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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우리 문화와 예술에 관련된 수많은 주제들이 언급되고 있으나 대부분 시대별로 간략히 서술되어 그 개념과 변천 과정, 성격 등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영상 문화·예술이야기>는 한국사 속 문화·예술 분야의 주요 주제별로 그 흐름과 변천 과정, 특징과 성격 등을 전문가의 해설을 기반으로 동영상 자료로 제작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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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한여름의 무더위를 싹 가시게 하는 시원한 얼음!
그런데! 우리의 선조들도 아주 오래 전부터 얼음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그 얼음은 어디서 났을까요? 그리고 누가, 어떻게 사용했을까요?

자연으로 만든 냉장고, 석빙고를 아시나요?

봉긋하게 솟은 봉분이 마치 무덤처럼 보이는 이곳, 이곳은 어디일까요?
돌 석, 얼음 빙, 창고 고. 석빙고!
돌로 만든 얼음 창고입니다.

선조들이 한여름에 얼음을 구할 수 있었던 비밀!
그 비밀의 창고가 바로 빙고입니다.

빙고는 한겨울 꽁꽁 언 강에서 얼음을 캐 저장해두었다가 여름이 되면 꺼내서 쓰는 얼음 창고인데요. 석빙고 이전에, 나무로 만든 목빙고와 짚으로 만든 초개빙고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대에 전하는 것은 석빙고뿐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빙고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유리왕 시대에 ‘쟁기와 보습을 만들고 얼음을 저장하였으며 수레를 만들었다’고 하고,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6년에 ‘얼음을 저장하도록 처음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 실물로 남아 있는 빙고의 가장 오래된 흔적은 백제 시대 유적인데요,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빈전 터로 알려진 공주 정지산 유적에서는 빙고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견되었고 충남 부여 백마강을 낀 구드래 일원에서는 백제 사비기의 빙고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경주에서는 김유신의 옛 집터로 알려진 재매정 유적에서 통일신라 빙고 터가 발견되는 등 발굴조사를 통해 삼국시대의 빙고 터가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자연 냉장고, 석빙고는 어떻게 얼음을 저장할까?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석빙고는 총 7개!
경주, 안동, 달성 현풍, 청도, 창녕, 창녕 영산, 그리고 북한의 해주에 남아있습니다.

“네, 이곳은 경주 석빙고입니다. 경주 석빙고는 남한에 남아 있는 석빙고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잘 지어졌다고 하는 석빙고입니다.” 김지영 박사

경주 석빙고는 석빙고의 전형적인 축조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석빙고는 먼저, 땅을 파서 반지하 공간을 만들고 벽을 쌓은 후 반원 모양의 천장을 만듭니다. 그리고 외부 열기를 막기 위해 흙과 돌을 섞고, 때로는 석회를 사용하여 봉분을 올립니다.

“석빙고 구조의 특징은 바로 반지하에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반지하 구조는 바깥 공기가 빠르게 데워지더라도 실내 온도는 큰 변화 없이 일정하게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바닥을 보시면 바닥은 경사가 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사 끝에는 이렇게 배수구가 있습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발생할 때 그 물은 경사면을 따라 빠르게 바깥으로 배출되어 내부를 건조하게 유지시켜줍니다. 천장을 보시면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긴 공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 가운데는 구멍이 있는데요, 이 구멍은 바로 바깥과 연결되는 환기 구멍입니다.” 김지영 박사

석빙고의 천장,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환기구! 석빙고에는 대개 2~3개의 환기구가 있는데요. 그런데, 선조들은 왜 석빙고를 밀폐하지 않고 오히려 환기구를 만들었을까요?

석빙고 내부는 외부 온도에 따라 점차 따뜻해지는데요. 그때, 더워진 공기는 대류 현상에 의해 위로 상승하게 됩니다. 그리고 환기구를 통해 공기는 배출됩니다. 따뜻한 공기가 빠져나가면 얼음을 조금 더 오래 저장하는데 도움이 되겠죠?

또한 석빙고는 그 입지도 중요합니다. 석빙고 입구는 따뜻한 바람이 최대한 덜 드는 방향으로 입구를 내었고 무엇보다 우선으로 하천 가까이 자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겨울철에 꽁꽁 언 강에서 얼음을 잘라 석빙고로 옮겨 오는 것은 아주 고된 노동이었기 때문에 이동 거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하천 가까이에 빙고를 두었던 것이죠.
이런 다양한 과학적 지식이 바탕이 됐기에 석빙고는 자연 냉장고가 될 수 있었습니다.

빙고의 얼음, 어떻게 사용했을까?

매년 겨울, 얼음을 캐고 이동시켜 빙고에 저장하는 것을 ‘장빙’이라고 하는데요, 조선시대에는 삼국시대, 고려시대와 같이 국가 주도하에 장빙을 실시하였습니다.

조선은 태조대에 국가 제사용 얼음을 저장하는 동빙고와 왕실용 얼음과 정2품 이상의 관료에게 나눠줄 얼음을 저장하는 서빙고를 설치하였고 왕실에서 쓰이는 고기와 생선을 관리하기 위해 창덕궁에 두 곳의 내빙고를 두었습니다.

매년 음력 12월 초가 되면 겨울 신에게 사한제라는 제사를 올려 장빙을 고한 후에 얼음 뜨기를 준비하는데요. 채취한 얼음은 동빙고에 1만 여 정, 서빙고에 13만 5천 여 정, 그리고 내빙고에 4만 여 정 저장하였다고 하니, 정말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다음 해 춘분이 되면 얼음 뜰 때와 같이 사한제라는 제사를 먼저 올리고 빙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엄격한 규율에 따라 얼음을 나누었는데요. 먼저 궁궐과 각 관아에 얼음을 분배하고 다음으로 정2품 이상의 문무 관료 등과 종친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또한 활인서의 병자들과 의금부, 전옥서의 죄수들에게도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18세기 이후,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얼음 수요가 많아지고 국가가 운영하는 빙고가 축소되면서 일반 백성들도 자유롭게 얼음을 사고팔게 되었습니다.

한여름의 무더위를 가시게 하는 시원한 얼음!
뛰어난 지식으로 축조한 빙고가 있어 우리 선조들도 얼음의 묘미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삼국시대부터 등장한 빙고 중 현존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석빙고이다.
2. 석빙고 축조의 특징은 반지하 공간, 경사진 바닥, 천장의 환풍기 등이다.
3. 서빙고, 동빙고, 내빙고의 얼음은 주로 국가 제사나 왕실·관아에서 사용하였다.

해설

1. 빙고(氷庫)의 역사와 석빙고

빙고(氷庫)는 ‘얼음’을 뜻하는 ‘氷’과 ‘곳집’을 뜻하는 ‘庫’를 써서 ‘얼음을 두는 곳간(창고)’이란 뜻이다. 우리나라 빙고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확인된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노례왕조(弩禮王條)에 “始製黎耜及藏氷庫作車乗”라 하여 “쟁기와 보습을 만들고 얼음을 저장하였으며 수레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실물자료로 남아있는 오래된 빙고의 흔적은 백제, 신라, 통일신라 모두에서 확인되는데 백제 무령왕비의 장지로 알려진 공주 정지산 유적, 충남 부여 구드래 유적, 천안 두정동 및 용원리 유적, 연기 나성리 유적, 상주 병성동·헌신동 유적, 경주 손곡동·물천리 유적, 청원 국사리 유적 등에서 발견되었다. 빙고는 고려시대에도 계속 운영되었는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정종 2년(1036년)에 왕에게 얼음을 올렸다는 내용이 있고, 『고려사(高麗史)』 문종 3년(1049년) 6월에 “고위 관리들에게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운영하였던 서빙고, 동빙고, 내빙고가 있었고, 읍지도와 여지도서에서 31개소의 지방 빙고가 확인되었다. 이 때까지 빙고는 대부분 나무나 짚으로 만든 목빙고(木氷庫)나 초개빙고(草蓋氷庫)였고 돌로 만든 석빙고(石氷庫)는 18세기에 등장하였다. 오늘날 전해지는 경주석빙고, 안동석빙고, 창녕석빙고, 청도석빙고, 현풍석빙고, 영산석빙고, 해주석빙고는 모두 조선시대 후기의 석빙고이다. 경주석빙고는 남한의 석빙고 중 가장 크고 정연하게 지어져 으뜸이라 평가된다. 안동석빙고는 원래는 도산면 동부동에 자리하였으나 안동댐 건설 당시 수몰지에 포함되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청도석빙고는 현존하는 석빙고 중 시기가 가장 이른 숙종 39년(1713)의 것이고, 해주석빙고는 원래 고려의 것을 개축하였다 한다. 이들은 크기와 위치가 다양하지만 축조기법과 기본구조가 동일하다.

2. 석빙고의 과학적 원리

석빙고는 땅을 일정한 모양으로 파서 반지하 공간에 지어졌다. 빙고를 반지하에 만든 것은 지상보다 온도 변화가 적어 낮은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자연상태에서 한여름 석빙고 내부의 기온은 외부보다 10도 이상 낮은 상태를 유지한다. 만약 내부에 얼음이 저장되어 있었다면 훨씬 낮은 온도를 유지할 것이다. 목빙고는 나무로 지어져 쉽게 썩고 화재에 취약하여 잦은 수리가 필요한 반면 석빙고는 화재와 열화로부터 강하여 내구성이 좋다. 석빙고에 사용된 석재들은 화강암이 가장 많은데, 대부분 석빙고가 위치한 지역 안에서 조달된 돌이다. 또한 다른 건물에 사용되었던 석재를 재활용하거나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강돌이나 자연할석도 많이 이용하였다. 석재의 채취와 운반에 소요되는 자원을 최소화하려 했던 것이다.

석빙고 바닥은 흙으로 다지거나 편평한 돌을 깔고 경사지게 만들었다. 입구 반대편 끝의 바닥에 배수구를 두어 얼음이 녹은 물이나 땅 속에서 흘러들어온 지하수가 바깥으로 빨리 배출되도록 하였다. 이는 실내 공기를 냉각하는 효과뿐 아니라 건조하게 유지하여 얼음이 빨리 녹는 것을 방지한다. 천장에는 환기구가 있는데 빙실 내의 데워진 공기가 대류에 의해 상부로 올라가 환기구를 통해 외부로 배출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바깥의 뜨거운 태양열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빗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을 두껍게 만들고 흙과 강회로 보강하여 단열성을 강화하였다.

얼음을 오래 보관하기 위한 또 다른 요소는 단열재의 사용이다. 승정원일기 인조 때의 기록을 보면 압도(鴨島), 즉 지금의 난지도에서 “갈대 1만 5천 묶음을 채취하여 빙고의 상하 사방을 덮었다”고 하고 다른 기사에도 “풀을 베어오는데 군사 55명이 17일 동안 부역했다”는 내용이 있어 상당히 많은 양의 갈대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볏짚이나 갈대는 속이 비어있어서 열을 잘 전달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단열재였다.

3. 빙고의 운영과 생활상

빙고의 운영은 전담 아문을 두어 엄격한 기준과 절차에 의해 이루어졌다. 『용재총화(慵齋叢話)』 第8券(1520년)에 의하면, 동빙고는 국가 제사용 얼음을 보관하므로 봉상시에서 주관하였고 한성부 남부 주민이 소속되어 장빙역(藏氷役)을 수행하였다. 서빙고는 왕실과 문·무 정2품 이상 관리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저장하였는데 각 채마다 장빙역을 책임진 아문이 있어 이의 주관하에 한성부의 중부, 동부, 서부, 북부 주민이 얼음 채취를 수행하였다. 내빙고는 궁궐 내 얼음의 수요를 담당하였고 창덕궁의 북쪽과 남쪽 두 군데에 두었다.

얼음은 두께가 4치(약 12m) 이상 되어야 채취할 수 있었는데 보통 매년 음력 12월에 날씨가 상당히 추울 때 작업해야 했다. 날씨가 춥지 않아 얼음의 두께가 얇거나 얼음이 얼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거나 채빙 시기를 늦추기도 하였다. 벌빙을 위해 한강가에 수천명의 백성과 군사가 매년 동원되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빙고에 저장한 얼음이 동빙고에 10,244정, 서빙고에 134,974정, 그리고 내빙고에 40,000정이라고 전한다. 얼음을 저장할 때와 빙고를 열 때는 사한(司寒)에게 제사를 지냈다. 저장된 얼음은 보통 춘분부터 상강까지 사용하였다. 서빙고의 얼음은 비변사, 승정원, 홍문관, 시강원, 익위사, 춘추관, 병조, 내의원, 양현고, 종친(宗親)과 정2품 이상, 육승지, 규장각 관원 등에게 두루 나누어 주고 퇴직 관리, 환자와 죄인에게도 매년 6월에 얼음을 나눈다 하였다. 가을의 중간 달 이전에 얼음을 다 써버리거나 보관이 허술하여 얼음이 녹으면 해당 관원은 무거운 죄로 다스려졌다.

빙고 운영으로 인해 백성의 고역이 심할 뿐 아니라 얼음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얼음을 몰래 내다 파는 관리나 얼음을 훔치는 도둑이 생겨나고 심지어 빙고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해마다 빙고를 수리하기 위해 소모되는 재목과 국고도 상당하였다. 빙고의 폐단이 심하자 정조는 1782년에 얼음을 돈으로 사고파는 일을 허용하였다. 백성들에게 부과된 빙고역을 줄이는 대신 강민들이 얼음을 사적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생업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국영 빙고를 언제 폐지하였는지 정확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19세기 말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20세기 이르러 일제에 의해 현대식 제빙시설과 빙고가 만들어지면서 전통식 국영 빙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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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중앙과학관, 2011, 『석빙고의 장빙원리와 자연에너지 활용기술』
  • 권오돈, 김용국, 이지형(공역), 1971, 『용재총화』, 한국고전번역원
  • 김경희(역), 1998, 『홍재전서』, 한국고전번역원
  • 남만성(역), 1969, 『동문선』, 한국고전번역원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103, 대성문화
  • 문화재관리국, 1994, 『한국의 석빙고』
  • 문화재청·불교중앙박물관, 2017, 『금석문 탁본 조사 보고서』
  • 송기채(역), 2002.『농암집』, 한국고전번역원
  • 심상육, 이명호, 2017, 『부여 구교리 구드래 일원 백제 건물, 도로, 빙고 유적』, (재)백제고도문화재단
  • 심상육, 이미현, 이화영, 2017, 『부여 구교리 130번지 일원 조선 빙고 유적-부여나성(서나성) 발굴조사』, (재)백제고도문화재단
  • 이은석, 2016, 「신라인과 석빙고」, 『공감! 문화재』, 문화재청
  • 이재옥(역), 2019, 『대전회통』, 한국학중앙연구원
  • 조순희(역), 2011, 『허백당보집』, 한국고전번역원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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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백, 2018, 「우리나라 빙장선 도입 시기에 관한 소고」, 『해양정책연구』33권 2호
  • 배연경, 1999, 「열유체 수치해석에 의한 환경에너지 시스템 연구」, 충남대학교 환경공학과 석사학위논문
  • 신동수, 1980, 「석빙고의 전열해석」, 『산업기술연구소논문보고집』2권
  • 진홍섭, 1964, 「경주 석빙고의 축조연대」, 『이대사원』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