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명 | 기획 | 자료해설 자문 | 연출 | 시나리오 구성 | 기획 제작 | 구축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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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식 | 김형우 이혁로 이연식 |
안현진 | (주)아리랑TV미디어 | 2016 |
무덤 | 김재홍 | |||||
토우와 토용 | 김현희 | |||||
토기 | 권오영 | |||||
기와 | 이병호 | |||||
조선시대 회화 | 조규희 | |||||
한국의 성 | 서정석 | |||||
불사 | 이기선 | |||||
음악 | 송지원 | |||||
도성과 왕궁 | 박순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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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정 | 윤종원 | 김미현 | (주)투와이드 컴퍼니 | 2017 |
분청사기 | 박경자 | |||||
백자 | 박정민 | |||||
복식 | 이은주 | |||||
사찰건축 | 이종수 | 최광석 | 배수영 | |||
고려불화 | 김정희 | |||||
서예 | 손환일 | |||||
지도 | 양보경 | |||||
동종 | 김소남 임천환 |
원보현 | 윤종원 | 배수영 | (주)투와이드 컴퍼니 | 2018 |
서원 | 조재모 | |||||
세종대 천문기기와 역법 | 정성희 | |||||
제지술과 인쇄술 | 이재정 | |||||
통신사행렬도 | 정은주 | 최광석 | 김미현 | |||
한글소설 | 유춘동 | |||||
화폐 | 정수환 | |||||
석빙고 | 임천환 서일수 |
김지영 | 김기원 | 김자경 | 스토리라인 | 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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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무기 | 김해인 | 문현성 | 한정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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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 김혜숙 | 윤종원 | 나누리 | |||
인삼 | 김성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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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 | 임천환 이홍구 |
경석현 | 윤종원 | 김자경 | 스토리라인 | 2020 |
농기구 | 염정섭 | |||||
바둑 | 남치형 | 김기원 | 김자경 | |||
문방사우 | 김지나 | |||||
화장 | 이민주 | 신정화 | 한정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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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 | 이경섭 | 문현성 | 이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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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 신재호 이홍구 |
최혜진 | 문현성 | 곽기연 | 스토리라인 | 2021 |
궁중음식 | 박은혜 | |||||
의궤 | 신병주 | 김기원 | 나누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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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과 방역 | 김호 | 신정화 | 한정옥 | |||
풍속화 | 유재빈 | |||||
궁궐 | 신재호 이홍구 |
조재모 | 김기원 | 한정옥 | 스토리라인 | 2022 |
전통정원 | 소현수 | |||||
조선왕조실록 | 강문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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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무용 | 손선숙 | 문현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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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 | 신재호 이주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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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기 | 스튜디오바카 | 2023 |
혼례 | 김연수 | |||||
질그릇 | 한혜선 | 지해 손희창 |
홍종화 | |||
탱화 | 유경희 | |||||
농악 | 양옥경 | |||||
해녀 | 오상학 | 지해 김정동 |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세계적인 화가 김환기!
그의 그림에는 도자기가 자주 등장하는데요.
특히 점으로 표현된 그의 독특한 그림들은 한국의 도자기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치밀하면서도 단정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바로 인화문으로 장식한 조선 시대 분청사기입니다.
분청사기의 독창적인 문양들은 현대미술에서도 재해석 되어 지금도 그 예술성이 지속되고 있는데요.
과연 분청사기는 어떤 도자기일까요?
‘분청사기’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에는 청자가 도자문화의 중심이었고 조선 시대에는 왕실에서 사용한 백자가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분청사기가 등장했습니다.
분청사기는 청자와 백자의 특징을 모두 지니면서, 또 분청사기만의 독창성을 가진 도자기입니다.
분장(粉粧) : 백토를 넣어서 만든 분장토물에 그릇을 담그거나 백토를 붓으로 칠해서 그릇의 표면을 하얗게 만드는 것
청자와 같은 계통의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백자와 같은 흰색의 흙으로 분장을 하여 표면을 하얗게 만든 자기가 바로 분청사기입니다.
분장 방법에 따라 분청사기의 문양도 달라지는데요.
이러한 분장은 고려 시대 청자의 ‘백상감기법’이 변화해서 발전한 것입니다.
분청사기의 제작기법 중 하나인 인화상감기법은 그릇 전체에 문양을 빈틈이 없이 정밀하게 채우는 것인데요.
치밀하게 반복되는 아름다운 문양은 분청사기의 또 다른 매력입니다.
조화기법: 분장한 표면에 칼로 문양을 새기는 각(刻) 방법
철화기법: 분장한 표면에 붓으로 문양을 그리는 화(畵) 방법
시간이 지나면서 분청사기의 문양도 큰 변화를 보이게 되는데요. 칼로 음각을 하는 조화기법과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철화기법이 발달하면서 좀 더 대담하고 생동감이 있는 문양들이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지역별로 제작자들의 개성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물고기나 모란 등의 문양을 같은 시기에 전북 고창에서는 조화기법으로 새긴 반면, 충남 공주에서는 철화기법으로 그려서 지역 별로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후 백자 제작이 활발해지자 분청사기는 점차 문양 없이 그릇 전체를 하얗게 분장하여 표면이 마치 백자처럼 변하였고, 점점 제작양이 급격하게 줄면서 마침내 16세기 초반에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분청사기’라는 명칭이 조선 시대에는 없었다는 거 알고 계신가요?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냥 ‘사기’, 또는 ‘자기’로 불렸는데요.
「고려도자와 조선도자(高麗陶瓷와 李朝陶瓷)」에서 흰색의 분장토를 입힌 회청색의 사기라는 의미로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砂器)’라고 명명하였다.
- 1941년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가 발행한
『조광(朝光)』72호에 게재 -
일제강점기, 미술사학자인 고유섭 선생이 처음으로 하얗게 분장한 분청사기의 특징을 반영해 ‘분장회청사기’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1950년대 이후부터는 한국도자사학자들에 의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분청사기’로 줄여서 부르게 된 거죠.
“ 도자기의 한 종류를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이름을 만들어서 사용하였는가? 이 과정을 알 수 있는 것은 분청사기가 유일합니다. 분청사기와 비슷한 특징을 가진 도자기는 중국에도 있었지만 중국 사람들은 하나의 자기로 인식했지 그것을 우리나라의 분청사기와 같이 특별하게 이름을 붙여서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 박경자 /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분청사기는 조선 시대의 빅데이터(Big Data)?
조선 시대에는 각 지역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받는 공납제를 시행했는데요.
도자기도 현물 세금인 공물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분청사기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양이 제작된 대표적인 공납자기였는데요.
공납용 분청사기에는 제작지이자 납세지역인 지명과 사용처인 관사명 등을 표기해 세금을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관리했고,
금후로는 그릇 밑에 장명(匠名)을 쓰게 하여
후일의 증거를 삼고자 한다.
주의하지 않고 함부로 만든 자의 그릇은 물리도록 하겠다.
-『세종실록』 11권 3년 4월 무신
제작한 장인의 이름까지 표기하여 공납자기의 품질을 관리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책임을 묻도록 했습니다.
1446년 한글이 반포된 이후에는 한글이 표기된 분청사기도 등장했습니다.
공납자기인 분청사기의 가장 큰 특징은 정밀함과 조화로움이 담긴 인화문입니다.
각 지역의 도자기를 중앙정부가 제시한 규범에 따라 그릇의 형태, 크기, 문양을 통일시킨 것은 조선 건국 이후 지방행정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고자 한 노력이 반영된 것입니다.
특히 세종은 합리적인 조세제도를 운영하기 위해 각 고을의 인구와 토지, 특징 등을 자세히 조사해 그에 맞춰 세금을 거뒀는데요.
이렇게 기록된 세종실록지리지는 전국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조선 시대 빅데이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공납자기였던 분청사기는 중앙정부가 세금을 거두는 기준과 방식, 각 지역의 조세 납부현황 전반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사자료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 세종실록지리지라는 빅데이터의 실체를 다른 부분들은 고증해내기가 어렵습니다. 생산지와 소비지에서 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분청사기는 ‘자기’이기 때문에 한번 깨져도 파편이라도 많은 정보들을 담아주는 다른 것들 대비 특징이 있어요. 그래서 분청사기가 도자기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특정한 부분을 규명해주는 실증자료로서, 역사자료로서 매우 가치가 큰 거죠. ” 박경자 /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정밀함과 조화로움, 그리고 역동성을 함께 지닌 분청사기!
새로운 조선의 질서를 갖추기 위해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던 조선 초기의 시대적인 상황이 분청사기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사이에 주로 제작된 도자기는 분청사기이다.
2. 분청사기는 백토로 분장하여 표면을 하얗게 만든 자기이다.
3. 분청사기는 조선 시대 세금의 일종인 공납자기로 사용되었다.
1. 개념(정의)
분청사기는 청자, 백자와 함께 우리나라 전통도자기의 한 종류이다. 청자와 같은 계통의 태토(胎土)로 형태를 만들고 백자와 같은 흰색의 흙으로 분장(粉粧)을 하여 표면을 하얗게 만든 자기이다. 분청사기의 분장은 고려청자의 상감기법(象嵌技法) 중 문양을 도장(印)으로 찍고 백토(白土)로 감입하는 인화상감기법(印花象嵌技法)이 발전한 것이다. 인화상감기법은 조선 시대 초기인 태종연간(재위 1400-1418년)에 그릇의 전면을 빈틈이 없이 채우는 양상으로 발전하였고 세종연간(재위 1418-1450년)에 절정에 달하였다. 분청사기는 1440년대에 백자(白磁)가 왕실용(王室用)과 국용(國用)의 그릇으로 채택이 되고 1460년대에는 백자생산을 위한 관요(官窯:國營沙器製作所)가 경기도 광주지역에 설치되자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이후 전국의 가마(窯)에서는 점차 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분청사기는 그 제작양이 줄고 16세기 초반 경에 소멸하였다.
분청사기는 조선 시대 문헌에 ‘분청사기’로 기록된 바가 없다. 분청사기에 대한 당대의 명칭은 『태종실록(太宗實錄)』과 『세종실록(世宗實錄)』의 기사에 의거할 때 사기(沙器·砂器) 또는 자기(瓷器·磁器)였다. ‘분청사기’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미학·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1905-1944년)선생이 ‘분장회청사기’라고 처음 사용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 일본인들이 조선의 도자기를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미시마(みしま, 三島)’라고 부르자 고유섭선생이 1941년에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가 발행한 『조광(朝光)』72호에 게재한 「고려도자와 이조도자(高麗陶瓷와 李朝陶瓷)」에서 흰색의 분장토를 입힌 회청색의 사기라는 의미로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砂器)’라고 명명하였다. 이후 ‘분장회청사기’는 1950-1960년대에 국립박물관과 한국도자사학자들에 의해 줄임말인 ‘분청사기’로 변하였고 한자로 ‘粉靑沙器’로 표기하여 현재에는 주로 ‘분청사기(粉靑沙器)’가 사용되고 있다.
2. 분청사기의 특징
분청사기는 제작기법에서는 태토 위에 백토를 입힌 분장(粉粧)의 다양한 효과, 시대적 역할로서는 현물의 세금으로 제작된 공납자기(貢納磁器)의 성격에, 예술적인 면에서는 장인(匠人)의 개성이 제작지역별로 뚜렷하게 표출된 지역성에 그 특징이 있다.
1) 분장(粉粧)
분장은 백토를 물에 풀어서 그릇을 담그거나 붓으로 칠해서 표면을 하얗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분장은 고려 시대 상감청자의 백상감기법이 변화하여 발전한 것이다. 고려 시대 청자의 음각상감기법(陰刻象嵌技法)은 문양을 선(線)과 면(面)으로 새기는 것이고, 인화상감기법(印花象嵌技法)은 도장으로 찍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은 조선 초까지 함께 사용되었다. 그러나 태종연간인 1410년대에는 그릇의 전면을 인화문(印花文)으로 채움으로써 그 양식(樣式)이 상감청자와는 차이가 있는 분청사기로 변하였다.
분청사기의 분장은 인화문분청사기의 절정기인 세종대를 거쳐 1450년대 이후에 특별한 문양장식이 없이 백토만을 분장하여 그릇 전체가 하얗게 백색화(白色化)되기까지 크게 3단계에 걸쳐 변화하였다.
1단계는 시문과정단계(施紋過程段階), 2단계는 바탕형성단계(地形成段階), 3단계는 표면백색화단계(表面白色化段階)이다. 시문과정단계분장은 상감과 박지기법의 시문과정에서 태토면에 백토를 분장한 후 분장층(粉粧層) 전체 또는 일부를 긁어내기 때문에 완성단계에는 분장토가 문양부분에만 남는다. 바탕형성단계분장은 문양을 분장층에 칼(刀)로 음각하는 조화기법과 분장층위에 붓(筆)으로 그리는 철화기법의 바탕면을 형성하는 것으로 시문완료단계에도 백토분장이 그대로 유지된다. 표면백색화단계의 귀얄과 덤벙분장은 그릇의 전체 또는 일부에 백토를 입히는 분장기법으로 특정한 문양을 나타내는 시문기법과 구별된다. 특히 덤벙기법으로 전면을 분장한 분청사기는 백자(白磁)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 분청사기 분장이 문양이 없이 표면 자체를 하얗게 만드는 분장으로 변화된 원인은 태토와 유약 사이에 분장이 없음에도 태토(胎土) 자체의 특성으로 분청사기보다 단단하고 깨끗한 그릇이 되는 백자(白磁)가 본격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2) 공납자기(貢納磁器)
공납자기는 사기장인호(沙器匠人戶)가 현물의 세금인 공물(貢物)로 제작한 자기이다. 조선은 공물의 조달을 위해 국초부터 공납제(貢納制)를 시행하였다. 공납자기의 종류에는 분청사기, 청자, 백자 등이 있고 실제 제작된 양은 분청사기가 가장 많았으며 전국의 여러 자기소(磁器所)에서 제작되었다. 자기소는 1424-1432년 당시 팔도(八道)에 139개소가 존재하였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각 도(道) 군현별로 자기소의 수, 위치, 품등(品等)이 기록되었다. 자기소에서는 중앙정부가 지방관아(地方官衙)에 내려 보낸 공물제작 지침인 견양(見樣)에 의거하여 형태, 크기, 재질 등이 동일한 자기를 제작하였다. 공납용 분청사기의 특징은 그릇의 내외면을 채운 인화문(印花文)과 공물의 수취체계에 따라 표기된 명문(銘文)에 잘 나타나 있다.
분청사기의 인화문 시문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문양 하나를 한 개의 도장(印)으로 찍는 단독인화기법(單獨印花技法)과 한 가지의 문양 여러 개를 하나의 도장으로 만들어서 찍는 집단연권인화기법(集團連圈印花技法)이다. 인화문은 단독인화문만으로 시문한 예가 선행하고 이후 집단연권인화문이 등장하였으며 그 변화 시기는 1410년대이다. 이후 세종의 재위기간인 1450년 경까지 공납용 분청사기에 시문된 정밀한 인화문은 치밀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완성도가 높은 인화문분청사기의 추상적인 미감은 조화와 철화기법 분청사기의 자유분방한 생동감과는 상반된 것으로 분청사기가 지닌 다양한 면모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인화문의 시문 배경에는 정비된 지방행정제도를 바탕으로 전국에서 제작된 공납자기의 규격, 문양 등을 통일한 체계적인 행정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분청사기에 표기된 명문은 관사명(官司名), 장명(匠名), 지명(地名) 등으로 제작, 운송, 수납 등을 포함한 자기공납의 전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관사명의 표기는 자기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양이 분실되자 태종 17년(1417)에 제작단계에서 사용처인 관사의 이름을 표기하여 관용물자(官用物資)임을 밝혀서 도난을 방지할 할 수 있도록 관리체계를 개선한 결과이다. 또 세종 3년(1421)에는 자기의 품질을 개선하고자 제작자인 장인의 이름을 표기하도록 하여 문제가 드러났을 때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하였다. 이외에 자기를 상납한 군현의 이름인 지명(地名)과 관사명이 함께 표기된 예가 있다. 지명은 제작자이자 납부자를, 관사명은 사용처이자 수납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조세의 운송에서 세곡은 포장단위별로 겉면에 먹(墨)으로 글자를 쓴 목간(木簡)이 표식으로 부착되었고 현물인 자기에는 그릇 자체에 발신자와 수신자를 표기하였다.
군현별로 정해진 양의 공납자기를 제작하여 기한 내에 수납처인 경중각사에 상납(上納)하는 공납의 전 과정은 해당 군현의 지방관인 수령(守令)의 책임이었다. 자기의 운송방식은 충청 · 경상 · 전라도의 경우 태종 2년(1402)부터 세곡(稅穀)과 함께 서남해안의 해로(海路)를 통해 배로 운송하는 조운(漕運)이었다. 그러나 최종수납에 이르는 과정은 충청도 · 전라도가 해당 지역의 조창(漕倉)에 1차 집결된 후 한강변에 있는 경창(京倉)으로 운송된 반면 경상도는 운송거리가 멀고 경로가 험난하여 중간지점인 1차 수납처에 해당 군현이 직접 상납한 후 경창으로의 운송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수행하였다. 이러한 경상도 조세의 운송은 태종 3년에 조운선 34척의 침몰사고를 계기로 태종 6년(1406)부터 운송구간에 낙동강과 남한강의 수로가 포함되는 육로운송(陸轉)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경상도 여러 군현의 공납자기는 일정한 단위로 포장되어 제작처인 자기소에서 낙동강 연안에 집결한 후 수로로 상주(尙州)와 문경(聞慶)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 충청도 충주 남한강변의 경원창(후에 금천창으로 변경)에 도달하였다. 경원창은 경상도 군현의 실질적인 조세수납처로 태종 11년(1411)에 200여간의 창고가 건립되었고 해마다 중앙에서 관리(差使員)가 파견되어 자기를 포함한 공물의 수납업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경상도 군현의 공납자기는 남강한 수로로 한강변의 경창(京倉)에 도착하여 궁궐 안팎의 여러 관사에 입고되었다. 이처럼 경상도의 공물은 운송거리가 멀고 그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여러 지역의 공물이 섞이거나 파손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기에 표기된 상납지역인 군현명과 수납처이자 사용처인 관사명은 운송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차적인 표식에 해당된다.
분청사기에 표기된 관사명에는 사옹방(司饔房) · 사선서(司膳署) · 예빈시(禮賓寺) · 내자시(內資寺) · 내섬시(內贍寺) · 장흥고(長興庫), 그리고 왕실부(王室府)인 공안부(恭安府) · 인수부(仁壽府) · 인녕부(仁寧府) · 경승부(敬承府) · 인순부(仁順府) · 덕녕부(德寧府) 등이 있다. 군현명에는 경상도가 경주(慶州)를 비롯한 30여 개 이상이 알려졌고, 충청도 청주(淸州), 전라도 무진(茂珍) · 능성(綾城) · 영암(靈巖), 황해도 해주(海州) 등이 있다.
장명(匠名)은 사기장인(沙器匠人)의 이름으로 성(性)과 명(名)이 모두 표기된 것과 한 가지만 표기된 예가 있다. 장인의 이름이 확인된 가마터(窯址)에 전북 완주 화심리, 광주광역시 충효동, 울산광역시 고지평, 경북 고령 사부리 등이 있다.
이외에 특별한 예로 한글명문이 있다. 한글명문은 한글이 반포된 1446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광주 충효동 가마터 출토 ‘어존’, 고령 사부리 가마터 출토 ‘소’, 부산 기장 하장안 가마터 출토 ‘라랴러려로료르도됴두’가 있다.
3) 지역성
분청사기의 지역성은 문양을 표현한 시문기법에 잘 드러나 있다. 시문기법 중인화상감기법 분청사기가 충청 · 경상 · 전라도에서 고르게 제작된 반면 철화기법분청사기는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제작되었으나 특히 충청도 공주지역에서 두드러지게 제작되었다. 박지 · 조화기법 분청사기의 제작은 전라도 지역에 집중되었다. 특히 15세기 후반에는 물고기문(魚文) · 모란문(牧丹文) · 파초문(芭蕉文) 등을 충청도 공주지역에서는 철화기법으로, 전라도 고창지역에서는 조화기법으로 표현하여 차이가 있다. 철화기법과 조화기법 분청사기는 문양을 나타내기 위한 바탕형성과정에서 백토가 넓은 면적에 분장되고 제작완료단계에도 유지되기 때문에 그릇 전체가 하얗게 보이는 특징이 있다. 제작지역별로 장인의 개성이 다르게 표출된 분청사기의 제작은 공납백자(貢納白磁)의 생산과 관련이 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년)이 쓴 『점필재집(佔畢齋集)』이존록(彛尊錄)에는 경상도 고령현감을 지낸 그의 아버지 김숙자(金淑滋)와 관련된 기록에 1440년대에 경상도 고령, 경기도 광주, 전라도 남원 등에서 매년 백자를 공물로 상납했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에 전국의 여러 자기소에서는 여전히 분청사기가 공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1450년대 이후에 고창 용산리 가마터의 예와 같이 관사명을 표기하고 인화문을 시문한 분청사기와 백자가 한 곳의 가마에서 제작된 것은 공납자기의 종류가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이행하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공납용 분청사기의 뚜렷한 특징인 인화문은 공납용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진상(進上)과 공납(貢納) 자기의 종류가 백자로 바뀌고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청화백자의 제작이 시작되면서 분청사기 제작자들은 자유분방하고 개성이 뚜렷한 철화분청사기와 조화분청사기를 제작하였다. 분청사기를 생산하다가 백자생산으로 이행한 가마의 실례로 충남 공주 학봉리, 전북 고창 선운리, 전남 보성 도촌리, 광주광역시 충효동, 경북 고령 사부리, 부산광역시 기장 상장안 가마(窯) 등이 있다. 1469년에 『경국대전(經國大典)』공전(工典)에 관요에서 백자를 제작할 사옹원 소속의 사기장(沙器匠) 380명이 등재되고 경기도 광주목에 관요의 설치가 완료되자 왕실용과 국용의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이후 분청사기는 문양이 없이 귀얄과 덤벙기법으로 백토만을 분장한 표면백색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으며 16세기 초반에 이르러 그 제작이 중단되었다.
3. 의의
분청사기는 태토의 특성과 문양을 장식하는 분장기법이 고려 말기 상감청자의 전통을 잇고 있다. 그러나 1410년대에는 그릇의 전면을 인화상감문양으로 빼곡하게 채우는 변화로 고려 상감청자와 시각적으로 차별화되었다. 태종과 세종연간에는 현물의 조세(租稅)인 공물(貢物)로 전국의 자기소에서 제작되었고 국용(國用)자기로 사용되었다. 특히 공납용 분청사기는 제작에서 사용에 이르는 전 과정에 중앙정부의 공납제도 운용 지침이 지방군현(地方郡縣)의 행정력을 통해 적용되었다. 이 점은 15-16세기 초반 사이의 시대상황을 구체적으로 반영한 실증자료로서 분청사기가 지닌 역사적인 의의이다. 그러나 중국 도자기의 향방이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하였고 조선의 공용자기 또한 그 중심이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바뀌었다. 이후 분청사기는 양식적인 엄격함을 상실하였고 짧은 기간에 강하게 표출된 지역적 특성도 표면을 백자처럼 보이게 하는 단순한 분장단계를 거쳐 이내 소멸하였다.
이러한 분청사기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고 자기 또한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하는 시기에 독자적인 양식을 갖추고 약 100여년의 짧은 기간 동안 존재하였다. 치밀한 인화문이 드러낸 질서와 균형의 추상성은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해 제도의 정비에 국력을 집중한 참신한 시대상과 잘 부합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장인들의 개성이 투영된 철화분청사기와 조화분청사기의 자유분방한 예술성은 현대 도예에서 재현과 해석이 지속되어 분청사기가 한국인의 고유한 미감을 지닌 전통문화예술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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