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책 이야기
경국대전(經國大典)

#1

충청도 관찰사가 성종에게 올린 보고서

"올해에는 가뭄으로 인하여

이삭이 패지 못하였으므로,

청컨대 세금을 면해주소서"

호조

"나중에 재해의 정도에 따라

결정할 수도 있으니 가볍게

면세할 수는 없습니다."

좌의정

"호조의 말과 같이 재해의

상태에 따라 면세하는 것이

의 법에 합당합니다."

승정원

"재해를 맞아 세금을 면제하는 법이

에 이미 나와 있으니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2

왕도 신하도 모두

에 따라 다스리는 나라

그 법의 근간

#3

경국대전

#4

조선의 건국

유학에 기반한 국가체제 수립

왕도 정치 실현

이를 위해 필요한

#5

조선 초기

형법은 명나라 법전

대명률에 의거

하지만 조선은

조선 실정에 맞는

고려 이래의 관습법과

국왕의 명령이 적힌

문서들을 모아 법전 편찬의

기본원칙을 제시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교서와 조례를

모아 만든

경제육전

#6

"자손만대에 적용할 수 있는

법전을 편찬하라"

#7

경국대전 편찬 시작

100여 년에 걸쳐

여러 차례 수정과 교정

성종에 이르러

경국대전 완성

#8

경국대전 구성

319개의 법조문

이전·호전·예전·형전·병전·공전의 6전 체제

#9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임면과 품계

등에 관한 규정

#10

세금 제도·관리의 녹봉·

화폐제도·토지·가옥·

노비 매매 등에 관한 규정

#11

교육제도·과거제도·

외교·제례·상복·

혼인 등에 관한 규정

#12

국방·군사 등에 관한 규정

#13

형벌·재판·

재산상속 등에 관한 규정

#14

도로·교통·건축·

도량형 등에 관한 규정

#15

경국대전 완성 이후에도

계속 보완·수정

그 방식은

"역대 임금이 만든 것은 존중해야하므로 후세 사람이 고칠 수 없다"

#16

원래의 조항[原]은 그대로 두고,

보태고[續],

더하고[增],

고치다[補].

#17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운영의 지침

경국대전

도승지가 옷을 도둑맞다

1456년(세조 2) 어느 가을날에 도승지 박원형(朴元亨)의 집에 도둑이 들어 옷을 훔쳐갔다. 세조는 그 말을 전해 듣고는 도성 사대문을 지키고 수색하게 하는 동시에, 박원형에게는 위로하는 차원에서 옷 3벌을 내려주었다. 이후 관련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도둑은 잡히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누가 현재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되는 도승지의 옷을 훔쳐갔을까?

전근대 사회에서 도둑은 단순히 개인의 부도덕한 탐욕이나 행위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만은 없다. 가뭄, 홍수 등 빈번한 자연재해와 수령의 수탈을 비롯한 국가 정책의 폐단이 끼치는 영향이 컸다. 조세를 내고 나면 내년 농사의 종자곡을 마련하기에도 빠듯했다. 따라서 먹고 살기 어려웠던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도적질을 택하기도 했다. 아마 도승지의 옷도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자가 훔쳐 갔을 것이라 추측된다.

한편, 국가의 입장에서는 예방이 필요했다. 자칫하면 가벼운 도둑질을 하던 백성들은 무리를 지어 국가에 대한 저항의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선은 국가의 안위를 위해 도둑을 단속해야만 했지만, 여러 모로 쉽지는 않았다. 당시 포도청(捕盜廳)은 미처 설치되지 않았던 때였고, 도성 내의 치안을 담당했던 경수소(警守所)도 그 기능이 체계적이지 못했다. 더욱이 도둑을 다스릴 수 있는 관련 법제도 완전하게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관련 기구의 정비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국법을 통해 도둑을 다스리는 방법이 조속하게 마련될 필요가 있었다. 다음은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 아래의 【포도(捕盜)】 조항이다.

“【포도(捕盜)】 절도(竊盜) 및 소와 말을 도살한 자 1인을 붙잡으면 면포(綿布) 10필을 주고, 매 1인마다 2필을 더 주어 50필에서 그친다. 강도(强盜)는 1인에 50필을 주고 매 1인마다 5필을 더해 100필에서 그친다. 앞장 서서 강도를 잡은 자는 관직을 상으로 주며, 원래 관직을 가진 자는 품계를 올려준다. …(하략)…” (『경국대전』, 형전)

이는 도둑을 잡기 위해 백성들에게 고발하게 하는 방법을 법으로써 규정한 것이다. 조선 초기 한양의 경우, 도성 내의 백성들은 주로 5가작통제(五家作統制)를 통해 통제되고 있었고, 각종 범죄에 대해서는 형조, 한성부, 의금부 등에서 일괄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즉, 도둑 잡는 기관이 여러 개였고, 각 기관에서 내세우는 처벌 기준도 다 달랐던 것이다. 이처럼 형사 처리 관서가 일원화 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조선왕조는 5가작통제의 구조 하에 있었던 도성민들에게 서로의 범죄행위를 고발하게 하고, 고발한 백성에 대해서는 면포나 관직 등을 상으로 주도록 하게 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세부 내용은 세종대부터 논의가 되기 시작했고, 세조대에 이르러 『경국대전』 형전에 위와 같은 내용으로 실려 있다.

형사법은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을 수용하다

원래 조선의 형사 법류는 기본적으로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 형률(刑律)에 의거하였다. 중국의 형률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일차적인 이유는 당시 우리나라에 통일된 형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건국 직전만 하더라도 형벌 부과 방식이 일원적이지 못했다. 형정(刑政)을 담당하는 형조(刑曹), 군사기구인 순군부(巡軍府), 일종의 구치소인 가구소(街衢所) 등에서 각 관서의 기준에 따라 형벌을 내렸던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형(刑)을 판결하는 관원은 모든 범죄를 『대명률』에 의거하도록 선포하였다. 1395년(태조 4)에는 『대명률』이 어려워서 이해를 돕기 위해 이두로 번역하여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양국의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명나라의 법률을 조선에서 동일하게 적용할 수는 없었다. 일부 법 조항은 『당률소의(唐律疏議)』, 『지정조격(至正條格)』 등의 중국 법률을 참고하기도 했고, 일부는 조선의 실정에 맞게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했다. 위의 【포도】 조항도 『대명률』의 내용과는 다르다. 『대명률』 형률에 있는 【포망도적포한조(捕亡盜賊捕限條)】에는 주로 도적을 체포할 의무가 있는 군병(軍兵)이 도적을 잡지 못한 데 따르는 처벌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는 치안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관부가 부실했던 탓에 백성의 고발에 의존하는 법률 조항이 포함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대명률』에 대한 의존도가 크기는 했지만, 조선은 나름대로 자국의 실정에 맞는 체계적인 법을 만들려는 노력은 꾸준히 이어나갔다. 건국 초기에는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지만, 점차 『대명률』을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조선의 현실에 적합한 규정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법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경국대전』 이전의 법의 형태는 어떠했을까? 우리나라 역사상 법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지만,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삼국시대에 들어선 이후 율령(律令)이 반포되었다는 사실에 그 기원을 둔다. 가장 먼저 고구려가 372년(소수림왕 2)에 불교를 도입하고 태학(太學)을 설치하였고, 그 이듬해인 373년(소수림왕 3)에 율령을 반포하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했다. 그리고 백제는 3∼4세기 무렵에 율령이 반포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는 다소 늦은 520년(법흥왕 7)에 율령 반포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율령이 반포되었다는 것은 기존의 제각각이었던 관습법이 아닌 일원적인 성문법에 의해 국가를 운영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율령이 반포된 국가는 관직제도, 조세제도, 교육제도 등의 체제를 수립하여 국가를 운영하면서 나름의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율령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기록이 매우 소략하여 그 구체적인 내용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법제에 대한 기록이 다양해진다. 『고려사(高麗史)』 권84, 「형법지(刑法志)」 서문에는 ‘고려의 제도는 대체적으로 모두 당나라를 모방하였는데, 형법에 있어서도 역시 당률(唐律)을 채택하고, 그때그때의 사정을 참작하여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고려시대 형률은 주로 중국의 당나라의 법률을 기본적으로 채택하였고, 때에 따라서는 우리의 실정에 맞는 율문도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 적용 방식은 형법 뿐 아니라 여타의 법제에 있어서도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 원 간섭기에 이르면 원의 법 체제를 도입하여 고려의 통치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편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일부 관제 개정 외에는 법률상의 변화가 크게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통합적인 형태의 법전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던 듯하다. 1392년(공양왕 4)에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원나라의 『지정조격』과 명나라의 『대명률』을 참고하여 새로운 법률을 만들었다고 전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 건국과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고려 말 이래로 정치∙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개혁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현실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신흥 유신이 출현하였으며, 그들은 고려 말의 혼란을 해결하면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1391년(공양왕 3)에 조준(趙浚, 1346∼1405),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을 비롯한 사대부는 과전법(科田法)의 제정을 통해 토지 개혁을 일단락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과정에서 정치적 지향의 차이가 분명해졌고, 사대부들은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통해 개혁의 완수를 기대하였다. 1392년(공양왕 4) 마지막까지 고려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는 살해되었고, 몇 달 뒤에 고려는 멸망하였다.

조선은 건국 이래 유교적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법전 체계를 수립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행하였다. 우선, 1394년(태조 3)에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에게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올렸다. 여기서 정도전은 인정(仁政)과 덕치(德治)의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그것의 한계를 보조하는 수단으로서 법제와 형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법제가 확립되었을 때라야 백성이 생활이 안정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확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다. 그러므로 국가를 가진 자는 반드시 먼저 백성의 생활을 보호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

(『삼봉집』권8, 「조선경국전』하, 憲典, 戶役)

“백성이 서로 모이면 음식⋅의복에 대한 욕심으로 밖에서 공격하게 되고 남녀에 대한 욕심으로 안에서 공격하게 되니, 견줄 만하면 다투고 힘이 대적할 만하면 싸워서 서로 해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윗사람이 된 자가 법을 가지고 이를 다스려 평화롭게 한 후에야 백성의 생활이 안정된다.”

(『삼봉집』권7, 「조선경국전」상, 賦典, 賦稅)

『조선경국전』의 구성은 『주례(周禮)』의 체제를 활용하여 치전(治典), 부전(賦典), 예전(禮典), 정전(政典), 헌전(憲典), 공전(工典) 등의 6전 체제로 나누고, 세부적으로는 그 맡은 직무를 설명하였다. 『조선경국전』은 개인의 구상을 바탕으로 하여 저술된 것으로서 국가 운영의 기본 법전으로 활용되지는 않았지만, 『경제육전(經濟六典)』 편찬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이 향후 갖추어 나갈 국가 운영 체제의 골격을 제시하였다.

조선 초기, 국왕의 수교(受敎)를 모아 법전으로 만들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사대부들의 정치적 구상은 1397년(태조 6)에 편찬된 『경제육전』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여기에는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 이후부터 약 1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내려진 수교(受敎)와 조례(條例) 등이 실렸다. 즉, 여러 관사에서 국왕으로부터 수시로 받아낸 명령서에 해당하는 수교, 법률보다 약한 효력을 지닌 조례 등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체계적인 법전으로 보기는 어렵다. 시간이 흘러 정치체제가 정비하면서 새로운 수교와 조례는 계속 늘어났고, 그로 인한 수정·증보 작업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원래의 법전에 늘어나는 수교와 조례 등을 보완하여 속전(續典)으로 편찬하는 작업은 태종~세종대에 계속 행해졌다. 우선 태종대에는 1407년(태종 7)~1412년(태종 12)에 하륜(河崙, 1347∼1416)의 주도로 속전 편찬이 이루어졌다. 방언과 이두를 섞어서 쓴 『경제육전』을 한문으로 바꾼 『경제육전원집상절(經濟六典原集詳節)』과 1398년(태조 7)부터 1407년(태종 7)까지 10년 동안의 수교, 조례 등을 모은 『경제육전속집상절(經濟六典續集詳節)』이 편찬되었다. 그리고 세종대에도 1422년(세종 4) 이후 법전 수정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1426년(세종 8)에는 수교(受敎) 내에서 삭제된 것, 고친 것, 증보(增補)된 것 등을 별도로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1429년(세종 11)에 편찬된 『속육전(續六典)』은 1408년(태종 8) 이후의 수교가 정리되었다.

이러한 법전 편찬 방식은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법전은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의 6전 체제 하에 여러 세부 항목이 들어가 있는 형식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수교문이 누적되면서 법 조항은 자잘한 내용들이 뒤섞이게 되었다. 즉, 조선 초기 법의 형태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국왕의 수교들이 뒤섞여 있는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종대부터 이러한 임시 수교 모음 법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영원히 전해져서 사라지지 않을 법전’,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할 법’이라 하면서 영구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전 편찬이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각종 제도의 정비가 일단락되면서 세조대 이후에는 오래도록 적용할 수 있는 법전으로서 『경국대전』 편찬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오래도록 행할 법전을 만들고자 했다

법전 편찬에 대한 세조와 편찬 담당자들의 각오는 남달랐다. 특히, 세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왕위에 올랐던 터라 왕권 강화를 위해 『경국대전』 편찬에 힘을 기울인 측면도 없지 않지만, 그 이전의 법전과는 다르게 오래도록 행할 수 있는 법전을 만들어 국가 수성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리하여 세조는 육전상정관(六典詳定官)들이 편찬한 법전을 직접 검토하며 첨삭을 가하였고, 3년상을 치러야 했던 대신들을 불러들이면서 편찬 작업에 참여시켰다. 당시 양성지(梁誠之, 1415∼1482) 역시 법제를 정비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태조 때와 세종 때 『원전(原典)』과 『속전(續典)』이 있었고, 또 『등록(謄錄)』이 있었는데, 모두 좋은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토지제도나 의례가 아직 일정한 법제를 갖추지 못했고, 군사제도와 공법(貢法) 역시 임시방편으로 만든 법이 많았습니다. 어찌 지금의 성대한 시절을 맞이하여 법전을 잘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대신들이 다시 면밀히 검토하여 한 세대의 법제를 정할 수 있게 하시고, 이것을 자손만대의 법칙으로 삼게 해주신다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세조실록』권1, 세조 원년(1455) 7월 무인)

자손만대에 쓸 수 있는 법전의 완성을 위해 당대 최고의 학자와 대신들이 참여하여 면밀한 편찬 작업을 수행했지만, 세조 재위 14년간에는 결국 마무리하지 못했다. 훗날 예종은 아버지 세조가 재위기간 동안 가장 많은 관심과 노력을 쏟은 것으로 법전 편찬을 꼽을 정도였다. 우선, 1460년(세조 6)∼1461년(세조 7)에 호전, 형전이 완성되었고 1466년(세조 12)에는 이전, 예전, 병전, 공전까지 끝냈지만, 이것은 초안을 잡은 단계에 해당하였다. 이후 세조는 대신들과 더불어 토론을 거듭하면서 세부 조목을 수정하는 데 열성을 다했다. 백성의 삶과 관련이 깊은 호전, 형전만이라도 먼저 시행하려고 했지만, 1468년(세조 14) 세조의 죽음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였다. 예종 즉위 후 『경국대전』 편찬 작업은 완료되었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서문(序文), 최항(崔恒, 1409∼1474)이 전문(箋文)을 작성하였다.

『경국대전』은 1470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시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3개월 만에 사망하였고, 법전의 시행도 성종대로 넘겨졌다. 성종은 즉위 이후 이전에 만들어졌던 『경국대전』을 여러 차례 검토하고 교정하였고, 1474년(성종 5)에 드디어 『경국대전』을 반포 간행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경국대전』에 수록되지 못한 72개의 조목을 『속록(續錄)』으로 간행했는데, 이는 차후 법 조항을 개정하거나 추가로 넣을 일이 발생하면 『경국대전』 원문을 건드리지 않고, 『속록』에 삽입할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성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감교청(勘校廳)을 설치하여 『경국대전』의 교정 작업을 이어갔고, 이는 1484년(성종 15)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경국대전』의 최종본이다.

『경국대전』의 체제

1485년(성종 16) 1월 1일부터 『경국대전』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경국대전』의 구성 역시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6전 체제를 이어갔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유교적 국가를 구상하였고, 그런 만큼 『주례(周禮)』의 6관(六官) 제도를 조선의 정치체제에서 재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6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전 :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품계와 소속, 관리의 임면, 의정부와 육조 등의 관서 및 관직 체계 등

호전 : 국가 재정, 호적∙조세∙녹봉∙화폐제도, 환곡∙조운∙어염(魚鹽) 등의 규정 및 토지∙가옥∙노비∙우마(牛馬)의 매매, 이자율에 관한 규정 등

예전 : 교육제도, 문과∙무과∙잡과 등의 과거, 상복∙봉사(奉祀)∙입후(立後)∙혼인 등의 규정, 국가의례와 관련된 의식, 여러 가지 공문서 서식, 외교관계 등

병전 : 군사와 관련된 군제, 군역의 의무, 국방 관계 교통과 통신, 궁궐의 수비 등

형전 : 형벌, 재판, 공∙사노비 관련 규정, 재산 상속 등

공전 : 도로, 다리, 배, 수레 관련 규정 등

법전을 6전으로 나누어 정리하는 체제는 『주례』에서 기원하는데,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의 6개로 나뉘는 관직체계를 기반으로 하였다. 세부 내용을 보면 관직제도를 비롯하여 국가재정, 교육, 의례, 외교, 군제, 형벌, 소송, 공역(工役) 관련 규정 등 매우 다양한 내용들이 6전의 각 조목으로 배정되었고, 이는 육조 및 해당 속아문의 행정 처리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경국대전』, 영세불변의 법이 되다

조선 건국 이후 약 100년 동안의 노력은 『경국대전』 편찬으로 이어졌고, 편찬자들은 『경국대전』이 영세불변의 법으로서 기능하여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백성을 다스려질 수 있기를 기대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법전은 계속적으로 나타났지만, 『경국대전』의 기본 체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746년(영조 22)에 『속대전(續大典)』, 1785년(정조 9)에 『대전통편(大典通編)』, 1865년(고종 2)에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이 편찬되었지만, 기본적으로 『경국대전』의 조항이 모두 수록된 바탕 하에 그 수정된 내용을 추가하는 형식을 띠었다. 혹여 폐지되었더라도 ‘금폐(今廢)’라고 표기하고 그 조문을 남겼고, 개정된 경우도 그대로 조문을 둔 채 개정 이유와 개정된 조문을 같이 기록하였다.

앞서 보았던 『경국대전』 형전 【포도】 조항이 고종대의 『대전회통』에 어떻게 실려 있는지 보자. 『대전회통』권5, 형전 【포도】 조항의 맨 앞에는 『경국대전』에 실렸던 내용이 그대로 기재되어 있다. 다만 앞부분에 ‘원(原)’이라고 표기되어, 그 내용이 『경국대전』 내용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어 ‘속(續)’이라는 표기는 영조대 편찬된 『속대전』의 내용임을 밝히고 있다. 중종대 설치된 포도청의 기능을 반영한 법조문이 꽤 길게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포도청 소속 포도장(捕盜將)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주목된다. 범죄의 증거를 잘 조사하여 근거가 명백한 자를 체포해야 한다는 등의 요건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어 보이는 ‘증(增)’이라는 표기 뒤에는 『대전통편』에 처음 나타나거나 『경국대전』, 『속대전』의 내용이 바뀐 내용이 담겨져 있다. 포도청 죄수의 이름과 조사 기록을 별도의 문서로 작성해 두라는 등의 내용이 새로 첨가되었다. 그리고 『대전회통』에 와서 처음 나타나거나 기존의 법전 내용이 바뀐 것은 ‘보(補)’라는 표기 뒤에 기록했는데, 【포도】 조항과 관련해서는 새로운 내용이 없다. 이러한 형식 때문에 『대전회통』을 보면 특정 제도가 조선시대 내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데, 그 근간이 되는 것은 역시 『경국대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국대전』의 역사적 의의

『경국대전』은 조선 건국 이후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변화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즉,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의 구상, 『경제육전』의 이념, 세조의 정치적 목적 등은 서로 성격을 달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국가 건설 과정에서 응축되어 『경국대전』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일원적이고 통일적인 법전의 정비는 시대적인 과제였고, 조선의 새로운 제도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기반으로 하여 정착되어 갔다. 그리하여 『경국대전』 반포 이후 조선의 국가 체제는 이 법전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중앙정치제도를 비롯한 국가 운영의 중요한 지침이 되었고, 각종 행정 처리의 지침을 제공하였다.

참고문헌

한우근∙이성무∙민현구∙이태진∙권오영, 1985, 1986, 『譯註 經國大典』(번역편·역주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호훈, 2004, 「조선전기 法典의 정비와 『經國大典』의 성립」 『조선 건국과 경국대전체제의 형성』, 혜안

심재우, 2007, 「조선시대 형률의 운용과 『대명률』」 『역사와 현실』65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