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조선 총독부에 고적 조사 위원회가 발족된 이래, 낙랑 유적의 조사에는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가 전방위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는 조선사 편찬 위원회(후의 조선사 편수회)를 주도했던 인물로, 한국 고대 문화의 저급성과 타율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힘썼기 때문에 긴축 재정 속에서도 낙랑 유적 발굴은 계속될 수 있었다.
특히 1923, 4년에는 이전의 발굴 성과가 알려지면서 평양 일대의 고분들이 대거 도굴당했다. 이에 평양에서는 도굴되지 않은 고분의 발굴을 서둘러 1924년에 석암리에서 4기의 대형 목곽묘를 발굴하였다. 이때 다수의 기년명 칠기가 출토되면서, 이후 낙랑 문화와 한 문화(漢文化)를 동일시하는 주장이 쏟아져 나왔다. 이 성과에 고무된 구로이타는 1925년, 긴축 재정 속에서도 석암리 205호(王盱墓)의 발굴 허가를 얻어 냈다. 그가 재직하고 있던 동경 제대 문학부가 비용을 포함하여 발굴 전반을 주관했는데, 보고서를 작성한다는 명목 아래 조선 총독부와의 약속을 어기고 출토 유물까지 모두 동경 제대로 가져가 버렸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평양 지역의 발굴은, 식민 사관에 따라 고조선이나 고구려보다 낙랑 유적에 집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출토품마저 무단 반출되는 수난의 역사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