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여달 조합 감독답에 일본의 개량 벼 품종인 조신력(早神力)를 심게 하고, 수확량이 증가했다며 식민 농정의 성공 사례로 각지에 선전하였다. 또한 이때 여달 조합을 농법 개량뿐 아니라 생활 개선의 성공 사례로서도 부각시켰다. 즉 조합원 중 일부는 농한기에 만든 부업품을 내다 팔아 얻은 수입을 우편국에 예입하고, 관혼상제 등 피치 못할 상황에 대비했기 때문에 빚을 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소작 공제 조합(1913), 조신력 기념 저금(1913), 풍년 저곡(1917) 등이 설치되었다가 모두 여달 조합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조합원을 위로하기 위하여 봉배회(捧杯會), 이순회(耳順會), 풍년제(豊年祭) 등의 각종 행사를 열었다. 이처럼 일제가 선전한 여달 조합의 생활은 평화롭게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일제가 일본 품종과 농법을 문명과 생활 개선이라는 이름 아래 한국인들에게 강제했던 실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