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에서 서양인은 일제 식민 통치의 협력자이자 경쟁자였다. 서구 열강과 우호 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일본은 조선에서의 서양인, 특히 선교사들의 활동을 용인해야 했는데, 그 활동이 일본의 의도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대개 교회(성당)에 부설된 병원과 학교의 의술과 교육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그것보다 한 차원 '높은' 문명으로 인식되었다. 이 때문에 일제는 서양인 선교사들과의 친목을 도모하면서도 그 활동을 늘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에 원산 교구를 설정한 베네딕트회 역시 그러한 서양인 종교 단체 중 하나였다. 베네딕트회는 독일계 선교회로서 1909년부터 한국에서 포교를 시작했는데, 당초 서울에 있던 교구를 원산으로 이전하였다. 1921년에는 만주 일대가 관할 구역으로 편입되면서, 베네딕트회 원산 교구는 함경남·북도와 만주 지역에 걸쳐 선교와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수도원과 신학교는 재정 여건과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 덕원에 건축(1927)하였고, 원산의 본당 주변에서는 수녀원, 해성 보통 학교, 해성 유치원, 호수 천사 빈민 학교, 농아 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또한 간도의 삼원봉, 용정, 팔도구 등지에서도 성당과 학교를 운영하였다. 1927년 현재 베네딕트회 원산 교구는 신자 총수 14,005명, 주교 1명, 신부 27명, 수사 25명, 수녀 25명 등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으며, 한국인 성직자들도 다수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1920년대에 베네딕트회 원산 교구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이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 대리 등이 수도원을 방문하고, 베네딕트회도 방문 사진첩을 만들어 증정할 만큼, 조선 총독부 관료와 서양인 선교사 간의 돈독한 교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