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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제목 서경
한자명 西京
유형
시대 고려 시대
관련국가 고려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고려 시기 평양(平壤)에 설치하였던 별경(別京).

[내용]

서경은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 대부터 고구려의 옛 수도이자 지맥(支脈)의 근본으로서 중시되었다. 태조는 즉위 초부터 평양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를 설치하여 중시하였으며, 얼마 후 서경으로 승격시켰다. 제3대 임금인 정종(定宗, 재위 945~949)은 서경 천도를 계획하였으며, 12세기 중반 인종(仁宗, 재위 1122∼1146) 대에도 묘청(妙淸) 등이 서경 천도를 주장하였다. 대체로 고려 전기 서경은 양경 체제의 한 축으로서 개경(開京)의 역할을 보조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역대 국왕들은 관행적으로 서경에 가끔씩 행차하여 머무르곤 하였다. 고려 중기에 남경(南京)이 설치된 후에는 서경, 개경, 남경의 삼경 체제로 운영되었다. 옛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慶州)도 동경(東京)이라 칭해졌으나, 서경이나 남경과 같이 국왕이 순행하는 부수도의 기능은 거의 수행하지 못하였다.

서경은 풍수적으로도 한반도 지맥의 근본으로 인식될 만큼 중시되어, 태조 대부터 성곽이 건설되었고 궁궐과 주요 사찰이 건립되었다. 11세기 후반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대에는 기존의 궁에 더하여 좌⋅우궁을 창건하였고, 12세기 초 예종(睿宗, 재위 1105∼1122) 대에는 용언궁(龍彦宮)을 창건하였다.

서경을 중시하는 인식은 인종 대 묘청의 난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승려 출신인 묘청은 정지상(鄭知常) 등의 서경 세력과 함께 서경에 대화궁(大華宮)을 짓고 이곳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세력의 반대에 부딪히자 1135년(인종 13)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 당시는 여진의 금(金)이 요(遼)와 북송(北宋)을 멸망시키고 고려와 갈등을 빚던 시기였는데, 묘청 등은 서경으로 천도하여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하며 금과 맞설 것을 주장하였다.

묘청의 난이 1년 만에 진압되면서 서경 세력은 몰락하고 서경의 여러 관제도 격하되거나 폐지되었다. 원래 고려는 개경의 관제를 모방하여 서경에도 별도의 독립적인 기관을 두는 분사(分司)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1062년(문종 16)에는 서경 주변의 영역에 서경기(西京畿) 4도를 설정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서경기도 해체되었다. 얼마 후 서경의 지위는 일부 복구되기도 하였으나, 명종(明宗, 재위 1170∼1197) 대 조위총(趙位寵)이 서경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금 대대적으로 관제가 개편되어 서경의 지위는 훨씬 더 격하되었다.

몽골 침입기인 1269년(원종 10)에는 서경 지역민인 최탄(崔坦) 등이 반란을 일으켜 북계 지역을 거느리고 원(元)나라에 항복하였다. 원에서는 서경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다가, 1290년(충렬왕 16) 고려에 돌려주었다. 이후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이 되었으나 예전과 같은 번영과 위상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1369년(공민왕 18)에는 만호부(萬戶府)로, 그 뒤에는 다시 평양부(平壤府)로 개편되었다.

[의의]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운 고려는 황폐해진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을 별경으로 삼아, 궁궐과 주요 사찰을 건립하고 국왕이 자주 머물게 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왕조와 국왕의 초월적 위상을 구축하는 데 서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 관련자료

ㆍ서경(西京)
ㆍ서도(西都)
ㆍ평양(平壤)
ㆍ호경(鎬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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