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책 이야기
북학의(北學議)

#1

1778년 청나라 북경

조선 청년의 눈에 비친

청나라

풍요선진 문화의 나라

"언제나 풍악소리 쉴 새가 없고

어디서고 연극 구경 그치질 않네

밤 시장 원소절 축제로 계속 이어져

붉은 등불 온 거리에 잇달았구나."

#2

박제가가 바라본 청나라

박제가의 가슴속 조선

박제가가 바라본 조선

박제가의 가슴속 청나라

그의 문제의식을 담은

북학의

박제가

#3

북학의

#4

1636년

병자호란

#5

삼전도의 항복

#6

문화적 자존심의 상처

#7

100여 년 후

조선에게

#8

청나라는 여전히 오랑캐

" 지금 중국을 지배하는 자들은 오랑캐다."

" 그 학문을 배우기가 부끄럽다."

" 중국의 산천은 더럽고 "

" 그 언어는 오랑캐의 언어다."

#9

그러나

청나라

#10

#11

그리고

빈번해진 북경으로의 사신 행차, 연행

조선 지식인들에게

앞선 청나라의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

#12

열하일기

이를 통해서

청을 새롭게 보기

#13

청의 문물을 경험한

일부 지식인들의 담론

#14

서자라는 신분의 굴레에 매어있던

#15

그는 '청'을 새롭게

바라보는 학자들과

더불어 을 꿈꾸다

#16

드디어

1778년 사은사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의 문물을 처음으로 경험

#17

그가 연행에서 본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

여기에 비춰본

조선의 현실은

#18

온 나라에 물품을 유통하는 교통수단

"조선의 백성들이 물자를

풍족하게 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수레가

없는 까닭이다."

#19

천년을 내다보는 벽돌 건물

건물

"중국백성들은 수재나

화재 및 도둑, 썩는 것,

붕괴되는 것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다."

#20

정밀한 기술의 구현

무지개 형태의 다리

"지금 성 안에 있는

돌다리는 모두 평평해서

큰비가 오면

항상 물이 넘친다."

#21

유통의 활성화

"지금 종각 십자거리(운종가)에는

가게가 줄지어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채 1리(里)가 되지 않는다."

#22

박제가의 개혁적 제안

#23

소비는 생산

"비단을 입지 않기 때문에

비단을 짜는 사람이 없다."

"재물은 우물 같아서

퍼낼수록 생긴다."

#24

경제 활동의 중심, 시장

"지역 간의 생산물 교환이 활발히 이루어지면

생활용품들이 풍족해질 수 있다."

#25

가난 극복의 길, 통상

"가난을 무엇으로

구제할 것인가 하면

중국과 바다로

통상하는 길뿐이다"

#26

국력 신장, 교역 확대

"국력이 점점 강해지고

사람들의 생업이 안정되면

점차 중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도 교역해야 한다."

#27

청을 오랑캐로 여기는

사회 인식에 대하여

‘청’을 적극 배우자는

과감한 주장

#28

북학의

박제가의

열망을 담다.

「북학의」, 중국을 배우자는 외침

「북학의」는 중국을 배우자는 의미이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 박제가는 왜 이러한 주장을 했으며, 여기서 말하는 중국은 무엇일까? 조선은 중국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제가가 중국의 학문을 ‘서학(西學)’으로 부르지 않고 ‘북학’으로 말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여기에는 매우 오래된 기원이 있다. 『맹자』「등문공(藤文公)」 편에서 맹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진량(陳亮)은 초(楚)나라 출신인데, 주공(周公)과 공자의 도리를 좋아하여 북쪽으로 올라와 중국에서 공부하였다. (지금) 북쪽의 학자 중에 진량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陳良楚産也 悅周公仲尼之道 北學於中國 北方之學者 未能或之先也

여기서 말한 초나라는 당시 중국의 입장에서는 문명이 덜 발달한 야만의 지역이었다. 초나라 출신 진량이 북쪽으로 가서 배웠다는 이야기, 즉 ‘북학’에는 야만인이 중국의 문명을 배우고자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박제가가 조선에서 북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조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당시 중국인 청나라로 가서 발달된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절실한 외침이었다.

「북학의」의 역사적 배경 1 - 병자호란과 북벌론의 등장

조선후기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박제가의 주장은 파격적인 이야기였다. 「북학의」의 서문을 쓴 박지원(朴趾源)마저도 「북학의」를 훌륭한 책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남에게는 결코 말해서는 안 되는 내용이라고 경계할 정도였다. 박제가가 살았던 18세기의 중국의 왕조는 여진족이 만든 청나라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청나라는 중원 대륙의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라 부모의 나라인 명을 멸망시킨 원수와 같은 존재일 따름이었다.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악감정은 1637년에 벌어진 양국 간의 전쟁(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23년 쿠데타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仁祖) 정권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비판하면서 명나라와의 극단적인 우호를 강조하는 한편 청나라에 대해서는 적대적 감정을 공공연하게 내세웠다. 이와 같은 조선의 태도와 또 청 내부의 문제가 결합하면서 두 차례의 조선-청 전쟁이 발생했다(정묘호란, 병자호란). 병자호란 발발 직후 청군의 신속한 진격으로 인해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도 못간 채 남한산성에 고립되었고, 청군의 포위 속에서 수십 일간을 버티다 결국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다. 조선의 국왕이 오랑캐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들의 군주에게 아홉 번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치욕스러운 예를 취했던 것이다. 이후 수십만 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두 명의 왕자(소현세자, 봉림대군)가 청의 수도에 볼모로 끌려갔다.

조선 지식인들은 명나라가 국력을 회복해 여진 오랑캐를 멸망시키고 조선과 다시금 군신의 관계를 맺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꿈이 되어버렸다. 조선의 소망과는 달리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명 황제는 자금성 뒷산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고 이로써 정통 중화국가 명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청은 이 틈을 타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의 반란군을 물리치고 북경에 입성하였다. 원나라 이후 3백 년 만에 비한족의 중원배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즈음 볼모로 청에 끌려갔었던 봉림대군(효종)이 왕위에 즉위하였다. 효종은 중화 문명국 명을 멸망시킨 오랑캐 청에 대해 무력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복수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이를 국시(國是)로 삼아 강병(强兵) 양성 정책을 추진하였다. 효종뿐만 아니라 유교 문명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던 조선 지식인들도 청의 중원 지배를 용납할 수 없었다. ‘오랑캐의 운명은 백 년을 못간다(胡不百年)’라는 고대 경전의 한 구절은 이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였고, 청에 대한 복수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북벌(北伐)’의 시대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북학론의 역사적 배경 2 - 청의 치세(治世)와 북학론의 등장

1662년 명의 계승을 내세우며 청에게 저항했던 남명(南明)의 영력(永曆) 황제가 끝내 청나라 군대에 의해 살해당했다. 미약하지만 중화의 부활을 기대했던 남명 정권들이 모두 사라지자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북벌의 목표는 조선이 청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오랑캐를 중국에서 쫓아낸 후 정통 중화의 계승자에게 황제의 자리를 돌려주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받을 존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1673년 청에서 ‘삼번(三藩)의 난’이 발생하여 잠시나마 중화 회복에 대한 기대를 부풀렸지만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모두 진압되고 청은 도리어 강희제의 치세에 힘입어 중원에서의 지배를 공고하게 다져나갔다.

‘오랑캐는 백 년을 가지 못한다’는 성현의 말은 실현되지 않았다. 조선 지식인들은 엄연히 존재하는 오랑캐의 중국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에 빠졌고 곧 분열하기 시작했다. 가장 보수적인 이들은 여전히 청을 오랑캐로 여기면서 청의 국력이 쇠퇴할 때 다시금 북벌을 추진해야 한다고 믿었다. 더 많은 이들은 명의 멸망을 인정하고 조선이 중화의 문명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언제가 중국의 땅에서 중화문명이 부활한다면 그들과 함께 문명의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수의 몇몇 이들은 청이 중국의 지배자가 된 원인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중화의 문명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만 청이 그것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 발 더 나아가 조선이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청으로부터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문명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학’이 등장한 것이다.

18세기 중반에 촉발된 북학의 열풍은 청을 여전히 오랑캐로 보는 수많은 지식인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야기하는 가운데 점차 영역을 넓혀 갔다. 홍대용(洪大容), 박지원과 같은 당시 명문 가문의 자제들에서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성해응(成海應) 등 뛰어난 학문실력을 갖춘 서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지식인들이 북학을 수용했다. 이들은 해마다 중국으로 가는 연행(燕行)에 참가하여 중국의 문물을 직접 관찰하면서 오랑캐가 차지한 중국을 냉정히 평가하였고, 또 중국 지식인들과 학문적 교류를 행하면서 지속적인 우정을 나누기도 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이와 같은 자신들의 경험을 글과 모임을 통해 공유하였다. 박제가 역시 서얼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박지원 등과의 교유 및 그 자신의 연행경험을 통해 「북학의」를 저술할 수 있는 지적 바탕을 마련 할 수 있었다.

북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청의 조선에 대한 태도도 주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청의 통제에 의한 공식적 교류만 가능했고, 이에 따라 청으로 올 수 있는 관원 및 수행원의 숫자, 심지어 짐의 양까지 엄격히 제한되었다. 그런데 청 조정은 오직 조선의 사신 일행에게만 인원의 제한을 두지 않았다. 때문에 정식 관원의 수행원으로서 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홍대용·박지원·이덕무, 그리고 박제가 등이 바로 이러한 기회를 이용해 연행에 참가하였다. 한편 명나라 때부터 북경에 온 외국 사신들에 대해 공식 행사 이외에는 숙소 밖을 나가지 못하게 하는 문금(門禁) 제도를 실시해 사신들의 활동이 크게 제약되었다. 그런데 청나라는 대규모 반란을 진압한 17세기 말 이후부터 외국 사신들의 북경 유람을 눈감아 주었다. 이를 계기로 연행에 참가한 지식인들은 북경의 문물을 자유롭게 관찰하는 한편 중국 지식인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함으로써 조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해 갔다.

박제가의 생애

「북학의」 탄생의 역사적 요인으로 북벌과 북학이 존재했다면 보다 큰 창작 배경에는 박제가라는 인물의 세상에 대한 열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박제가는 승지(承旨 : 오늘날 청와대 비서)를 역임했던 박평(朴坪)의 서자로 1750년에 태어났다. 서자에게는 과거 시험 응시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조선 사회에서 박제가의 신분은 그를 평생 옭아매었던 굴레가 되었다.

15세 때 이미 글과 시에서 명민한 자질을 보였던 박제가는 20세 전후에 걸쳐 이덕무, 유득공, 윤가기 등 서얼출신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오늘날 인사동 일대의 백탑(白塔 : 원각사 10층석탑)에서 빈번한 문학모임을 가졌다. 1768년 연암 박지원이 이곳으로 이사오면서 박제가의 인생도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명문 가문 출신임에도 박제가와 같은 서얼들을 차별하지 않고 학문적 교분을 나눈 박지원, 그리고 박지원과 연결된 홍대용, 이서구(李書九), 정철조(鄭喆祚) 등 당시 유망한 학자들과의 교유는 박제가가 ‘북학파’의 일원이 되는 핵심적인 계기가 되었다.

뛰어난 재능과 서얼 신분이라는 상반된 조건으로 인해 박제가는 늘 인정에 메말라했다. 조선 사회를 넘어선 중국 지식인들은 박제가에게 자신의 재능을 내보일 수 있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당시 이미 북경 지식인들과 교류를 지속하고 있었던 홍대용은 박제가의 지향점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친우 유득공의 숙부 유금(柳琴)이 중국에 가서 박제가 등이 지은 시집들을 북경에서 소개해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均) 등 중국의 명망 있는 지식인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사건은 연행에 대한 박제가의 열망을 증폭시켰고 이후 네 차례나 연행에 참여하는 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777년 이후부터 박제가의 삶은 몇 가지 전환점을 맞이했다. 1777년 박제가는 증광시(增廣試)에 응시해 3등으로 합격하였는데,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사실상 1등이었지만 답안 형식의 문제로 인해 순위가 밀린 것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학문을 국가에서도 인정했다는 점에 박제가는 크게 고무되었다. 또한 이듬해인 1778년에는 열망해마지 않았던 연행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북경에 다녀왔다. 약 네 달간의 일정 속에서 박제가는 이원정·반정균 등 중국의 저명한 지식인들과 여러 차례 만나 교류를 행했고, 이 당시의 경험은 그가 후술했듯이 북경을 거니는 꿈을 꿀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에 귀국하자마자 중국에서의 견문을 바탕으로 「북학의」 집필에 들어가 같은 해 9월경에 「북학의」 내편을 저술하여 첫 번째 연행에 대한 경험과 본인의 견해를 정리하였다.

1779년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에 임용된 것은 또 다른 전기가 되었다. 정조(正祖)는 새로운 학문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고, 하급직인 검서관에 학문적 능력이 뛰어난 서얼들을 발탁했다. 검서관은 각신(閣臣)을 보좌하는 말단직이었지만 조선 지식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문한(文翰)관련 관직이자 또 정조를 자주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벼슬길이 크게 제한되었던 서얼들에게는 매우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박제가는 그 해 6월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초대 검서관이 되었고,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껏 품고 정무에 매달렸다.

검서관 생활로 시작한 30대 이후 박제가의 삶은 희망, 좌절의 반복이었다. 말단직이지만 문한 관료로서의 자긍심과 국왕과의 빈번한 만남은 박제가에게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1786년 정조가 새로운 정책 제안을 신하들에게 요청했을 때, 박제가는 「북학의」에 기초해 국가 개혁안을 과감하게 올렸지만, 어느 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검서관을 바라보는 일반 관료들의 따가운 시선도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이러한 조선 내에서의 갈등 때문인지 1790년 이후 박제가는 무려 세 차례나 연행에 참여하였고, 중국 최고의 학자부터 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지식인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학문적 그리고 인정에 대한 욕구를 채워나갔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면서 다양한 경향의 지식인들을 품어줄 버팀목 역시 같이 사라졌다. 정국이 경색되는 가운데, 박제가의 사돈인 윤가기(尹可基)가 흉서(凶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고 박제가 역시 이에 휘말려 모진 고문을 받은 후 북쪽 변방의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4년이 지난 1804년(55세)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지만, 육체적 상처와 함께 울분과 상실감으로 인해 이듬해(1805년) 불우한 말년을 마감했다.

박제가 「북학의」를 통해 조선 경제 발전의 대안을 제시하다.

박제가는 1786년 첫 번째 연행 경험을 「북학의」로 서술하였다. 현재 「북학의」는 내편과 외편, 그리고 진소본북학의(進疏本北學議 : 이하 ‘진소본’)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두 일정한 시차를 두고 저술하였다. 박제가의 서술에 따르면 최초의 「북학의」는 연행에서 돌아온 직후인 1786년 9월에 완성되었다. 1781년 박지원의 서문과 1782년 서명응의 서문에서 내·외편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즈음에 한 편으로 이루어졌던 「북학의」를 내·외편으로 분리했던 것 같다. 이후 외편에 정조가 저술한 ‘시학론(詩學論)’과 1786년 정조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쓴 소회(所懷)를 삽입하고, 1798년에 정조에게 올린 진소본을 수록하여 현재 우리가 보는 「북학의」가 완성되었다.

「북학의」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전 분야에 걸쳐 있다. 수레·배·성곽에서 문방구와 골동품까지, 농사기구에서 거름까지 일상의 모든 문물을 관찰·분석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이라는 국가를 유지하는 과거 및 관직제도에 관한 문제, 그리고 조선 후기 지배적 대외 사상이었던 존주론(尊周論)까지 시야에 넣고 있다. 문물에 관한 내용을 같은 성격의 항목으로 묶으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북학의」 내편 및 외편]

유통 : 수레[車], 배[船], 도로(道路), 교량(橋梁)

축산 : 목축[畜牧], 소[牛], 말[馬], 나귀[驢], 안장[鞍], 구유[槽]

거주 : 성(城), 벽돌[甓], 기와[瓦], 자기[瓷], 삿자리[簟], 주택[宮室], 창호[窓戶], 섬돌[階砌]

상업 : 시정(市井), 상인[商賈], 은(銀), 동전[錢], 철(鐵), 재목(材木)

농업 : 수고(水庫), 밭[田], 거름[糞], 뽕과 과일[桑菓]

논설 : 농업과 잠업 총론[農蠶總論], 재부론(財富論), 강남 및 절강의 상선과 통상하는 논의[通江南浙江商舶議]

유통에서 상업·농업 문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관찰·분석한 결과 박제가는 우선 조선이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나라의 가난한 백성은 모두가 아침저녁 먹을거리조차 없으며”, “시골의 농부들은 한 해에 무명옷 한 벌도 얻어 입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또한 생산기술 면에서도 조선은 후진적이어서 “남들이 곡식을 세 줄로 심을 때 우리는 두 줄로 심으며”, “남들이 50~60섬을 거둘 때 우리는 20섬을 거두고”, “남들이 5푼을 파종할 때 우리는 10푼 파종”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조선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박제가의 이러한 경제관은 「북학의」 외편의 ‘재부론’에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 조선은 “외국을 정벌하거나 임금이 지방을 순시하지도 않으며, 아래 백성들은 화려하지 않고 사치를 즐기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갈수록 빈곤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제가에 따르면 가난의 원인을 분석하지도 않고 또 좋은 기술이 있는데도 받아들일 줄 몰라서이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면 중국의 선진 기술과 문물을 수용하고, 이를 위해서 재능 있는 선비들을 해마다 연행사와 함께 중국에 파견하여 필요한 기기를 구매하고 또한 그 사용방법을 익혀 조선에 지속적으로 전파할 것을 제안하였다.

상업유통 문제는 박제가가 가장 많이 고민한 지점이자 조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박제가에 따르면 조선이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상업 유통이 활발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업을 천시하는 당시의 관념을 바꾸어야 했다. 박제가는 당시 조선에서 있지도 않는 물건을 쓰지 않는 것을 ‘검소’로 치장하고 필요한 물건을 쓰는 것을 ‘사치’로 비판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비단옷을 입어야 비단을 생산하고 실을 짜듯이, 다양한 물건을 사용해야 이와 관련된 생산과 기술이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북학의」 내편, 시정[市井]). 이는 절약[節用]을 개인의 가치이자 경제정책의 기본 지침으로 삼았던 조선 후기 경제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주장이었다.

박제가는 상업유통의 증대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중국에서 수레·배·도로·교량과 같은 유통수단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으며, 각각의 문물이 조선의 것과 어떠한 차이를 가지는지를 상세히 서술하였다. 또한 사대부의 상업 활동 참여를 권장하고 현행 화폐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들을 지적하며 개선해야 할 지점들도 언급하였다. 이에 더하여 중국의 강남과 절강에 상선을 보내 동아시아의 각 나라와 교역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는데, 조선 왕조가 만들어진 이래 조선의 무역선이 연해를 벗어나지 않았었던 점을 고려하면 박제가의 주장은 기존의 제한된 무역 영역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청나라를 개혁의 목표로 정하다 –「북학의」의 사상적 획기-

[「북학의」 외편 중 논문 및 상소문]

존주론(尊周論), 북학변(北學辨) 1, 북학변 2, 북학변 3, 병오년에 올린 소회[丙午所懷]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주장하고 있는 다양한 경제 정책들은 분명 시대를 넘어선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점은 「북학의」에서 조선의 가난한 현실을 냉정히 평가하는 지점들이 조선 자체가 아니라 타자, 즉 중국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이다. 박제가의 지향점은 중국에 있었던 것이다. 박제가에 따르면 조선이 낙후된 원인은 문물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수확에 필요한 시기를 놓치고, 잘못된 방법으로 충분한 수확하지 못하고, 상인들 중에 장사는 하지 않고 놀고먹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잃은 것은 “중국을 배우지 않은 결과”이며 이로 인해 조선은 “모든 분야에서 중국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이 정당한 비교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청나라를 중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인식의 전환이 먼저 이루어져야 했다. 이에 박제가는 청을 오랑캐로 여기는 사상의 핵심인 존주론을 비판하는 동시에 북학사상에 대한 변론을 전개함으로써 「북학의」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박제가에게 있어 중국은 오랑캐 여진이 지배하는 청이 아니라 조선이 배워야 할 중화의 문물이 남아 있는 문명의 공간이었다. “중국에서 태어나는 백성들과, 보석과 비단의 생산과, 배와 수레 등의 제작”은 모두 중화의 역사 속에서 내려온 것이지 여진족이 만든 청나라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박제가가 보기에 조선인들은 명나라를 빼앗은 주체가 여진족이라는 것만 알고 빼앗긴 내용이 중국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누군가 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 벌떼 같이 일어나 비웃는 상황이었다. 박제가는 많은 조선 지식인들의 주장대로 청나라에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궁극적으로는 도탄에 빠져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 선진적인 청의 문물을 도입해 부국을 이뤄야한다고 강변하였다.

박제가가 중국을 배움의 대상, 선진의 문명국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청에 대한 복수를 목적으로 한 북벌론이 일부 지식인들의 사이에서 북학으로 바뀌는 사상적 전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지만 북학파 2세대라고 할 수 있는 박제가 단계에서도 조선 사회에서는 청에 대한 반감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를 상당 부분 수용한 국왕 정조조차 공식적으로 이미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였고 청 문물을 수용하자는 의견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박지원이 「북학의」 서문에서 박제가를 칭찬하면서도 책의 내용을 남에게 말하는 것이 좋지 못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당시 우호적이지 못했던 조선 사상계의 현실을 말해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박제가는 북학사상에 기초하여 청이 지배하는 중국을 개혁의 목표이자 모델로 삼아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북학의」의 역사적 의의

「북학의」는 수많은 북학파 지식인들의 연행록 가운데에서도 독특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사건·물건 등에 설명을 중심으로 한 잡지(雜識)류 글쓰기 중에서도 오로지 문물에 대한 서술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선에 필요한 중국 문물들을 개별적으로 정리하는 동시에 논설을 통해 분석함으로써, 중국 문물에 대한 당시 북학파들의 견해를 심화·정리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과격한 어조와 박제가의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인쇄본으로 간행되지는 않았지만, 서명응과 박지원이 「북학의」의 서문을 써서 박제가의 식견과 저서의 내용을 칭찬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북학파 내부에서는 높게 평가받았다.

「북학의」의 또 다른 의의는 과감성이다. 홍대용 및 박지원의 경우 ‘의산문답’, ‘허생전’ 등과 같이 우화의 형식을 빌어 자신들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에 비해, 박제가는 새로운 정책을 널리 구하는 정조의 요청에 두 차례에 걸쳐 「북학의」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견해를 과감하게 제시했다. 이는 공식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고 청 문물의 수용을 주장한 것이기에 보수적 지식인들의 공격에 노출되었고, 박제가는 “중국에 미친 사람”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구습을 극복하고자하는 노력, 사회개혁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지 못했던 시대적 한계를 오늘날 우리는 박제가의 「북학의」를 통해 압축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