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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우리 문화와 예술에 관련된 수많은 주제들이 언급되고 있으나 대부분 시대별로 간략히 서술되어 그 개념과 변천 과정, 성격 등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영상 문화·예술이야기>는 한국사 속 문화·예술 분야의 주요 주제별로 그 흐름과 변천 과정, 특징과 성격 등을 전문가의 해설을 기반으로 동영상 자료로 제작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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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동, 동성로, 서성동, 서성로, 남성동, 남성로, 성내동, 북성로! 동문시장, 서문시장, 남문시장, 북문시장!
지금까지 나열한 지명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성 또는 문이라는 명칭이 들어가 있다는 점입니다. 성이라 하니 당장 웅장한 성문과 드높은 성벽의 모습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여기서 이상한 점 하나! 지명의 유래와는 달리, 우리가 상상하는 성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지명에만 남아있는 성들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축조되었으며, 왜 대부분 보이지 않는 걸까요?

성(城)이란 무엇일까

우리나라에 성이 만들어진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곳의 마을마다 맹수나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성이 지어졌습니다. 초창기 성의 모습은 거주지 주변으로 땅을 파서 도랑을 두르는 환호와 나무말뚝을 이어 벽을 세우는 목책의 형태가 많았는데요, 보다 단단한 성을 쌓기 위한 노력이 더해지며 주변의 흙을 이용해 성을 쌓는 토성과 돌로 벽을 쌓는 석성으로 성의 축조술이 발전하면서 토성과 석성은 우리나라 성 축조의 기본 수법으로 자리잡습니다.

성의 핵심 방어시설

성의 방어 시설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체성과 옹성, 여장, 치성, 해자 이 다섯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체성은 성곽을 둘러싼 성벽을 말합니다. 옹성은 성문 앞을 둥글게 혹은 네모지게 한 겹 더 쌓은 성벽으로 성문을 이중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한 시설입니다. 성벽 위에는 작은 담장 격인 여장이 있습니다. 여장은 성벽 위에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중요한 방어시설입니다. 치성은 성벽에 붙은 적을 측면에서 격퇴시키기 위해 고안된 시설입니다.

해자는 성곽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고 고랑을 내거나 자연의 하천 등을 이용해서 만든 성 바깥의 1차 방어시설입니다. 해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성에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나라 각 곳에 백성들의 거주지를 둘러 보호하는 여러 성이 있었는데, 왕이 거주하는 수도의 성을 도성이라 불렀으며 왕이 살지 않는 지방 고을의 성은 읍성이라 불렀습니다.

조선시대 읍성

읍성은 조선 초기 태종에서 세종 시기까지 집중적으로 축조나 개보수가 이루어졌는데요, 세종 12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여덟 곳을 시작으로 왜구의 침략이 잦은 남해안 연안 지역을 따라 읍성을 차례차례 올렸습니다.

‘병조판서 최윤덕이 각 고을의 성을 축조할 조건을 아뢰다.’ - 『세종실록』 48권, 세종 11년 2월 10일

“하삼도에 무려 62개의 읍성을 축조할 정도로 강력한 의지를 가지셨는데 읍성을 만들기 위한 각 지역별로 지금의 국무총리 같은 재상급들을 파견하여 직접 현장을 감독하게 하시고 수성전선색(修城典船色)이라는 기관에서 축성 도본을 직접 만들어서 전국에 일괄적으로 배포하고 똑같은 형태의 규식과 부대 시설을 만들게끔 강력하게 추친합니다.” 이일갑 / 시공문화재연구소 소장

‘병조에서 아뢰기를, “사수색(司水色)을 고쳐 수성 전선색(修城典船色)이라 하였으니, 일에 삼가며 부지런한 자 4인을 뽑아 별감(別監)으로 삼고, 겸해서 각 고을의 성 쌓는 일을 맡아 보게 하여, 각도에 나누어 보내서 성 쌓는 일을 감독하도록 항식(恒式)을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72권, 세종 18년 5월 29일

세종이 이렇게 읍성을 쌓는 일에 공을 들였던 배경에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읍성을 통해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지방 토착세력인 호족과 향리들의 힘을 억제하고 중앙집권화를 실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세종은 한양도성을 기준으로 읍성 안에 각급 관아를 설치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읍성 안에 직접 머물며 각 고을을 다스리게 하였고, 사직단, 여단, 성황사 등의 공적 제사 시설을 정비하여 지방관이 직접 제사를 담당하게 합니다. 이로써 조선 전국의 군현은 모두 동일한 공간구조와 시설을 갖추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지방 세력의 구심점이었던 서원이나 향교가 성 밖으로 밀려나기도 했습니다.

읍성 안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은 왕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모신 객사입니다. 일반적으로 객사는 지방관리들이 왔을 때 머무는 좌우 정청의 숙소를 가르키지만 가운데 정청에 감실이란 공간을 두어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왕에게 예를 올리게 했습니다.

객사 다음으로 중요한 읍성 안 시설은 지방관의 집무 영역인 동헌입니다. 동헌은 관청의 일반적인 명칭으로 이곳에서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졌습니다. 동헌 옆에는 지방관과 그의 가족이 거주하는 내아가 있었으며 이외에도 다양한 행정 시설과 생활 시설이 읍성 안에 존재했습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에는 마을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민가를 읍성 안에 두는 경우도 늘어납니다.

조선 전기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읍성은 세종 때 96개 행정 구역에 존재했으며 16세기 160개 행정 구역으로 확대되지만 18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백 여개로 줄어듭니다. 이처럼 읍성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낡아 무너지기도 하고 수리하여 고쳐 쌓기도 하였지만 세종이 처음 생각했던 근본적인 읍성의 개념만은 바뀌지 않았고, 읍성은 조선 백성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 굳어져 단단히 제자리를 지켰습니다.

읍성의 훼철

읍성이 근본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읍성의 모습을 기획했던 조선왕조가 흔들리면서부터였습니다. 고종 44년인 1907년, 구성원 대부분이 일본인으로 채워진 성벽처리위원회가 조직되고 한양 도성의 성벽과 성문들이 먼저 헐려 나갔습니다. 교통과 운송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각령 내각령 제1호 성벽처리위원회에 관한 건. 제일조 성벽처리위원회는 내부 도지부 군부삼대신의 지휘감독을 수하야 성벽의 훼철과 기타 차에 관련한 일절 사업을 처리한다.’ - 「황성신문」, 1907년 8월 8일

성벽처리위원회는 이 내각령을 근거로 전국의 읍성을 계획적으로 철거해 나갑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선 1910년에는 ‘읍성훼철령’이 공식적으로 내려지게 되는데요, 읍성의 중심에 있던 객사와 동헌은 관공서나 학교로 전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철거된 성벽의 성돌은 철거를 주도했던 인물들에 의해 헐값에 팔리고 도로와 건물, 심지어 하수구의 벽돌에까지 사용됩니다. 해방 이후에도 읍성은 한국전쟁 시기 다시 파괴되고 산업화 시대의 물결 속에서 방치되고 훼손됩니다.

‘중양가절 말 말아라 통곡일셰 누백년을 존숭하던 대구객사 어디있노. 중양가절 말 말아라. 전무후무 비기수단(자기 몸만 살 찌우는 수단) 대구성곽 구공해를 일시간에 팔아먹네.’ - 『대한매일신보』, 「중양 타령」, 1909년 1월 16일

“우리가 광복이 되고 난 이후에 오히려 산업화라든지 도시화로 오히려 우리 손에 의해서 더 훼손이 많이 되고, 땅속에 매몰되고, 없어진 경우가 허다하게 많이 있습니다.” 이일갑 / 시공문화재연구소 소장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성의 이름을 가진 많은 지역에서 정작 성의 모습은 찾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에필로그]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안정된 국가 운영을 목적으로 축조된 읍성은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이자 우리 삶과 문화를 반영한 공간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도시가 조선시대 때 축조된 읍성 안 공간을 기반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이제 웅장한 성벽을 볼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지명 속에 남겨진 읍성의 흔적을 떠올리며, 우리 역사의 흥망성쇠도 한 번쯤 되짚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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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국사편찬위원회
제작 : 스튜디오 바카
자문 : 이일갑
검수 : 나동욱, 명재림, 서명원
수어통역 : 최황순
촬영·자료 협조 : 고창군청,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 대구시청, 동래구청, 문화유산채널,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부산광역시립박물관, 부산근현대역사관, 부산대학교박물관, 상주박물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울역사아카이브, 순천시청, 전주시청, 청주시청, 한국문화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성백제유물전시관, KBS바다, KTV 국민방송

해설

읍성이란 무엇인가?

읍성(邑城)은 지방의 주요 거점에 군사적인 기능과 행정적인 기능이 복합되어 축조된 성곽이다. 우리나라에서 읍성의 순수한 개념이 도입된 것은 고려시대 후기부터였다. 이때 축조된 읍성은 왜구의 창궐과 관련한 군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고려시대 후기에 축조된 29개의 읍성 중 23개는 경상도에 축성되었다. 조선시대로 이어진 읍성 축조는 태종 15년(1415)을 기점으로 다음 대인 세종을 거쳐 문종·단종에 이르는 동안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중심으로 하여 의욕적으로 추진되었다.

“읍성”은 가장 기본적인 구조가 체성(성벽)를 비롯하여, 성문, 부대시설인 치성, 옹성, 수구, 여장, 해자, 조교 등이 있다.
 ① 치성: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격퇴시킬 수 있도록 고안된 시설
 ② 옹성: 성문 앞에 둥글게 혹은 네모지게 한 겹 더 성벽을 쌓아서 성문을 이중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한 시설
 ③ 수구: 성내에는 개천과 성벽이 만나는 곳에 수문을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수구는 평시에는 하수 및 개천의 방류에 사용되었지만 유사시에는 용수공급 및 화공에 대한 대비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
 ④ 여장: 살받이라는 뜻이 있으며, 성벽위에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시설
 ⑤ 해자: 성벽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 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시설로서 물이 차면 호(壕) 또는 해자(垓子), 물이 없으면 황(隍)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부대시설 이외에도 성곽의 거주주체에 따라 궁성지, 관아, 객사, 창고, 연못 등의 내부시설이 설치 축조되어 있다.

읍성은 왜 쌓았을까?

읍성의 본격적인 축조는 세종 12년(1430)에 경상도 영일, 곤남, 합포, 전라도의 임피, 무안, 순천, 충청도의 비인, 보령 등 8개처의 읍성을 시작으로 왜구의 침탈이 빈발한 남해안 연해지역 중 방어가 가장 긴요한 곳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문종원년(1451)까지 하삼도 뿐만 아니라 강원도의 연해지역도 축조가 계획되었고, 세조 이후 성종, 중종조에 이르면서 점차로 내륙지역 읍성 축조까지 확대되어 갔다. 이후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전국적으로 행정구역 단위별로 읍성의 신축 및 수개축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통상 읍성 축조 시 고려되는 사항 중에는 입지조건이 중요하다. 이러한 것은『세종실록(世宗實錄)』을 참고하면, 읍성의 축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꼽은 곳은, 넓고, 평평한 곳, 샘물이 풍부한 곳, 험조함에 의지하는 곳과 교통이 편리하여야 하는 곳, 경작지가 가깝고 비옥한 곳, 내부가 험하고 큰곳과 주민들이 번성한 곳, 그리고 석재가 많아서 공력을 덜 수 있는 곳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읍성의 축조목적이「有事則固門防禦 無事則盡초田野」하기 위한 것이므로, 백성들이 입보하여 오랜 기간 머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풍부한 수원과 백성들이 거주하고 관사와 창고를 설치할 만한 적당히 넓은 지형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수록된 335개소의 군현 중 읍성이 설치된 곳은 96개소로 나타나고 이를 도별로 살펴보면, 충청도 15개소, 전라도 20개소, 경상도 27개소, 황해도 4개소, 강원도 6개소, 평안도 16개소, 함길도 8개소이다.

이 가운데 하삼도(경상, 전라, 충청도)에 축조된 읍성 숫자는 62개소이다. 또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행정구역과 비교하여 보면 행정구역 330개소 중 읍성이 있는 곳이 160개소이고 2개소 혹은 3개소의 성곽이 있는 읍성을 더하면 총 190개소에 이른다. 한편『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334개소의 군현 중 읍성이 있었던 곳은 107개소로 수록되어 있어『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읍성 수보다는 상당수가 감소하여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 등의 전란과 수리를 하지 않음으로 인해 형체만 있고 쓸모가 없게 방치되었기 때문이다.

읍성 성벽과 부대시설은 어떻게 쌓아올렸을까?

(1) 체성
조선 전기에는 장대석을 수직으로 세운 후 그 위로 성돌을 설치하며 틈새에 끼임돌을 설치한다. 이때에도 성돌 크기와 상태를 고려하여 몇 개의 공정으로 나누어 체성 외벽을 축조하였다. 반면에 조선 후기에 읍성 및 영진보성, 산성 체성 외벽 축조수법은 마찰면을 많이 두고 끼임돌이 없이 맞물려 쌓으며 허튼층쌓기보다는 바른층쌓기 등을 적용한 사례들이 확인된다. 각 체성 구획별로 공정 횟수에 따라 사용되는 성돌 개수 및 크기가 다르다. 읍성 체성부 내벽 축조수법은 크게 협축식, 계단식, 내탁식으로 구분된다.

(2) 옹성 문지
옹성은 적을 방어함에 절대로 필요하다고 하였으며 또한 사방으로 밖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네 모퉁이의 적군을 막을 수가 있다고 하여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로 옹성의 설치를 강조하고 있다. 조선시대 읍성에 축조된 옹성은 그 평면형태에 따라 ㄱ자형과 반원형으로 나눌 수 있다.

(3) 치성
체성에서 외측으로 돌출시킨 방형, 장방형의 구조물을 치(雉)라하고, 반원형은 곡성(曲城)이라 한다. 이 치성은 성아래에 바짝 다가선 적을 성상에서 공격할 수 없으므로 체성으로부터 돌출시킨 성벽에서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인 것이다.

(4) 해자
해자는 성벽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 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방어시설의 하나로서 아주 이른 시기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방어시설이었다. 우리나라 읍성 해자의 바닥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목익이 설치된 경우가 많으며 이 목익과 함께 바닥에 판석이나 할석을 깔아 목익을 고정하고 있다.

읍성에서 중요한 곳은 어디였을까?

읍성 내의 주요 건물은 중앙정부의 왕, 고을의 수령, 그리고 고을의 향민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객사, 아사, 향청을 배치하고, 교육, 사상, 문화의 중심역할을 담당한 향교와 서원을 두었으며, 제사를 위한 시설로서 문묘, 사직단, 여단, 성황단이 있었다. 그리고 각종 창고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용도에 따라 읍창, 군기고, 화약고, 사창, 수미고(需米庫), 환창(還倉) 등이 있었다.

(1) 객사(客舍)
객사는 객관(客館)이라고도 한다. 지방관이 왕명을 받아 지방에 여행할 때 머무는 숙소를 가리키나,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수령을 비롯한 관원들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바라보며 예를 올리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동헌보다 중요한 건물로 성내의 중요한 자리에 마련하였다. 객사의 공간 배치는 문과 건물 사이에 넓은 마당이 있어 객사 건물은 중앙에 3칸의 정정이 있고, 그 좌우에 지붕을 한 단 낮춘 익헌(翼軒)이 마련되어 있다.

(2) 동헌(東軒)
동헌은 지방 소재지에 있는 관청의 일반적인 명칭으로 중앙에서 파견되어 관찰사·수령 등이 정청(政廳)으로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진 정무를 돌보는 곳이다. 동헌은 지방관의 생활처소였던 내아(內衙, 또는 西軒)고 구획지어 마련되었는데 일반적으로 내아건물은 서쪽에 동헌은 동편에 위치하고 있어 동헌이라 불리웠다. 동헌 구조는 대청·방·퇴칸으로 이루어졌으며, 석축 기단을 마련한 후 그 위에 정면 5~7칸, 측면 3칸의 건물 형식이 많이 축조되었다.

성내동과 성외동은 어디인가?

우리 주변에는 성곽과 관련한 전설과 유래가 많다. 읍성과 관련한 지명사용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행정구역명 가운데 서대문구, 동대문구, 혜화동, 서소문동 등은 당시 서울성곽에 딸린 성문의 명칭을 그대로 행정구역명에 사용한 것으로 당시 성곽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각 지방자치체의 명칭 역시 이와 같이 성곽에 기반한 것이 많이 있다. 특히 읍성이 존재하는 곳을 기반으로 하여 도시화가 이루어진 경우가 많은 관계로 행정동의 명칭 역시 읍성과 관련한 것이 많다.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흔하게 발견되는 것으로 동문고개(동문이 있던 고개), 서문동, 동문동, 성내동, 성외동, 남문동 서문시장 등은 여전히 읍성과 관련한 다양한 지명으로 그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읍성은 왜 없어졌을까?

그럼 이렇게 많은 읍성은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우리나라 읍성은 1910년 일제에 의한 읍성철폐령을 기점으로 일제에 의해 계획적으로 훼손 해체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광복 후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그 양상을 파악하기가 더욱 곤란해졌다. 대개 행정구역의 중심지역에 위치하던 읍성의 특성상 현대화, 도시화 이후 읍성의 윤곽을 파악하기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단행본

  • 손영식, 1987, 『한국성곽의 연구』,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 심봉근, 1995, 『한국남해연안성지의 고고학적 연구』, 학연문화사
  • 심봉근, 2006, 『한국문물의 고고학적 이해』, 동아대학교 출판부
  • 심정보, 1995, 『한국 읍성의 연구』, 학연문화사
  • 유재춘, 1999, 『근세 한일성곽의 비교연구」, 국학자료원
  • 이일갑, 2021, 『조선의 읍성』, 국학자료원

논문

  • 나동욱, 2005, 「경남지역 읍성과 진성의 시·발굴조사 성과」,『동아문화』창간호
  • 장경호, 1987, 「해자의 기원과 그 기능에 관한 고찰」,『삼불김원룡교수정년퇴임기염논총』
  • 차용걸, 1988,「고려말·조선전기 대외관방사 연구」, 충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