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문화·예술 이야기
사찰건축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사찰에서 마음과 몸에 휴식을 주는 시간!

템플스테이에 빠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요.

느리게 흘러가는 사찰에서의 하루는 힐링과 여유를 만끽하기에 충분합니다.

사찰이 현대인들에게 의미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1700년의 불교역사와 전통문화가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인데요.

건축에 담긴 사찰의 매력을 발견하러 떠나 볼까요?

사찰의 배치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명산이자 신령한 산으로 추앙받는 지리산

청정 자연을 따라가다 보면 눈길을 사로잡는 풍경이 가득한데요.

이곳을 찾은 여행자의 카메라에도 고스란히 담깁니다.

오늘 지리산이 품은 사찰, 화엄사의 멋진 풍경을 보러 나왔습니다.

웅장한 사찰 건축의 매력을 담아 볼게요.

사찰의 구조물에는 불교 사상이 담겨 하나하나 의미가 있는데요.

세상 만물이 모두 부처라는 화엄사상의 중심지, 화엄사의 첫 관문이 보입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는 의미에서 기둥을 한 줄로 세운 일주문!

화엄사는 총 3개의 문을 지나야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금강문: 세상의 사악한 세력을 경계하는 금강역사가 지키는 문

중간문 역할을 하며 불법의 수호신이 지키는 금강문

천왕문: 부처와 불법을 지키고 악귀를 쫓는 사천왕이 있는 문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천왕이 늠름하게 자리한 천왕문까지

만날 수 있는데요.

특이하게도 각 문이 일렬로 서 있지 않고 계단으로 연결해 높이도 다릅니다.

계곡 방향을 따라서 비스듬하게 경사가 진 지형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섭니다.

여기서부터 부처님을 모신 본전이 있는 사찰의 중심부네요.

대웅전: 석가모니불이 있는 사찰의 중심 전각, 화엄사 대웅전은 보물 제299호로 지정

금당: 부처님을 모신 불전을 통칭해서 이르는 말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전각을 ‘대웅전’이라고 합니다.

대웅이란 위대한 영웅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요.

고려 후기 이후 등장한 말로, 그 전에는 전각을

금빛 불상이 모셔져 있다고 해서 금당이라고 했습니다.

각황전: 국보 제67호, 현존하는 중층 불교 전각 중 가장 큰 규모

화엄사에는 또 하나의 중심 건물이 있는데요.

경전을 외고 설법을 펼치던 각황전입니다.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찰의 중심부는 시대가 변하면서 불전과 탑의 위상이 달랐고

그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시대마다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불교는 4세기에 한국으로 들어와 고구려, 백제, 신라에 전파됐는데요.

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면서 불교문화가 꽃피우게 됐습니다.

특히 나라별로 독특한 자기들만의 사찰 형식을 갖기 시작하는데요.

불상을 모신 전각인 금당과 탑의 배치가 달랐습니다.

고구려의 경우 탑이 하나이고 금당이 3개인 1탑 3금당 형식

백제는 금당과 탑이 하나씩인 1탑 1금당 형식

신라는 일정한 형식을 보이지 않다가

통일신라 시대 이후 금당이 하나 있고 탑이 2개 있는 2탑 1금당

혹은 금당 하나에 탑 하나인 1탑 1금당 형식으로 정착합니다.

고려로 넘어오면 탑 중심의 사원에서

금당 중심의 사원으로 발전하게 되는데요.

불상이나 보살상을 모신 전각들이 늘어나면서 사찰의 건물과 배치가 다양해집니다.

조선 시대에는 사찰의 중심부인 대웅전을 둘러싸고 있던 회랑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승려들이 생활하고 수행하는 공간이 들어서는데요.

예불을 드리는 신앙공간과 승려들의 수행공간이 섞이는 현재의 사찰배치가

자리 잡게 됩니다.

또한 숭유억불 정책이 사찰 건축에 영향을 줬습니다.

삼국 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사찰은 도성 중심이나 마을 근처 평지에

많이 세워졌고, 선종 등의 영향으로 산에도 사찰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다 조선의 억불 정책으로 평지 사찰은 사라지고 산지 사찰은 남아서

한국 특유의 사찰 형식을 띠게 되는데요.

아래 인간세계에서 정상으로 갈수록 부처의 세상에 도달하는 불교의 우주관을

나타냅니다.

특히 산세와 지형에 따라 건물들이 배치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축이

발달하는데

이런 사찰 건축 기법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한국의 미라

할 수 있습니다.

사찰 건축에 숨겨진 비밀 코드를 찾아라!

사찰은 궁궐 못지않게 위엄과 권위를 가진 곳이기 때문에

건축양식도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상징을

사찰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과연 무엇일까요?

상징 1. 공포: 처마 끝의 하중을 기둥에 전달하는 기능

공포의 배치에 따라 주심포식, 다포식, 익공식으로 나누어짐

기둥과 지붕 사이의 받침목 역할을 하는 공포는 함부로 사용되지 않는

고급 건축 기술입니다.

지금 보는 것처럼 크고 웅장한 건물에 공포를 다채롭게 제작해 단청을 입히면

화려함이 극대화됩니다. 이를 다포양식이라고 합니다.

상징 2. 기둥: 대들보와 함께 목조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재

궁궐, 사찰, 교육기관, 관아 등 주로 권위 있는 건축에 많이 쓰임

사찰 건물에 사용된 크고 튼실한 기둥! 원통, 민흘림, 배흘림 등

원형 기둥은 아무리 높은 양반가라 해도 쓸 수 없는 권위와 존엄의 상징인데요.

궁궐과 사찰 그리고 성균관 같은 곳에서만 원형기둥으로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상징 3. 닫집: ‘따로 지어놓은 또 하나의 집’이라는 뜻의 불상을 감싸는 집의 모형

대웅전 안에는 사찰 속 부처를 모시는 또 하나의 집이 있는데요.

닫집입니다. 부처를 모신 궁전을 의미하는 곳인 만큼 여기에 상징이 있습니다.

바로 예사롭지 않은 닫집의 문양!

늠름한 용과 기품 있는 봉황이 멋지게 조각돼 있는데

왕과 왕비에게만 허락된 문양이 사찰에서도 사용됐습니다.

이처럼 사찰은 당대 건축기술이 총망라 된 권위의 상징이자

전통문화와 역사가 지금까지도 보존되고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에필로그]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한국 사찰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특징으로 한다

2. 사찰의 배치와 건축은 시대별, 나라별로 다르게 변화하였다

3.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은 사찰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4. 용 봉황 무늬, 기둥, 닫집 등은 사찰 건축의 권위를 보여준다

【해설 및 참고문헌】

사찰은 부처가 관장하는 불국토의 세계이면서 승려가 수행하고 생활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사찰은 불국토의 주인인 부처를 예배하는 의례공간과 승려들이 수행하는 수행공간, 그리고 승려들이 생활하는 생활공간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의례공간은 불교 우주관에 의해 건축물이 배치된다.

불교의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우주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원반형의 풍륜(風輪) 위에 수륜(水輪)이 있으며 수륜의 상부는 금륜(金輪)으로 둘러져 있다. 금륜의 중심에 수미산이 있는데, 이 수미산을 7개의 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그 일곱 번째 산맥의 바깥에 4개 대륙이 동서남북에 있다. 즉 동쪽에 승신주(勝身洲), 서쪽에 구타니주(瞿陀尼洲), 남쪽에 섬부주(贍部洲), 북쪽에 구로주(具盧洲)가 있다. 이 중 남쪽의 섬부주가 인간이 거주하는 지상세계이다. 한편 수미산의 정상부에는 욕계(欲界) 6천이 차례대로 있고, 그 위로 색계(色界) 18천이 있으며, 다시 그 위로 무색계(無色界) 4천이 있고, 그 위에 부처님이 거주하는 불국토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불국토로 가기 위해서는 7개의 산맥을 넘어 수미산을 올라가 욕계, 색계, 무색계의 하늘세계를 지나가야 한다. 그렇게 올라가는 길과 하늘세계가 바로 수행의 길이며 수행의 단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미산의 구조를 사찰에 적용시켜보자. 남쪽의 섬부주(속세)를 떠나 7개의 산맥에 이르면 산맥에 들어서는 입구에 산문(山門)이 있고, 그 7개 산맥을 지나 수미산을 오르는 입구에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올라가서 사천왕천이 있는 곳에 사천왕문이 있다. 그리고 불이문(해탈문)은 사천왕천으로부터 시작하는 욕계·색계·무색계의 28천을 지나 불국토에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불국토에 들어서면 먼저 누각과 범종각을 마주하게 되고, 그 앞의 마당을 지나서 부처가 있는 전각에 이를 수 있다. 전각 안의 부처는 보살의 시중을 받으며 수미단 위에서 설법하며 불국토를 관장한다. 부처가 앉아 있는 곳을 수미단이라고 한 것도 바로 그 수미산의 최정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 수미단과 부처 머리 위의 닫집은 가장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전각 안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극락세계를 구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례공간에 이르는 길은 불교의 우주관에 의해 건축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찰은 처음부터 불교 우주관에 의해 건축된 것은 아니었다. 인도에서 석가모니가 살아 있을 때의 사찰은 수행을 위한 공간이었다.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수행하기 좋은 위치여야 했다. 수행자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탁발을 하며 먹을 것을 구했기 때문에 마을에서 너무 멀지 않아야 되고, 또 사람들이 함부로 찾아오지 않으면서도 서늘한 숲속의 안전한 곳이 적당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 세워지자 수행자들이 그 사리탑 근처에 방을 짓고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사찰은 수행처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예배공간으로서의 역할도 겸하게 되었다.

인도 초기 사찰은 사리탑 주변을 원형 또는 방형을 이루며 승방(僧房)이 둘러싼 형태였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는 탑이 숭배대상으로 계속 우위를 차지하였지만, 기원전후 간다라 지방(오늘날 파키스탄 북서부 지역)에서 불상이 출현함에 따라 탑과 동시에 불상을 봉안하는 사찰이 생겨났다. 이 무렵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으므로 간다라 지방의 사찰 형식이 중국에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중국 사찰은 당탑(堂塔) 가람, 즉 불상을 안치한 금당(金堂)과 사리를 안치한 탑이 중심이 되는 중국식 사찰이 성립되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기원전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불교가 중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시기는 4세기경이다. 이때부터 중국 전역에 사찰이 세워지고 출가 수행하는 승려들이 늘어났다. 당시 사찰은 남향(南向)이며 동서남북의 문이 있었고 문과 문 사이는 회랑이 있었다. 그리고 탑과 금당은 회랑 안쪽 남북의 문과 일직선에 있었다. 승려들이 거처하는 승원(僧院)은 불전과 탑이 있는 예배 공간 바깥에 별도 조성되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사찰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건축되었다. 고구려 초기 사찰 양식을 보여주는 청암리사지(498 창건)는 탑을 중심에 두고 북쪽과 동쪽과 서쪽 3곳에 금당이 세워졌으며 남쪽의 중문(中門)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즉 1탑3금당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백제 부여시대(538~660)의 정형적인 사찰 양식을 보여주는 군수리사지는 탑과 금당이 각각 하나씩 일직선상에 세워져 1탑1금당의 양식을 갖추었다. 3금당에서 1금당으로 줄어든 것은 탑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금당이 더 중요하게 인식되었음을 반영한다. 금당과 탑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사찰 양식도 초기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차츰 백제를 통해서도 불교가 유입되면서 고구려와 백제 양식의 혼합된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경주에 있는 황룡사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황룡사지의 경우 3개의 금당이 나란히 배치되어 1탑3금당의 배치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와 신라는 1탑3금당의 양식, 백제는 1탑1금당의 양식이 각각 발전하다가 통일신라 이후 1탑1금당 혹은 2탑1금당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이 시대 2탑1금당 사찰은 사천왕사지와 감은사지에서 확인되며 불국사, 실상사 등이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다. 중심축으로부터 좌우대칭으로 배치되는 2탑1금당 양식은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도 일반적인 양식이었다.

고려시대에도 통일신라시대의 1탑1금당 혹은 2탑1금당 양식에서 큰 변화 없이 사찰이 조성되었다. 그런데 시대가 흐를수록 탑 중심의 사원에서 금당 중심의 사원으로 발전하였고, 금당에 새로 불상을 조성하여 안치하는 경우가 많아짐에 따라 금당 안에 더 이상 봉안할 장소가 없게 되자, 새로 조성한 불상을 모시기 위한 별도의 전각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나의 의례공간이 확대되어 무량수전, 능인전, 선법당, 미타전이 별도의 구역을 형성하였고, 관음보살과 약사불을 봉안한 건물이 마련되었다. 이는 하나의 사찰 안에 담이나 회랑으로 분리된 다양한 형태의 원(院)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려시대에는 차츰 다원(多院) 구조의 다불전형(多佛殿型) 사찰이 일반적인 경향이 되었고 각각의 원(院)이 대등한 위계로 병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조선시대가 되면 회랑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요사채가 대신하였다. 회랑은 고구려 및 신라 초기 사찰 양식에서도 발견되며 고려시대까지 사찰 건축의 보편적 양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례공간에 승려들의 생활공간인 요사채가 들어서면서 불전 앞의 공간이 불전과 누각이 마주보고, 요사채가 양쪽에 배치된 ‘ㅁ 자형’의 사동중정형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건축 배치의 변화에 따라 금당의 역할 역시 단순히 의식을 거행하는 곳으로서만이 아니라 수행하는 공간의 기능이 추가된다. 그에 따라 조선후기부터 금당 내 불단 위치가 뒤로 후퇴하고 전돌이 있던 불전 내부 바닥에 마루가 놓이면서 좌선과 염불수행의 공간을 겸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입공간도 고려시대 이전에는 대체로 사찰 입구의 남문과 예배공간인 중문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일주문(一柱門) – 금강문(金剛門) - 천왕문(天王門) – 불이문(不二門)으로 정형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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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