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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우리 문화와 예술에 관련된 수많은 주제들이 언급되고 있으나 대부분 시대별로 간략히 서술되어 그 개념과 변천 과정, 성격 등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영상 문화·예술이야기>는 한국사 속 문화·예술 분야의 주요 주제별로 그 흐름과 변천 과정, 특징과 성격 등을 전문가의 해설을 기반으로 동영상 자료로 제작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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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디지털 기술이 넘쳐나는 현대사회. 하지만 아날로그 방식의 도장, 즉 인장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보다 더 다방면에서 인장을 사용했다고 하는데요. 조선을 대표하는 왕에게도 특별한 인장이 있었습니다. 바로 의례용 인장인 어보입니다.
국가의 인장, 국새와 다른 어보. 어보는 어디에 쓰였던 인장일까요? 조선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인장, 어보를 소개합니다.

왕의 인장, 국새와 어보의 차이는?

왕이 참여하는 각종 행사에 왕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행렬의 맨 앞에 봉송하였다는 국새. 국새는 외교문서나 국가의 행정 등 집무용으로 사용하는 인장이었는데요. 그렇다면 국새와 비슷해 보이는 보는 어디에 사용하는 인장이었을까요?

어보는 의례용으로 만들어진 인장으로 왕, 왕비, 왕세자 등이 책봉될 때나 왕이나 왕비에게 존호, 시호, 묘호 등의 호칭을 올릴 때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어보가 급격히 많이 만들어졌다는데요.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존호를 올리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인장 예술의 종합판! 의례용 인장 ‘어보’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우선 어보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따라 어보를 만드는 재료부터 달랐는데요. 왕과 왕비의 어보는 금, 왕세자 이하는 대부분 옥으로 제작했다고 합니다.

어보는 글자가 새겨진 인면, 몸체인 인판, 손잡이 부분인 뉴, 술 장식이 달린 보수로 구성됐는데요. 동물을 본떠 만든 손잡이 뉴는 대한제국 이전까지는 대부분 거북이 모양의 귀뉴로, 황제국을 선포한 대한제국시기에는 용 모양의 용뉴 위주로 제작됐습니다. 바닥 부분인 인면에는 호칭과 신분을 새겼는데요. 왕과 왕비, 왕실 선조의 어보는 ‘보’ 왕세자 이하에게는 ‘인’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인장을 새길 때는 반듯한 서체가 아닌 구불구불한 서체를 사용했는데요. 구첩전은 왕실과 국가를 상징하는 서체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구불구불해서 따라 하기 어려워 위조 방지의 효과도 있습니다.

구첩전이 아닌 특별한 서체가 새겨진 어보도 있는데요. 바로 왕의 친필을 새긴 유일한 어보! ‘정조 효손 은인’입니다. 83세의 영조가 붓으로 쓴 글씨를 그대로 새겨 세손 정조에게 내린 어보인데요.

“영조 52년 2월, 정조는 영조한테 하나의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자기 아버지(사도세자)가 죽은 것이 실록에 기록될 것이기 때문에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것은 세초(삭제)해주십시오‘라고 상소를 올리고 난 뒤, 영조는 상소문을 보고 참 효성스러운 손자라고 생각해서, 이때에 효손이라는 글씨를 쓰고, '유세손서'라는 문서와 함께 내린 어보입니다.” 서준 문화재전문위원

인장 하나 만드는데 필요한 장인이 무려 20명?

인장 하나를 만드는데 몇 명의 사람이 필요할까요? 혼자서 뚝딱 도장을 만드는 현대와 달리 조선시대 왕실에서 하나의 어보를 만들기 위해선 많은 장인의 손길이 필요했다는데요. 후세에 참고하도록 왕실의 인장을 만드는 과정과 경비 등을 적은 보인소의궤를 보면, 이조판서와 호조판서를 비롯한 행정관이 29명, 23종의 기술자 77명이 참여하여 보인을 만든다고 나와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기술자가 필요했을까요? 바로 어보의 보관과 연관이 있는데요. 어보는 최소 6개 이상의 보자기와 상자에 싸서 보관합니다. 방충제 역할을 하는 약재까지 함께 넣어 각별한 신경을 썼는데요.

어보의 제작뿐 아니라 보통, 보록, 호갑, 보자기, 자물쇠 등의 물품을 제작하기 위해 많은 장인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공들인 어보는 어디에 보관할까요?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어보는 어보의 주인이 죽으면 종묘에 봉안되는데요. 그래서일까요. 궁궐에서 보관한 국새와 달리 종묘에 보관된 어보는 현재까지 비교적 많이 보존됐는데요.

조선시대에 제작됐다고 전해지는 어보는 약 366과.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수십 점의 어보가 유실됐다고 합니다. 최근 해외로 반출됐던 어보들이 환수되면서 현재 전해지는 어보는 대략 323과입니다.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어보. 다른 나라의 왕실에서도 인장을 만들었는데 조선 왕실의 어보가 등재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국이나 베트남 등 우리와 같은 어보를 그 나라에서도 제작해서 만듭니다. 그러나 유명한 사람, 한두 사람에 한정돼있는데 우리는 태조 이성계부터 마지막 순종 황제까지, 순정효황후까지 모든 왕실 구성원의 어보가 풀 세트로 다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조선 왕실의 영원한 영속성이라든가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훌륭한 기물로 봤기 때문(입니다).” 서준 문화재전문위원

수백 년이 지난 현대에도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인장, 어보. 어보를 통해 조선 왕조 500년의 권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국새는 국왕의 행정용 인장으로, 어보는 의례용 인장으로 사용됐다.
2. 왕의 친필이 새겨진 유일한 어보 ‘정조 효손 은인’은 영조정조에게 내린 어보다.
3. 어보의 주인이 죽으면 어보는 종묘에 보관됐다.

해설

어보는 왕실 사람들의 호칭과 신분을 나타낸 인장이다. 왕비를 비롯하여 왕세자, 왕세제, 왕세손 및 그들의 배우자 등을 해당 지위에 임명할 때의 책봉명(冊封名), 그리고 왕과 왕비를 포함한 왕실의 선조에 대한 공덕을 찬양하거나 통치를 종합・재평가하는 의미를 둔 존호, 휘호, 시호, 묘호와 같은 여러 호칭을 담았다. 어보는 최상 품질의 옥이나 금속으로 만들고 상서로운 동물인 용이나 거북 모양의 손잡이를 갖춤으로써 단순한 인장을 넘어 왕실 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예술품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아울러 어보를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해 제작한 보통(寶筒), 주통(朱筒), 보록(寶盝), 주록(朱盝), 호갑(護匣) 등의 각종 상자를 비롯하여 보자기, 끈, 열쇠, 자물쇠 등 많은 부속물품을 수반하므로 왕실 공예의 종합적 면모를 갖추고 있다.

어보는 왕실의 의례적 관례에 따라 해당 인물의 생시는 물론 사후에도 꾸준하게 이어졌다. 이러한 행위는 효(孝)라는 유교적 덕목을 왕실에서 실행한다는 의미와 함께 왕실의 영속성과 권위를 나타내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어보는 왕실의 끊임없는 정통성의 상징으로 역대로 종묘에 봉안하였다.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가 있는 신실(神室)마다 동쪽에는 보장(寶欌)을 두어 어보를, 서쪽에는 책장(冊欌)을 두어 어책을 봉안하였다. 어보는 왕실의 영속성과 상징성이 담긴 비장품으로 존숭의 대상이 되어왔다.

어보의 종류

어보는 몇 가지로 구분이 가능하다. 첫째, 왕비를 비롯하여 왕세자, 왕세제, 왕세손과 그 빈들의 책봉 때 제작한 책봉보인(冊封寶印)이 있다. 왕실의 일원으로 공식 승인하는 의물(儀物)로 어보와 함께 교명(敎命), 책(冊, 죽책・옥책・금책)을 수여하였다. 어보도 인장의 일종이므로 찍어서 그 효력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보다는 해당 인물을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그 권위의 상징물로서 수여하는 의미가 컸다. 어보의 또 하나의 갈래는 각종 명호(名號)를 새긴 경우이다. 국왕과 왕비, 상왕과 대비 및 왕실의 선조에 존호를 올릴 때 제작한 존호보(尊號寶)를 비롯하여 이들의 사후 시호를 올릴 때 제작한 시호보(諡號寶), 국왕이 승하하였을 때의 묘호보(廟號寶) 등이 있다.

어보에 새긴 신분질서

조선시대 어보는 용어와 형태, 재질면에서 신분의 차등을 두어 제작하였다. 우선 용어에서 왕비의 경우 ‘보’로 하고, 이하 왕세자로부터 왕세손빈까지는 모두 ‘인’으로 구분하였다. 따라서 왕비 책봉보의 명칭은 ‘왕비지보(王妃之寶)’로 하고 이하의 경우 모두 ‘왕세자인(王世子印)’과 같이 책봉명에 ‘인’ 자를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재질에서도 왕비의 경우 금으로, 왕세자 이하는 대부분 옥으로 제작하였으며, 간혹 은으로 제작한 특수한 사례가 있다.

국가 의례(儀禮)와 어보

어보는 국가 의례 가운데 가례(嘉禮)에 해당하는 책봉・존호・존숭 의례와, 흉례에 해당하는 국장・부묘 의례 때 해당 인물에게 바쳐졌다. 책봉명이나 존호, 시호, 묘호 등과 같은 호칭을 새긴 어보를 해당 인물에게 바치는 일은 의례의 핵심적인 절차였다. 왕실의 호칭은 다양한 의례에 따른 명칭이라 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어보, 어책, 교명 등을 제작하였다. 어보는 왕의 경우 왕세자 책봉 때와 등극 이후의 존호, 승하 이후의 존호・시호・묘호를 올릴 때 제작하였다. 왕비의 경우 세자빈 책봉 때와 왕비 책봉 때, 생시의 존호, 승하 후의 존호・시호・휘호 등을 올릴 때마다 제작하였다.

책봉은 왕비, 왕세자, 왕세제, 왕세손과 그 빈(嬪)들을 해당 지위에 임명하는 의식이다. 국왕은 책봉 받는 인물에게 임명장인 교명, 덕을 기리는 글을 담은 옥책이나 죽책과 함께 해당 지위의 상징인 어보를 수여하였다. 각 어보에는 ‘왕비지보(王妃之寶)’, ‘왕세자인(王世子印)’, ‘왕세제인(王世弟印)’, ‘왕세손인(王世孫印)’과 같은 책봉명을 새겼다.

어보는 국장, 부묘 등의 의례와도 관련이 깊다. 왕이 승하하면 중신들이 모여 시호・묘호・능호・전호 등을 결정함과 함께 시신을 매장하고 혼을 모시는 국장의례를 준비하기 위해 국장도감을 설치하였다. 도감에서는 시호를 새긴 시호보(諡號寶)를 제작하여 행사에 대비하였다. 시호보에는 묘호를 함께 새기기도 하고 중국으로부터 받은 시호를 새기기도 하였다. 시호보는 3년상을 마친 후 부묘의례를 거쳐 종묘에 모셔졌다. 이렇게 종묘에 봉안된 어보는 신위, 어책 등과 함께 국가와 왕실의 표상이 되었다.

어보의 서체

조선시대 어보에 사용한 서체는 대부분 구첩전(九疊篆)이다. 구첩전은 첩전(疊篆), 혹은 상방대전(上方大篆, 尙方大篆)이라고도 한다. 전서의 한 종류로 필획을 중첩하고 쌓아 올려 인면을 가득 메우는 서체이다. 필획이 많이 중첩된 경우 10첩 이상인 경우도 있다. 첩전은 어보를 포함한 관인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중국의 경우 송대(宋代)부터 시작하여 원대(元代) 이후에 성행하였으며 대부분 양각이다. 구첩전은 어보와 관인에 사용한 특별한 서체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발생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어보의 뉴식(鈕式)

조선시대 어보는 손잡이의 모양에 따라 용뉴(龍鈕), 귀뉴(龜鈕), 직뉴(直鈕)로 나눌 수 있다. 조선 전기 태조와 정종, 태종의 어보가 용뉴로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유물이 현전하지는 않는다. 세종 대 이전까지 만들어진 용뉴의 어보가 어떠한 이유에서 계속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에서 대한제국 수립 이전까지의 동물형 어보는 모두 귀뉴로 제작하였다. 귀뉴 어보는 방형의 보신(寶身)에 귀뉴의 양식을 유지했으며, 대한제국 성립 이후에는 귀뉴 어보와 더불어 황제국을 상징하는 용뉴 어보를 병용하였다. 귀뉴 어보는 앞 시대를 이어 꾸준히 제작하였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른 양식상의 변화가 뚜렷하다. 한편 직뉴형 어보는 3과가 남아있는데 모두 조선 전기 왕세자빈에게 내려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인의 종류와 역할

조선시대 의궤를 살펴보면 책봉, 상존호, 국장 등의 의식에서 어보의 제작과 관련해 차출한 장인의 수는 적게는 20여 명에서 많게는 50명이 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 장인들은 어보의 제작뿐 아니라 보통(寶筒), 보록(寶盝), 호갑(護匣), 보자기, 자물쇠 등 어보에 수반되는 여러 물품의 제작에 참여한 장인의 수를 포함한 것이다. 어보에 새길 글자를 쓴 서사관(書寫官)으로부터 사자관(寫字官), 화원(畵員), 보장(寶匠), 인장(印匠), 보문각장(寶文刻匠), 조각장(彫刻匠), 옥각수(玉刻手), 옥장(玉匠), 은장(銀匠), 소로장(小爐匠), 천혈장(穿穴匠), 마경장(磨鏡匠), 매듭장〔每緝匠〕, 두석장(豆錫匠), 과록장(裹盝匠), 지환장(指環匠), 쇄약장(鎖鑰匠), 시장(匙匠), 호갑장(護匣匠), 담편장(擔鞭匠), 소목장(小木匠), 칠장(漆匠), 침선비(針線婢) 등이 모두 제작에 참여한 장인들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도록

  • 국립고궁박물관 편, 2006. 『조선왕실의 인장』, 국립고궁박물관 개관 1주년 기념 특별전 도록
  • 국립고궁박물관 편, 2017, 『다시 찾은 조선 왕실의 어보』, 그라픽네트

단행본

  • 성인근, 2013, 『한국인장사』, 다운샘
  • 성인근, 2018, 『국새와 어보-왕권과 왕실의 상징』, 현암사
  • 임민혁, 2010, 『왕의 이름, 묘호』, 문학동네
  • 장경희, 2013,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 한국고전번역원 편, 2009, 『종묘의궤』, 김영사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편, 2004, 『보인소의궤』, 학연문화사

논문

  • 김양동, 1987, 「한국 인장의 역사」, 『한국의 인장』, 국립민속박물관
  • 서준, 2011,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어보의 제작과 종류 소고」, 『조선왕실의 어보』, 국립 고궁박관
  • 성인근, 2014, 「조선시대 어보(御寶)의 상징체계 연구」, 『온지논총』 제38집, 온지학회
  • 성인근, 2014, 「미국에서 환수한 조선왕실 인장문화재의 가치와 과제」, 『문화재』, 국립문화재연구소
  • 신명호, 2004, 「조선시대 국왕 호칭의 종류와 의미」, 『역사와 경계』 52집, 부산경남사학회
  • 임현우, 2007, 「조선시대 어보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장경희, 2001, 「조선 후기 왕실의 옥공예 장인 연구」, 『미술사연구』 15호, 미술사연구회
  • 정재훈, 2012, 「조선의 어보와 의례」, 『왕실의 상징 어보』, 국립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