로 규정된다. 이것은 강화학파의 마지막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정인보(鄭寅普)가 제시한 견해로, 정인보는 강화학파의 학맥이 정치적 탄압 속에서 드러나지 못한 채 이어져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화학파로 분류되는 인물들의 사상을 분석해보면 양명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세학(經世學)적, 국학(國學)적 요소도 존재했다. 아울러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고 하지만 정제두는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때 산림(山林)으로 영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그의 제자들 중에도 영정조 대 탕평 정국에서 소론계 정파를 이끌며 활동한 인물이 존재했다.

강화학파는 양명학을 넘어서서 다양한 학문을 널리 섭렵하려는 박학풍(博學風)과 절충적 학문 경향으로 실천을 강조하는 실리적 학풍이 후대로 계승되어 정제두의 제자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광사는 시⋅서⋅화에 뛰어났는데, 특히 서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영익은 양명학과 성리학을 절충적으로 수용하여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고문상서(古文尙書)』 위작설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유희의 한글 연구는 훈민정음 이래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받는 『언문지(諺文志)』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국학(國學), 특히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도 높아졌다. 예컨대 이긍익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종휘는 『동사(東史)』에서 조선의 독자적 유교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또한 1910 일제 강점이 시작되자 강화학파의 중심인물인 이건승, 홍승헌 등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강화학파에 속하는 이동녕, 이회영 등도 헌신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의의]

강화학파는 실천적 성향을 강조한 양명학을 기초로 하여 다양한 학문을 가능하게 하였다. 강화학파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 유교 문화에 대한 자각은 이후 민족의식을 일깨울 토대로 작용할 수 있었으며,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 관련자료

ㆍ강화학파(江華學派)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