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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원보

제목 삼원보
한자명 三源堡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중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국권 상실 이후 신민회(新民會)가 주도하여 서간도에 세웠던 독립운동 기지.

[내용]

삼원보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에 설립한 독립운동 기지의 거점이었다. 1910년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기자 독립운동 단체들은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청년들을 이주시켜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시키고, 민족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새로운 독립 전쟁에 대비하려는 계획이었다.

신민회는 1910년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것과 이를 위한 대규모 이주 계획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10년 여름 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김창환(金昌煥)⋅주진수(朱鎭洙) 등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 기지로 적합한 지역을 물색했다. 그 결과 서간도 지역인 유하현 삼원보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회영의 6형제를 비롯하여 이상룡(李相龍)⋅여준(呂準)⋅김창환⋅이동녕 등 100여 명이 가산을 처분하고 가족과 함께 삼원보로 이주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1911년 4월에는 자치 기구이자 독립운동 기구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민족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한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담당할 신흥강습소를 개소하였다. 신흥강습소는 이후 독립군의 무장 투쟁 인력을 배출하는 중요한 통로의 하나인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흉작과 질병으로 정착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자 경학사를 해체하고, 1912년 삼원보 남동쪽의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로 독립운동 기지를 옮기게 되었다. 위치를 옮긴 이후에는 경학사를 잇는 자치 조직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였다.

191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독립운동 기지 건설 운동은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군이 일제와 무장 투쟁을 벌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특히 삼원보 지역은 신민회를 기반으로 대규모 이주를 통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곳이라 하겠다.

▶ 관련자료

ㆍ삼원보(三源堡)
ㆍ삼원포(三源浦)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