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문화·예술 이야기
백자

- ‘백자철화운룡문호’ 18억에 낙찰

- 조선시대 ‘백자청화육각향로’ 13억5천만원 낙찰

- 12억‧‧‧ 美 크리스티 경매 조선백자 사살 최고가 팔려

- 숙종 때 쓰던 청화백자, 美 크리스티경매 36억 낙찰

- 200년전 조선 청화백자 美경매 사아 최고가 57억원에 낙찰

국내 고미술품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판매된 조선백자!

해외에서도 조선백자의 가치는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조선백자만의 매력과 가치를 만나봅니다.

“조선은 왜 백자를 사랑했을까?”

예조에 교를 내리기를,“문소전(文昭殿)과 휘덕전(輝德殿)에 쓰는 은그릇들을

이제부터 백자기로써 대신하라.”하였다.

- 『世宗實錄』 116卷, 29年(1447) 6月 3日 甲子條

조선 전기, 세종은 태조와 태종의 위패를 모신 문소전 등에서 사용하던 그릇을

값비싼 은그릇에서 백자로 바꾸라고 지시했는데요,

왕실의 그릇을 바꾼다는 것은 중요한 사회적 변화였습니다.

박정민 교수 /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조선은 성리학의 국가였습니다. 다분히 실용적이라고 할 수 있죠.

고려시대의 화려한 물질문화는 조선에 와서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문화로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조선 왕실은 경기도 광주에 자신들이 직접 사용할 여러 가지 그릇들을

‘관요’라고 하는 왕실의 가마를 만들고 그곳에서 직접 제작하게 됩니다.

그 이후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왕실 그릇으로서 백자는 자리매김하고

또 왕실의 문화, 조선의 문화를 담는 그릇으로서 성장하게 됩니다.

백자는 조선 왕실의 다양한 의례에 사용되었는데요,

같은 색과 크기의 백자를 사용함으로써

의례마다 격을 갖추어 일관되게 진행할 수 있게 됐습니다.

동시에 금과 은그릇을 백자로 바꿔 사치스러운 풍조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정치적인 역할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수많은 지역 중에서 경기도 광주가 ‘관요’로 정해진 걸까요?

중국에서 수입하던 백자를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직접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청자가 중심이었고 또 중국의 백자만큼 단단하고 질 좋은 백자를

제작할 백토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야 백자 제작기술이 발전하면서 다른 종류의 도자기보다

더 단단하고 우수한 품질의 백자를 만들게 되었는데요,

조선 초기에는 전국 139개 자기소에서 주로 분청자를 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최상품을 제작하는 자기소는 전국에서 단 4개 밖에 없었는데요,

이 중에서 광주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 가장 가까웠고

이미 조선 초부터 우수한 품질의 자기를 생산한 자기소들이 있었습니다.

또 광주는 왕실의 땔감을 제공하던 곳으로,

백자 제작에 최적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광주에서 백자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도화서[圖畵署] : 조선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

특히 왕실의 각종 행사에 사용된 청화백자는 특별히 도화서에서

전문 화원을 파견해 문양을 그리게 했습니다. 그만큼 예술성도 뛰어났겠죠?

우리는 보통 백자하면 이렇게 순백색의 단아한 모습을 많이 떠올리는데요,

조선 왕실에서 주로 사용된 청화백자는 비싸고 귀했던

청화안료를 사용해 화려한 문양을 장식했습니다.

일부 관요백자는 굽 안쪽에 글자나 부호 같은

명문을 표시해 국가의 물품임을 강조하고 엄격히 관리했습니다.

하지만 청화안료는 모두 중국을 통해서만 수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비싼 값을 지불해야 했고 안정적인 공급도 어려웠죠.

청화백자에 쓰이는 청화안료는 원래부터도 매우 값비싼 원료였습니다.

대부분이 수입 안료였기 때문인데요. 게다가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청화안료의 수입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김진영 학예사 / 경기도자박물관

청화백자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안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철화백자였습니다.

17세기 후반에는 국가경제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다양한 종류의 백자들이 제작됐는데요,

이때는 높이가 40cm 이상 되는 큰 백자항아리도 제작됐습니다.

이렇게 둥글고 큰 항아리는

같은 시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조선 고유의 백자입니다.

풍만하면서도 당당함에서 배어 나오는 여유가 동시에 느껴지는,

독특한 조형미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지 않나요?

“이름을 알면 백자가 보인다?”

백자는 안료나 기법, 문양에 따라 다양한 종류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자의 복잡한 이름을 알려면 먼저 제작과정을 이해해야 하는데요,

백자 제작 과정

- 백토로 그릇의 형태를 만든다.

- 가마에서 10시간 정도 초벌구이 한다.

- 청화, 철화 안료 등으로 문양을 그린 후 백자 유약을 입힌다.

- 다시 가마에 넣고 1,300℃ 정도에서 구워낸다.

먼저 백토로 그릇의 형태를 만든 후,

가마에서 10시간 정도 초벌구이를 합니다.

여기에 청화나 철화 안료 등으로 문양을 그리고 백자 유약을 입힌 후

다시 가마에 넣고 1,300℃ 정도에서 구워내면 백자가 완성됩니다.

백자의 문양 중에 용 문양은 왕의 권위를 상징해서

왕실 백자에 주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 밖에 다양한 문양들은 당시 조선의 유교문화와 선비 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백자 이름이 복잡해보이지만 그 의미를 알면

그 기법과 제작시기, 용도 등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백자들의 이름을 한번 가만히 들여다 보며

그 시대를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요?

조선후기에는 백자의 형태도 다양해져서

사각과 팔각형의 독특한 백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또한 글 자체를 문양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선비들의 생각과 멋을 담은 시문들이 많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백자는 백성들도 널리 사용하게 되었고

형태나 문양도 점점 다양하고 화려해졌습니다.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조선 말기부터 백자문화는 크게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백자는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대표하는 소중한 우리의 유산이었습니다.

[에필로그]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백자의 전성시대는 유교문화와 성리학이 중심이었던 조선시대

2. 청화백자는 조선 왕실에서 관리하던 관요에서 제작되었다.

3. 청화안료는 주로 중국을 통해서 수입되었다.

4.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17세기에는 철화백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해설 및 참고문헌】

백자(白瓷)는 조선시대 도자문화(陶瓷文化)를 대표한다. 조선왕실과 사대부는 우아하고 단정함이 깊게 배인 백자에 그들의 사상과 문화를 담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백자는 서민들의 생활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조선시대 백자는 백성들의 단순한 음식그릇에서부터 국왕이 베푸는 연회를 장식하는 의례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백자는 담백한 색과 안정적인 형태로 큰 사랑을 받았다. 조선정부는 늘어난 백자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하여 백자를 직접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임금의 수라와 궁궐의 음식사무 전반을 담당했던 사옹원(司饔院)은 1467년 무렵 경기도 광주에 자리했던 자기소(磁器所)를 관요(官窯)로 삼아 왕실과 궁궐에서 사용되는 백자를 만들었다. 광주의 관요는 사옹원의 분원(分院)으로 조선말기까지 나라에서 필요한 백자의 생산을 전담하였다. 관요의 백자가마는 주변의 숲에서 땔감을 얻었으며 한 곳의 나무를 다 사용하고 나면 다른 곳으로 가마를 옮겼다. 조선 후기의 상황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약 10년을 주기로 가마를 옮겨 백자를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광주시 전역에서 확인되는 수많은 백자가마터는 오랜 세월 동안 옮겨 다닌 관요의 흔적이다.

관요에서 만들어진 15, 16세기의 백자에는 청화기법(靑畵技法), 상감기법(象嵌技法), 철화기법(鐵畵技法) 등으로 문양이 시문되었다. 상감기법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방식으로 조선시대 백자에는 주로 흑상감기법으로 시문된 문양이 주류를 이룬다. 왕실의 각종 행사에 사용되는 청화백자(靑畵白瓷)의 제작은 각별히 도화서(圖畫署)에서 화원(畫員)을 파견하여 문양을 그리게 했다. 조선시대 청화안료는 모두 중국에서 수입했던 귀하고 값비싼 물건이었다. 16세기 이전까지는 중국도 청화안료를 서역의 나라들에서 수입했으므로 조선의 입장에서는 더욱더 구하기 어려웠다.

조선의 17세기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비롯한 여러 차례의 전쟁과 정변, 기근과 전염병으로 나라가 큰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왕실의 백자를 제작했던 관요역시 조선 전기와 같은 안정적인 환경에서 백자를 제작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청화백자의 제작에 꼭 필요한 청화안료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대신하여 철화백자가 크게 유행하였다. 철화백자는 산화철안료의 번짐이 마치 종이 위에 펼쳐지는 먹선과 같아 잘만 다루면 백자에 한 폭의 훌륭한 그림을 표현할 수 있었다.

청화백자를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철화백자는 조선 후기 백자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17세기의 철화백자는 당시 어려웠던 상황을 극복하면서도 고유의 문화를 꽃피웠던 우리 선조들의 여유와 슬기를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생산력이 향상되고 상업경제가 활성화되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청화백자가 다시금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그 시기 관요는 경기도 광주 남종면 금사리로 옮겨갔다. 금사리에서 제작된 백자는 새하얀 태토위에 투명에 가까운 백자유를 얇게 씌워 눈처럼 흰 빛을 띤다. 순백의 백자에 푸른 무늬가 어우러져 다양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것이 당시 백자의 특징이다.

18세기에는 높이 40cm 이상의 큰 백자항아리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특히 둥글고 큰 모양 때문에 ‘달항아리’로도 불리는 백자항아리들은 기형의 풍만함과 비대칭의 여유가 느껴지는 조선만의 독특한 조형미를 담고 있다.

영⋅정조 시대에는 만주족의 청(靑)나라를 야만이라 규정하고 소중화(小中華)의식의 연장에서 조선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때부터 조선의 산과 들에서 자라는 꽃과 풀이 새로운 문양소재로 각광을 받았다. 백자에 청초하게 그려진 꽃과 풀은 당시 사대부들의 고아한 취향과 연결된다.

시간이 흘러 청나라를 중국의 주인으로 인식하고 나서는 청나라 문물의 애호가 조선 백자에 반영되어 이전에 비해 백자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장식적인 취향이 더욱 심화되었다.

영조 28년(1752)에는 약 10년에 한 번씩 땔감을 구하기 위해 옮겨 다니던 관요의 가마를 현재의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分院里)인 경안천변에 정착시켜 안정적인 백자 제작환경을 확보하였다.

조선은 18세기를 거치면서 상품경제의 발달로 부(富)를 축적한 소비층의 늘어났고 그들의 사치스러운 취향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다양한 백자가 제작되었다. 백자의 문양은 여백이 확연히 줄고 청화문양이 차지하는 공간이 크게 높아졌다. 더불어 18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개인의 부귀와 안녕을 바라는 문양소재가 크게 유행했다. 또한 청나라 백자의 기형과 문양을 직접적으로 모방한 백자들도 많이 만들어졌다.

조선 말기의 백자는 사회 환경의 변화와 새로운 외래문물의 유입에 영향을 받아 질적이나 양적으로 한층 풍부해졌다. 그 시절 백자는 서민생활에까지 깊숙이 녹아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국운과 함께 백자문화 역시 쇠락하였다. 관요의 백자는 세도가들에 의해 중간에서 빼돌려졌으며 그 때문에 사기장(沙器匠)의 부담은 늘어갔다. 더불어 일본 등 외세의 침입 역시 조선의 백자문화를 위협했다. 대량생산체제로 제작된 일본산 백자들의 유입은 관요의 운영을 더욱 위축시켰고 1883년을 지나며 관요는 결국 민영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의 백자문화는 크게 위축되었다. 더욱이 우리의 백자는 20세기 후반 산업화를 거치면서 플라스틱 등 값싸고 단단한 소재의 그릇들에 밀려 더욱더 설자리가 좁아졌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최근 들어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 연장에 조선백자가 가지고 있었던 높은 예술 가치와 우수한 기술수준에 대한 연구도 유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조선 백자는 참으로 다양한 세계를 이루었다. 조선의 백자에는 너그러운 여유와 우아한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우리는 조선시대 백자에 반영된 흐름과 변화상을 파악함으로서 과거 우리 조상들이 이루었던 역사와 문화에 보다 더 입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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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