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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국민 의회

제목 대한 국민 의회
한자명 大韓國民議會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러시아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19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확대하여 러시아에서 건립한 최초의 임시 정부 조직.

[내용]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뒤 러시아 지역의 한인(韓人)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2월 25일부터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Nikolsk-Ussurysk) 시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중심이 되어 러시아와 만주 지역의 한인 민족 운동 지도자들을 소집해 전로국내조선인회의(全露國內朝鮮人會議)를 개최했다. 이 회의의 목표는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이후 국제 정세와 파리 강화 회의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회에서는 문창범(文昌範), 김치보(金致寶), 김하석(金河錫), 장기영(張基永), 김진(金震) 등 5인의 발기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조직된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민 의회를 모델로 대한 국민 의회를 조직하기로 의결했다.

대한 국민 의회는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확대⋅개편하는 형식으로 조직되었다. 하지만 종래의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러시아 지역 한인 사회의 대표 기관이었던 것에 비하여, 만주와 국내의 대표들을 소집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전체 한인을 대표하는 임시 중앙 기관으로 자임했다.

국민 의회는 소비에트제를 채택하여 입법과 사법, 행정 세 기능을 모두 갖고 있었고, 상설의회가 중요 결정을 떠맡도록 했다. 러시아 각지의 한족회가 국민 의회 지방 조직을 담당했고, 서⋅북간도와 국내에도 지부를 결성했다. 국민 의회 의장에는 문창범, 부의장에 김철훈(金哲勳), 서기에 오창환(吳昌煥)이 선출되었다. 외교부장에는 최재형(崔在亨), 선전부장에는 이동휘(李東輝), 재정부장에는 한명세(韓明世)가 선임되었는데, 이 중 선전부는 독립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부서였다. 상설의회 의원은 30명을 두었으며, 여기에는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5명, 서울⋅경기 출신 5명이 포함되었다. 이는 국민 의회의 대표성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회의에서는 국민 의회를 결성한 뒤 3단계 독립운동 방략을 수립했다. 1단계는 독립선언서 발표 및 평화적 시위운동 단계, 2단계는 한인 무장 세력에 의한 국내 진입의 무력 시위운동 단계, 3단계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의 외교 활동 단계였다. 이들은 한인 무장 세력을 결집해 일본군과 전쟁을 벌여 서구 열강으로부터 교전 단체로 승인받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파리 강화 회의의 의제로 상정시키려는 목표를 세웠다. 국민 의회는 1919년 3월 17일 대한 국민 의회 명의의 독립선언서를 내외에 발표함으로써 그 성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는 국내외를 통해 임시 정부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이었다. 선언서를 발표한 뒤 국민 의회는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평화적 시위를 이끌었다. 또한 청년 무장 세력을 국내로 진입시킬 계획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국민 의회에 이어 상하이와 한성(서울)에도 임시 정부가 결성되어 통합 논의가 진행되었다. 국민 의회는 임시 정부의 위치를 상하이에 두고, 상해 임시 의정원과 대한 국민 의회를 통합해 의회를 조직한다는 상해 임시 정부의 의견에 따라 1919년 8월 30일 해산을 결의했다. 이어 이동휘와 문창범이 통합을 위해 상하이로 갔다. 그러나 국민 의회 측 인사들은 상해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독자적으로 임시헌법을 제정하자 이에 반발했다. 결국 이동휘만 국무총리로 남고 문창범은 초대 교통총장 자리를 사임하며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동휘 역시 노선 갈등 및 독립운동 자금 관련 논쟁으로 인하여 1921년 초 임시 정부를 탈퇴하고, 상하이 지역에서 고려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국민 의회 측은 1919년 12월 임시 총회를 열어 활동 재개를 모색하고 1920년 2월 14일 국민 의회의 재건을 선언했다. 1920년 4월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침공함으로써 러시아 혁명에 본격 개입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볼셰비키 혁명정부군뿐만 아니라 한인 독립운동 세력도 철처히 탄압하였다. 일본군에 의해 한인 운동가들이 체포되자 5월 국민 의회는 연해주를 떠나 아무르 주로 이동하여 조직을 재정비했다. 그 뒤 국민 의회는 소비에트 혁명 세력을 지지하며 공산주의 노선을 선언했다. 1921년 간부들은 대부분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이르쿠츠크파와 이동휘 계열의 상해파 고려 공산당은 한인과 그 독립군 조직을 대표하는 공산당으로서 지위를 놓고 대립했다.

▶ 관련자료

ㆍ대한 국민 의회(大韓國民議會)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