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삼국유사』 단군 신화의 검토
현전하는 자료 중에서 단군 신화를 전하는 가장 오래 된 자료는 『삼국유사』 권 1, 기이 편 고조선(古朝鮮) 조에 실려 있는 신화이다. 그런데 이후 지속적으로 편찬된 역사서 및 기타 자료에는 다양한 형태의 단군 신화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기본 내용은 유사하지만, 구체적으로 일정한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따라서 단군 신화의 다양한 자료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중 내용상 대표적인 단군 신화 자료에 따라 다음 세 가지 유형을 꼽을 수 있다. 첫째, 『삼국유사』 유형과 『제왕운기』 유형, 『응제시주』 유형이다. 이 세 자료는 서로 유사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일정한 차이가 있다.
우선 가장 대표적인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단군 신화부터 읽어 보도록 하자.
일연(一然, 1206∼1289)은 고려 후기에 활동했던 승려이다. 일연은 고려 희종 2년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설악산 아래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가서 출가하였고, 이때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22세에 과거 시험의 승과에 나가 합격한 일연은 이후 몽골 전란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경상도 달성의 비슬산을 중심으로 수행하였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늦었지만, 그의 수행과 학문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던 터라 점차 전국으로 그의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충렬왕의 부름을 받아 자문 역할을 하면서 왕의 존숭을 받았다. 77세 되던 해에는 충렬왕이 그를 국존으로 책봉하였으며, 임금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절하는 의례를 행할 정도로 후대하였다. 그 뒤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麟角寺)로 물러났지만, 이곳에서 선문을 총망라하여 구산문도회를 두 번 개최하는 등 여전히 불교 교단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인각사로 내려오고 나서 5년 뒤인 1289년에 8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일연이 활동하던 시대는 장기간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을 끝내고 그들의 간섭을 받게 된 시기였다. 그는 일생 동안 전국 각지의 절에서 승려 생활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일연은 실천적인 불교를 표방하고 현실의 위기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모색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가 1281~1289년 무렵에 완성한 『삼국유사』의 편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를 쓸 당시에는 이민족인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오랜 항전을 치렀고, 또 그들의 간섭을 받으면서 민족적 자주 의식 내지 위기 의식이 높아져 있었다. 그러하기에 『삼국유사』에 이러한 자존적 의식이 강하게 투영되었으며, 아래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단군 신화의 내용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료 1-1-01〕『삼국유사』 권 1, 기이 편 고조선(古朝鮮) 조
(가)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라를 개창하여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때는 (중국의)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였다.”라고 하였다.
(나) 『고기(古記)』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널리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弘益人間].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였다. 이가 환웅 천왕(桓雄天王)이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善惡)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에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체를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곰은 그것을 먹으면서 기(忌)한 지 삼칠일(三七日: 21일) 만에 여자의 몸으로 변하였으나,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않아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양 단수(壇樹)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였다. 그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하였다.
(라) 당(唐)의 고(高)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년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마) 주(周)나라의 호왕(虎王=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
▣ 『위서(魏書)』에 보이는 고조선의 건국 신화
위 『삼국유사』에는 전거 자료로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를 들어 단군의 건국에 대한 내용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 중 먼저 인용하고 있는 『위서(魏書)』는 현재 어떤 책인지 알 수 없다. 현재 『위서』라는 이름을 가진 역사책에는 다양한 이본(異本)이 있으며, 『위서』라는 책 이름으로 전해지는 것만도 여러 종류이다. 그런데 현재 전해지는 중국의 위(魏)나라 관련 역사책 중에서는 단군 신화의 내용이 전해지는 것이 전혀 없다. 따라서 일연(一然)이 참조한 『위서』가 현재 전해지지 않는 다른 종류의 『위서』라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 『위서』가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일제 강점기 때의 일본인 학자들은 『위서』가 허구의 책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일연이 굳이 허구의 책을 지어낼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런데 『위서』에서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서 조선을 건국하였는데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때’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자료가 수집된 것은 매우 이른 시기인 기원 전후로 볼 수 있으며, 결국 이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위서』는 중국 삼국 시대의 위나라와 관련된 역사책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에는 이미 ‘단군왕검’이라는 건국자,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 ‘아사달’이라는 수도 이름 등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여러 정보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정보는 중국 한나라 때 수집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잘 알다시피 한나라는 동방으로 군대를 보내 위만 조선이라는 고조선 최후의 왕조를 멸망시키고 한 군현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이때 고조선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가 한나라에 전해졌을 것이다. 이 외에도 고구려의 주몽 신화를 살펴볼 때 언급하겠지만, 부여의 동명 신화에 관한 정보가 수집된 것도 바로 한나라 때였다. 이처럼 중국 한나라 때 수집된 고조선의 건국 신화가, 후한이 멸망하고 위⋅촉⋅오 삼국이 서로 대결하던 삼국 시대의 위나라 역사를 정리할 때 함께 편찬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연이 참고했던 『위서』는 13세기 말 일연 당시에는 전해지고 있었지만, 그보다 1세기 뒤인 조선 시대에 들어서 단군 조선과 관련된 여러 기록들이 편찬될 때에는 이미 사라져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조선 시대의 여러 기록들이 『위서』를 직접 인용하기보다는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의 내용을 다시 그대로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위서』에 전해지는 고조선 건국 신화의 내용은 매우 간략하여 단지 ‘단군왕검’이라는 건국자,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 ‘아사달’이라는 수도 이름, 중국 요임금 때라는 건국 시기 등에 불과하지만, 고조선 건국의 핵심적인 내용은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보다 풍부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고기」에도 ‘단군왕검’, ‘조선’, ‘아사달’ 등이 모두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위서』 자체에서 고조선 관련 기록이 매우 소략했는지, 아니면 일연이 『위서』를 인용하면서 주요 부분만 발췌하여 인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위서』의 내용이 아래 「고기」의 내용과 동일하지 않다고 한다면, 아마도 일연은 그 차이를 보이는 내용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간략한 기록만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본래 『위서』의 내용이 소략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고기」에 보이는 고조선의 건국 신화
이제 고조선의 건국 신화를 보다 풍부하게 소개하고 있는 「고기(古記)」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실 이 「고기」도 그 실체를 알기는 어렵다. 『삼국유사』에는 '고기'가 여러 번 인용되는데, 이것이 책 이름인지, 아니면 단순히 옛날 기록이라는 보통 명사인지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단군과 관련된 「고기」에 대하여 안홍의 『삼한고기(三韓古記)』로 비정하기도 하고, 넓은 의미의 「단군고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일연이 인용한 「고기」는 당시까지 전해지던 국내의 전승 자료를 가리키는 것만은 분명하다. 즉 「고기」로 인용된 단군 신화의 내용은 국내에 전승되던 자료였다. 한편 뒤에서 살펴볼 『제왕운기』에는 「본기(本紀)」, 「단군본기(檀君本紀)」가 인용되어 있는데, 이들 전거도 일종의 「고기」에 해당한다. 이 「고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앞의 『위서』 인용 기록이 매우 소략함과는 달리 「고기」를 인용한 부분은 단군 출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고조선 수도의 변천, 기자 조선의 등장과 단군의 최후 등 상대적으로 풍부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신화적 내용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단군 신화의 신화적 성격을 살펴보기에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고기」를 인용한 단군 신화의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좀 더 세분하면 더 나눌 수도 있겠으나, 내용을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 여기에서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나) 부분은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 위하여 3천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를 열고, 환웅 천왕이라고 칭하였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내용의 하나는 제석 환인-서자 환웅으로 이어지는 계보이다.
환인이라는 명칭은 원래 산스크리트 어의 ‘Sakrodevannam Indrah'를 한자로 음역한 '석가제환인타라'(釋迦提桓因陀羅; 제석천(帝釋天), 천제(天帝))에서 차용한 말이다. 제석은 수미산 정상의 도리천(忉利天)에 산다는 불교의 천신이다. 따라서 일연도 환인은 제석(帝釋)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를 달았다. 즉 환인이라는 명칭은 불교가 전래한 뒤에 새롭게 수식된 표현이다. 그렇다고 원래 단군 신화에 전혀 없던 내용이 허구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즉 본래는 하늘[天] 또는 태양신에 대한 이름이 있었을 테지만, 단군 신화가 고려 시대에 불교와 결합되면서 불교에서 천제를 표현하는 용어인 ‘환인’으로 뒤바뀐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환인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단군 신화가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환인은 천상적 존재로서 고유의 신앙적 존재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 환인은 아래로 삼위태백을 내려다보았다거나 아들인 환웅을 내려다보았다는 점에서 인격적인 신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환인이 인격 신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 환웅 역시 인격 신의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웅녀와 결합하여 단군이라는 인격적인 존재를 낳게 되었다. 그래서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혈연적인 계보가 성립되는 것이다.
환웅은 환인의 서자(庶子)인데, 여기서 ‘서자’란 맏아들 이외의 아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서자’의 용법은 고려 시대에 흔히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웅이 환인에게서 받았다는 천부인(天符印) 3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부(符)와 인(印)이 관리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이며 특히 부(符)는 제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관리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천부인 3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든지 간에 이는 환웅의 인간 세상에 대한 지배가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 합법적인 것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홍익인간’의 뜻을 세워 지상에 내려오는데, 이 환웅을 매개로 하늘[天]의 세계와 인간 세계가 비로소 연결되기에 이른다. 환웅은 천신의 존재로서 인간 세계를 다스리게 되는데, 그로 인하여 인간 세계의 360여 가지 일이 하늘의 뜻과 연관된 질서를 지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환웅은 인간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 존재가 되고, 그 뒤를 잇는 환웅의 아들인 단군왕검의 통치가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 정당성을 갖추는 위상을 지니게 된다. 즉 환웅은 단군왕검 통치의 정통성을 구현하는 매개적 존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환인-환웅의 계보를 밝히고, 환웅의 활동을 기술하고 있는 (나) 부분을 단군 신화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다)는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기를 원하였으나, 그 중 곰만 웅녀로 환신하였고 그 웅녀와 환웅이 결합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내용이다. 즉 환웅+웅녀-단군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핵심적인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을 역사적으로 해석할 때에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집단을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자처하는 천손족 집단으로 해석하고, 이들 천손족 집단이 곰과 호랑이로 대표되는 또 다른 집단, 즉 토착 세력과 결합하는 과정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한다. 곰과 호랑이는 이들 토착 세력 집단의 신앙 대상, 즉 토템으로 보기도 하지만 지모 신(地母神)의 존재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단군의 탄생은 천손족 세력 집단과 지모 신 세력 집단 사이의 연합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라)는 단군왕검이 중국의 요와 같은 때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으며, 다시 도읍지를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고 1500년을 다스렸다는 내용이다. 평양성의 위치에 대하여 일연은 고려 시대의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으로 비정하고 있다. 평양성이 단군왕검의 도읍지였음은 고려 시대에는 이미 알려진 내용이었다. 즉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 21년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시 고구려 동천왕은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받아 도성인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어 임시로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기게 되었는데, 이 기사에 『삼국사기』 편찬자는 “평양은 본시 선인 왕검의 도읍지이다.”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이미 평양성은 단군왕검의 도읍지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의 도읍이 평양성에서 아사달로 바뀌었다는 내용은 앞서 인용한 『위서』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용이다. ‘아사달’의 뜻은 우리말로 ‘앗달’, ‘아침의 땅’이라는 뜻으로 ‘조선(朝鮮)’과 서로 뜻이 통한다는 견해가 있다. 일연은 『위서』를 인용한 자료에 아사달의 위치에 대한 주석을 붙였는데, 고려 시대의 백주 혹은 개성 동쪽의 백악궁 터라고 하였다. 백주는 황해도 백천군(白川郡)이니, 고려 시대에는 아사달을 평양성 남쪽의 백천과 개성 인근으로 보는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고려인들의 통일된 인식은 아니었는데, 『제왕운기』에서는 황해도 구월산으로 보기도 했다. 이와 같이 평양성과 아사달의 위치에 대한 고려인의 인식은 서경(평양)과 개경(개성)을 중심지로 운영했던 고려 시대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단군이 1500년 동안을 다스렸다는 내용은 실제 단군의 재위 기간으로 보기는 어렵다. 단군이 장기간 재위하였다고 내세운 당시 사람들의 관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조선 초기의 학자인 권근(權近)은 단군의 자손들이 왕위를 이어간 기간을 뜻한다고 보았다. 최근에는 고조선의 역대 군장들을 신성한 시조 신의 육화(肉化)로 여겼던 관념의 반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군장의 즉위는 시조 신의 혼령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고, 군장의 교체가 되풀이되더라도 통치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시조 신이기 때문에, 시조 왕의 재위 기간이 인간의 수명을 넘어 오래 지속된 것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단군왕검은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고조선의 군장을 뜻하는 일반 명사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군’의 어원에 대해서는 샤먼을 뜻하는 ‘당골’이나 하늘을 뜻하는 몽골 어의 ‘탱기르’와 연관 지어 설명하는 견해가 있다. 사실 초기 국가의 군장은 정치 권력자인 동시에 하늘과 인간 세계를 매개하는 샤먼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단군왕검의 신이한 재위 기간이나 수명은 곧 고조선의 군장이 샤먼적인 존재임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즉 1500년의 재위 기간은 곧 고조선의 군장들이 다스린 기간을 모두 합한 기간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마)는 기자가 조선에 봉해지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간략한 문장이지만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는 단군 조선 이후 기자 조선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으며, 둘째는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마)는 단군왕검의 최후 내지는 단군 조선의 종말을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단군왕검의 장기간의 재위 기간이나 수명이 단군 조선의 역대 군장들의 재위 기간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부분은 고조선 건국 신화로서의 성격과는 거리가 있다. 즉 내용상 단군 조선의 멸망 이후에나 기록했음 직한 내용이기 때문에 (마) 부분은 앞의 (나), (다), (라)와는 내용상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단군 조선 이후의 기자 조선의 존재를 언급한 부분은 사실상 단군 조선의 건국 신화와는 무관하다. 적어도 기자 조선의 존재를 기술한 부분은 기자 조선에 대한 인식이 나타난 뒤에야 성립할 수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마) 부분은 단군 조선이 멸망한 이후의 어느 시기에 다시 정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