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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제목 황성신문
한자명 皇城新聞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대한제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898년 서울에서 창간된 일간 신문.

[내용]

〈황성신문〉의 전신은 1898년 3월 2일에 창간된 〈경성신문(京城新聞)〉이다. 〈경성신문〉은 우리나라 최초로 합자 회사의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주 2회 순 국문판으로 발행되었다. 〈경성신문〉은 같은 해 4월 6일 이후 〈대한황성신문(大韓皇城新聞)〉으로 제호가 바뀌었다가, 9월 5일 독립 협회 내의 개신 유학자들이 이를 인수하여 국한문 혼용의 일간지 〈황성신문(皇城新聞)〉으로 재창간하였다.

사옥은 처음에는 관청 건물을 빌려서 사용했고, 이후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의 후원으로 독립된 사옥을 가질 수 있었다. 발행 부수는 최고 13,000부로 당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신문이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는 신문 대금의 체납이 지속되어 두 번씩이나 정간하는 등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창간 당시 사장은 남궁억(南宮檍), 총무원은 나수연(羅壽淵)이었고, 유근(柳瑾), 박은식(朴殷植), 장지연(張志淵) 등이 주필로 활약하였다. 〈황성신문〉의 논조는 주로 민족의식의 고취와 문명개화의 추진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충군애국(忠君愛國)을 근본으로 한 개명 진보를 주장하였고, 경제적으로는 무역을 포함한 상업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인습의 타파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애국심을 고취시켜서, 이를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에는 반일적인 논조로 인해 사장인 장지연을 비롯한 10여 명의 직원이 체포되고, 정간을 당하였다. 강제 병합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는 통감부의 강요로 신문 이름을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바꾸어 발행되었으나, 9월 14일에 결국 폐간되었다.

▶ 관련자료

ㆍ대한황성신문(大韓皇城新聞)
ㆍ황성신문(皇城新聞)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