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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포 사건

제목 용암포 사건
한자명 龍巖浦事件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대한제국,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03년 평안북도 용암포(龍巖浦)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대립한 사건.

[내용]

1896년 외부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농상공부대신 조병직(趙秉稷)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상인 브리너(J. I. Briner)와 두만강 상류∙압록강 유역∙울릉도의 삼림을 20년 기한으로 채벌하는 것을 허락하는 삼림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동아시아 정책에서 만주에 집중하고, 한반도는 일본에게 일정 정도 양보하는 정책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한동안 이 삼림 이권을 활용하지 않았다. 이후 러시아 내에서는 만주 집중책을 대신해 만주와 한반도 양쪽에서 러시아의 지배권을 확립한다는 ‘전진정책(前進政策)’이 ‘신노선(New Course)’으로 정립되었다. 본래 러시아는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만주에 출병시켰던 병력을 3차에 나누어 철수하기로 청나라와 약속하였으나 이러한 정책 변화에 따라 1903년 4월 8일에 제2차 철병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한국 정부에 삼림 채벌권을 활용하겠다고 통보하고, 압록강 하류 용암포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만주 철병 불이행과 한반도 서북부 진출에 대해 영국, 일본, 미국 등 열강은 반발했다. 특히 일본은 러시아의 진출이 삼림 채벌보다는 한반도 북부에 군사적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하고 대응에 나섰다.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고 있던 영국과 협력하여 한국 정부에 용암포를 러시아의 조차지로 인정할 수 없음을 통보하고, 의주와 용암포를 다른 국가에도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같이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은 용암포 사건으로 더욱 격화되었고, 이듬해인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 정부는 러일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04년 2월 25일 의주 개방을 선언했고, 3월 23일에는 용암포를 개항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