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문화·예술 이야기
서예

전통문화를 배우며 소양을 높이는 서예 교실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 담긴 문자와 글을 배우고

붓글씨를 쓰는 시간인데요.

예로부터 서여기인, ‘글씨는 그 사람’이란 말이 있듯이

서예를 통해 교양과 인성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서예는 마음과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는 예술이라 하는데요.

서예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요?

문자는 어떻게 예술이 됐을까?

서예의 기원인 한자는 그림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사물의 모습을 본떠서 그림문자가 됐고 차차 변화를 거듭하면서

뜻을 나타내는 문자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4세기 중국의 서예가, 왕희지가 등장한 후 서예는 예술의 영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한자가 한반도에 전해지면서 우리도 한자를 사용한 예술,

서예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대표적인 서예의 글씨체는 5가지인데요.

이를 오서라 합니다.

서예의 대표적인 글씨체: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전서 : 가장 먼저 만들어진 전서는 상형문자의 원형에 가까운 모양입니다.

예서 : 그 다음 등장한 예서는 점과 획을 간결하고 곧게 쓴 형태가 특징입니다.

해서 : 해서는 필획과 글자의 구성이 잘 이뤄져 있어 당나라 때 표준서체로 사용됐습니다.

행서 : 행서는 해서와 초서의 중간 형태로 쉽게 읽고 쓸 수 있어 일상생활에 많이 사용했습니다.

초서 : 초서는 점과 획을 간략하게 만들어 글을 빠르게 쓸 수 있는 서체입니다.

이외에도 시대마다 유행하는 서체가 등장했는데요.

당대를 대표하는 서예가가 오랜 노력과 연구 끝에 탄생한 서체였습니다.

기본 오서체를 다르게 해석하거나, 개성을 담아 보다 새로운 글씨를

선보인 것입니다.

서예는 단순히 글쓰기가 아니라 의미와 멋을 담아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붓과 먹의 신비로운 조화를 통해 예술성을 극대화하는데요.

글자 크기나 획에 변화를 주고, 먹물의 짙고 옅음으로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며 글자의 멋을 드러냅니다.

붓을 잡고 글씨를 쓰는 순간에 그 사람이 평상시 함양했던 인품, 학식, 감정 등이

한꺼번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옵니다.

따라서 서예는 바로 ‘그 사람’이라 할 수 있고

다른 예술보다 독창적인 면은

선의 예술이 아니라 획의 예술이란 점입니다.

획이란 것은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김병기 교수 / 전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전통이 살아있는 한옥마을.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으면서 현대에 맞게 특색 있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는데요.

독특하고 창의적인 서체로 개성을 듬뿍 담은 글씨들이

곳곳에서 눈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캘리그라피라 해서 지금은 남과 다른 글씨가 디자인으로 주목받는 시대인데요.

이런 독창성은 한국 서예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합니다.

그 빛나는 유산은 과연 무엇일까요?

독창성, 서예에 생명을 불어넣다

우리 역사상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 시대

414년 광개토대왕릉비가 건설되는데요.

고구려 건국신화와 업적을 가득 새긴 비문의 서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서체는 예서입니다.

그런데 글자 모양에 따라 전서처럼 필획을 구사하거나

초서와 해서의 특징도 함께 사용된 것이 드러납니다.

전체적인 조화와 아름다움을 위해 다양한 서체의 특징을 비문 곳곳에 구현한

광개토대왕릉비! 동양 서예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고대에서부터 한국 서예를 빛낸 걸출한 서예가들이 등장했습니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서체를 따라하는 풍조 속에서도

틀에 박힌 글씨에서 벗어나 획의 변화나 깊이 있는 해석으로

독보적인 예술성을 드러낸 인물들인데요.

우리는 자기만의 서예세계를 보여준 이들을 명필이라 부릅니다.

한국 서예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완성한 인물, 김정희

그 이유는 바로 추사체에 있습니다.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

그는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생각했는데요.

금석학, 고증학 같은 학문을 깊이 탐구했고

옛 시대의 잊힌 서체까지 많은 서체를 연구했습니다.

제주도에서 8년 넘게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학문과 사상, 서체에 더욱 몰두해

자신만의 글씨, 추사체를 완성했는데요.

평생 열개의 벼루가 닳고 일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며

서예에 전념한 결과입니다.

추사체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작품 중 다산초당의 현판을 보면

대나무 화로를 가리키는 죽로지실이 쓰여 있는데요.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심한 필획과 파격적인 조형미!

대나무란 의미를 살려 마치 그림처럼 표현된 글자까지!

새로운 글씨의 탄생입니다.

한글 서예는 훈민정음에서 출발하는데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은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 따 만든 자음과 하늘 땅 사람을 형상화 한 모음까지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이며 이상적인 문자라고 평가받습니다.

훈민정음 반포 당시 글씨체를 판본체라 하는데요. 목판에 새기는 글씨를 말합니다.

꾸미지 않는 바른네모 형태와 직선으로 처리한 선이 특징으로

한자와는 다른 매력의 서체를 선보입니다.

이후 한글의 쓰임이 많아지면서 손으로 쓰는 필사체가 등장하며

새로운 서체가 등장합니다.

궁체: 궁중에서 쓰기 시작하며 발전해 온 한글 글씨체

대표적으로 글씨의 선이 곧고 맑으며 단정한 것이 특징인 궁체입니다.

궁중에서 임금의 명령서나 왕비의 사적인 편지를 전문으로 쓰는 상궁들에 의해

아름답고 쓰기에 편리한 한글서체가 완성됩니다.

궁중에서 임금도 개인적인 편지를 쓸 때 한글을 사용했고

민간에서도 한글 소설 등이 유행하면서 한글 서체는 보다 다양해졌습니다.

이처럼 글씨를 쓰는 목적과 누가 쓰느냐에 따라 서예 역사가 만들어졌습니다.

[에필로그]우리가 꼭 알아야 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서예는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2. 다양한 서체의 특징을 비문 곳곳에 구현한 광개토대왕릉비

3. 김정희의 높은 학문과 예술혼이 합쳐진 결정체는 추사체

4. 궁궐에서 여성들이 발전시킨 한글 서체는 궁체

【해설 및 참고문헌】

1. 삼국시대

한국 고대의 문자자료는 금석에 새긴 기록인 금석문과 붓으로 쓴 묵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금석문은 금석에 직접 새기거나, 혹은 쓰듯이 새긴 각서(刻書)가 있다. 붓으로 쓴 묵서(墨書)는 종이에 쓴 지본(紙本)과 비단에 쓴 백본(帛本), 그리고 나무쪽에 쓴 목간(木簡)이 있다. 대나무쪽에 쓴 것을 죽간(竹簡)이라하고 나무쪽에 쓴 것을 목독(木牘)이라하는데, 이들을 약칭하여 한국과 일본에서는 목간(木簡)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간독(簡牘)이라고 한다. 나무에 썼다하더라도 대들보에 쓴 상량문을 목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목간은 휴대가 가능하게 만들어진 기록으로 언제나 쉽게 펼쳐볼 수 있어야 한다. 한반도에 전하는 죽간으로는 〈평양정백동출토논어죽간〉, 〈경주구황동삼층석탑발견사경죽간(무구정광대다라니경)〉, 〈태안마도해저인양죽간〉이 전부일 정도로 매우 드물다. 그래서 금석문은 오랫동안 보전이 필요하여 기념기록에 주로 사용되는 영구적인 기록이고, 묵서는 일상의 생활에 많이 이용되는 일시적인 생활기록이다. 묵서 중에서도 사경기록은 신앙기록으로 생활기록과 구별된다.

삼국시대의 문자생활은 현대처럼 그 도구와 재료에 있어서 다양하지 못하였다. 고대의 필기방법은 세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붓으로 쓴 묵본(墨本)의 목간(木簡)이고, 도자(刀子)로 새긴 각서(刻書)의 각본(刻本)이 있다. 그리고 전적(典籍) 해독의 편리를 위하여 사용된 각필(角筆)이 있으며, 압인와(押印瓦)의 경우처럼 나무에 글자를 새긴 인장으로 기와가 굳기 전에 눌러 찍은 인출명문이 있다. 이런 경우는 같은 내용이 여러 벌 필요한 경우에 사용한 예로 인쇄문화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붓과 도자가 사용되었으며, 한문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구결이 사용되었는데, 이 구결의 표시에 각필이 이용되었다. 목간을 기록하는 도구로는 붓과 도자가 사용되었다.

문자생활과 관계된 기록문화의 필법과 도법은 당시 위정자와 식자들의 상류문화였다. 기록 문화는 항상 대륙의 기록문화와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서로 인접하여 문화의 전래와 수용이 용이하였다. 목간은 붓으로 쓰기 때문에 필법이 적용된다. 그러나 도자는 붓의 성질과 전혀 다른 도법과 각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표현되는 현상도 필법과 다르다. 붓과 도자의 서로 다른 도구로 표현되는 현상에서 서로의 차이점이 있다. 이런 상이점을 중심으로 시대별 표현의 양상은 매우 중요한 기록문화이다. 기록문화는 기록 문화로써 당시의 정치ㆍ사회ㆍ문화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목간은 당시의 생활기록이다. 이 생활기록에는 당시의 문화사항이 그대로 전한다. 특히 생활상은 물론 당시의 언어를 표현한 국어사적인 이두와 서지학적인 기록문화, 서예사적인 서체와 각법 등 당시 생활기록들에서 기록문화를 그대로 볼 수 있다.

한국 고대기록인 각본은 도자나 송곳을 사용하여 새긴 것으로 늑각(勒刻)이라고도 한다. 붓으로 쓴 묵본에는 필법이 있고, 필법에는 용필법과 운필법이 있다. 도자로 새긴 각본은 도법(刀法)이 있고, 도법에는 용도법(用刀法)과 집도법(執刀法)이 있다. 그리고 각본에는 양각, 음각, 음양각, 음평각 등이 있다. 문자생활과 관계된 기록문화의 필법과 도법은 당시 위정자나 식자들의 상류문화이다. 상류문화인 문자생활의 대중화는 승려들의 역할이 매우 컸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기록문화인 기념기록은 대부분 금석문이 주를 이루고, 대부분 석비나 명문기와, 금동명문이 주를 이룬다. 행정이나 생활기록은 목간으로 남아 전하며, 금석과 지본의 사경기록이 있다. 행정이나 생활기록은 목간의 출토를 통하여 알려졌으며, 사경기록은 지본묵서, 목간, 은판에 눌러 새긴 사경이 알려졌다.

1) 고구려

고구려의 기념기록인 금석문은 석비와 명문기와가 주로 전한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광개토왕릉비(414)〉ㆍ〈경주호우총호우명(415)〉ㆍ〈평양성각석1(569)〉 등이다. 이들의 경우처럼 기념기록에는 새기기 쉬운 예서나 해서를 사용하였다. 〈광개토왕릉비(414)〉는 예서로 쓰여 졌지만 전서법, 초서법, 팔분법, 해서법 등이 함께 사용된 점이 특징으로 매우 드문 예이다. 규모도 다른 예가 없을 정도이다. 〈경주호우총호우명(415)〉에서도 예서를 사용한 점은 이런 예를 따른 것이다. 〈광개토왕릉비(414)〉ㆍ〈경주호우총호우명(415)〉ㆍ〈경사년명금동불상〉ㆍ〈농오리산성마애각명〉ㆍ〈연가칠연명금동여래입상(539)〉 등이 모두 예서법이다.

행정이나 생활기록에는 〈덕흥리고분〉ㆍ〈안악3호분〉 등의 경우에 해서나 행서, 초서 등을혼용하였다. 〈덕흥리고분〉ㆍ〈안악3호분〉ㆍ〈평양성각석1(569)〉 등등에 사용된 해서법은 북조법을 따랐다. 그러나 대륙에서 유행한 북조체와는 다른 해서법으로 변용하여 사용하였다. 북조법은 황하 이북의 북쪽에서 유행한 필법으로 지정학적인 이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북조법과 남조법의 필법을 도표로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북조체 특징 남조체 특징
지역 대륙 북방의 낙양, 장안지역 대륙 남방의 강남지역
점법 글자의 위치에 따라 다름 글자의 위치에 따라 다름
필획법 왼쪽삐침강조, 가로획강조, 굵은 직선필획, 재절법사용 오른쪽삐침강조, 세로획강조, 가는 곡선필획, 단절법사용
결구법 왼쪽이 작고 아래로 내려가며, 오른쪽이 크고 위로 올라감. 정사각형, 마름모꼴 결구 좌우의 크기가 같다. 정사각형, 갸름한 직사각형 결구
장법 상하좌우와 자간간격이 일정한 바둑판형태의 장법 자간이 상하는 좁고 좌우의 행간은 넓은 세로열 형태의 장법
전래방법 묘지, 조상기 등 금석문 모각 서첩(模刻 書帖)

사경체의 필법을 따른 기록으로는 〈모두루묘지〉가 있다. 이는 사경체를 사용하여 당시 불교의 유행을 기록문화에 반영한 것이다. 〈모두루묘지〉의 사경체는 당에서 유행한 사경체와는 다른 위촉오의 삼국시대에 유행한 사경체의 필법으로 특별하다. 여기서는 사경체에 팔분법이 혼용되어있어 다른 사경체와 구별된다.

고구려에서는 먹을 토기로 만든 벼루에 갈아 대접에 따라서 붓으로 썼다. 이런 정황은 〈집안사신총 필신(筆神)〉의 그림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토기로 만든 벼루가 쉽게 마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2) 백제

백제의 기념기록으로는 〈무령왕릉지석(523)〉ㆍ〈창왕명사리감(567)〉ㆍ〈왕흥사지출토청동사리함(577)〉ㆍ〈익산미륵사석탑진신사리봉영기(639)〉ㆍ〈사택지적비(654)〉 등의 예가 있다. 기념기록은 금석에 새기기 쉽게 해서, 혹은 예서를 사용하였다. 이런 예서의 사용은 고구려와의 밀접한 문화의 전래와 수용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무령왕릉지석(523)〉ㆍ〈사택지적비(654)〉 등은 북조체의 해서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북조인 북위와 친교에서 행정관들이 수용한 결과로 생각된다. 이 중에서도 〈창왕명사리감(567)〉은 예서이다. 〈창왕명사리감(567)〉ㆍ〈왕흥사지출토청동사리함(577)〉ㆍ〈익산미륵사석탑진신사리봉영기(639)〉 등은 불교관계유물이라서 사경승들의 손에 의하여 조성된 기록들로 사경체를 사용하였다.

행정이나 생활기록으로는 〈백제목간(538-660)〉이 있다. 그 중에서도 〈지약아식미기(6세기)〉, 〈좌관대식기(558)〉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지약아식미기(6세기)〉는 약을 지급하는 약아에게 먹거리를 지급한 기록이고, 〈좌관대식기(558)〉는 국가에서 구휼정책을 시행한 문서목간으로 매우 귀중한 중앙 행정관에 의하여 기록된 문서이다. 행정이나 생활기록에 사용한 목간들은 해서, 행서, 초서를 혼용하여 사용한 점이 기념기록과 다르다. 이는 기록의 편리성 때문이다. 행정이나 생활기록에서도 북조와 남조의 필법이 혼용되어있는 것은 북조의 북위와의 관계와 남조인 양과의 관계를 상정해볼 수 있다.

사경기록은 〈왕궁리오층석탑발견은제금도금금강경(국보 제123-1호, 7세기)〉이 전한다. 〈왕궁리오층석탑발견은제금도금금강경(국보 제123-1호, 7세기)〉은 석판에 음각으로 글씨를 거꾸로 새겨 은판을 대고 두드려 양각으로 인출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인쇄문화의 단초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종이가 아니라 은판에 찍어낸 것으로 목판의 인쇄술과 같은 방법이다. 목판은 양각으로 새기고 여기에서는 음각으로 새긴 것이 다르다.

그리고 〈왕흥사지출토청동사리함(577)〉ㆍ〈익산미륵사석탑진신사리봉영기(639)〉 등을 통하여 당시의 도자(刀子)를 사용한 각법(刻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각법은 마치 붓으로 쓰듯이 새긴 것이다. 특히 〈왕흥사지출토청동사리함(577)〉ㆍ〈왕궁리토층석탑발견은제금도금금강경(7세기)〉ㆍ〈익산미륵사석탑진신사리봉영기(639)〉 등은 당시 유행하던 사경의 필법으로 사경기록과 같은 것이다. 다만 〈왕궁리토층석탑발견은제금도금금강경(7세기)〉은 사경기록이고, 〈익산미륵사석탑진신사리봉영기(639)〉는 기념기록이다. 이와 같이 기록의 성격이 서로 다를 때는 그에 따른 서체도 달랐다.

3) 신라

신라는 고구려ㆍ백제와 매우 관계가 깊어 많은 소통이 있었다. 그래서 고대 신라의 기록문화는 고구려의 기록문화와 관계가 깊다. 석비의 양식이나 기법, 그리고 서법이 같다. 이러한 기록문화는 불교문화를 통하여 서로 전래 수용된 것이다. 신라의 기념기록인 〈울진봉평리신라비(524)〉를 쓴 모진사리공은 신라의 예서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런 예서법의 서체는 6세기에 제작된 금석문인 〈포항중성리신라비(501)〉, 〈포항냉수리신라비(503)〉,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561)〉,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568)〉 등과도 같은 양식이다. 그러나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568)〉에 와서는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석비라 하더라도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568)〉는 가장 이른 시기의 해서법이 사용된 예이며, 행정관의 기록으로 당시 신라 조정의 기록문화의 수준을 유추할 수 있다. 그 이후 〈태종무열왕능비〉를 쓴 김인문(金仁問, 629~694)은 당 태학에서 배운 구양순의 필법으로 비음을 썼고, 이런 예부터 해서가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제액(題額)은 당에서도 보기 드문 대전(大篆)인 유엽전(柳葉篆)을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신라 서체의 서법은 대당교섭이 잦은 7세기부터 매우 다른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즉 통일 전에는 고구려의 예서법이 지배적이지만, 통일 후에는 당에서 유행한 해서법을 수용하여 발전시켰다.

생활이나 행정기록은 목간이 남아 있다. 당시의 대표적인 목간으로 〈함안성산산성출토목간(592)〉이다. 대부분 물품꼬리표에 해당하는 물표들이다. 그러나 촌장이 보낸 문서인 〈대법목간〉은 당시 율령의 실시에 따른 준법정신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목간이다. 해서법이 갖추어진 이른 시기의 목간으로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568)〉와 24년 정도 차이가 있다. 〈함안성산산성출토목간(592)〉은 해서법이 아직 덜 갖추어진 해서법으로 초기 해서법의 면모를 살 필 수 있다.

2. 남북국시대

1) 통일신라

신라는 통일 이후부터 해서문화를 꽃피운 당의 문화를 수용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다. 유학생, 유학승, 교역 등 당과의 교류에 따라 당에서 유행한 왕희지, 왕헌지, 구양순(歐陽詢, 557년~641년), 우세남(虞世南, 558년~638년), 저수량(楮遂良, 596-658), 안진경(顔眞卿, 709년 ~ 785년) 등의 서체가 수용되어 유행하였다. 특히 불교문화의 대중화는 사경문화와 함께 기록문화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리고 발달된 기록문화는 금석문의 발달과 함께 문자생활의 질을 높여주었다.

통일신라의 명필은 기념기록의 금석문으로 남아 전한다. 〈문무왕릉비〉를 쓴 한눌유(韓訥儒), 왕희지체를 변용한 명필 김생(金生, 711~?), 당 유학생 김육진(金陸珍), 당 유학승 영업(靈業)은 단속사 신행선사비(斷俗寺 神行禪師碑)를 왕희지체로 썼고,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보물 제158호)는 김원(金薳)이 구양순체로 반을 쓰고, 김언경(金彦卿)이 왕희지 행서로 반을 썼다. 〈봉암사지증대사비〉를 써서 새긴 혜강(慧江), 구양순체를 변용하여 일가를 이룬 요극일(姚克一), 김림보(金林甫), 김일(金一), 최치원(崔致遠) 등이 있다. 이들은 당에서 유행하던 왕희지나 구양순의 필법을 변용하여 유행시켰다. 김 생은 행서 〈여산폭포시〉를 초서의 장법으로 구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김 생의 〈여산폭포시〉는 강약이 심한 필세와 변화가 많은 결구를 사용하여 전무후무한 서예세계를 열었다.

통일신라부터는 당 석비문화의 영향을 받아 제액인 이수전액과 두전의 양식이 사용되었다. 석비의 두전(頭篆)은 전통적으로 비액에 기록하는 것으로 석비의 이름표에 해당하는 표제 양식이다. 그래서 이수제액이 있고 비신두전이 있다. 대부분 전서로 기록하는 것이 전통이다. 그러나 해서로 기록하는 예도 있으나 모두 두전이라 부른다. 표제개념의 기록양식으로는 편액과 주련, 제액과 두전, 그리고 번기(幡旗, 깃발)가 있다. 이들은 멀리서도 확인하기 쉽도록 글자가 크게 써지는 특징이 있다. 대표적인 표제개념의 기록양식으로 편액과 주련이 있다. 석비의 표제기록양식은 물론 서예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오히려 비음의 본문보다도 서체적인 비중이 크다.

석비 주인공을 표기하는 양식으로는 크게 제액(題額)과 두전(頭篆)으로 나뉜다. 제액은 이수에 세로기록방식으로 기록된 표제이고, 두전은 비신에 가로기록방식으로 기록된 표제이다. 제액은 주인공을 나타내는 명찰기능으로 이수(螭首)에 세로기록방식으로 쓰여 진 표기이다. 석비의 표제로 반드시 전서로 서사된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전서를 많이 사용하였다. 대부분 전서로 썼기 때문에 전서제액(篆書題額)이라고 하는데, 이를 줄여 전액(篆額)이라고도 하였다. 해서로 썼다하여도 전액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제액의 양식이 두전의 양식으로 바뀌는 것도 이런 석비의 표제기록에 관한 양식과 서체의 연구를 통하여 당시 기록문화를 조명해 볼 수 있다.

두전 역시 주인공을 표기한 표제에 해당되며, 석비의 상단에 가로기록방식으로 서사하는 양식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본문의 글씨보다는 크게 쓰고, 자체도 본문의 해서와는 다르게 전서, 혹은 예서나 팔분을 사용하며, 해서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본문의 글자보다는 큰 글자를 사용하여 쉽게 분별하게 하였다. 어떤 경우는 전서로 쓰고, 해서로 주를 달아 알아보기 쉽게 하였다. 제액이나 두전은 편액(片額)과 번기(幡旗, 깃발)에서와 같이 쉽게 눈에 잘 띄게 하는 표제개념의 기록에 해당한다.

제액의 예는 한대부터 확인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는 삼국통일 후부터 당의 석비문화를 수용함에 따라 사용되었다. 특히 전서의 사용은 석비와 인장에 전통적으로 사용되었다. 인장의 자체(字體)는 고딕체에 해당하는 무전(繆篆)으로 바뀌어 사용되다가 다시 전서를 사용하는 양상을 띠며, 편액은 해서 중에서도 이른바 액체(額體)라는 서체를 주로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까지 전통적으로 전서를 고집해 온 두전의 경우도 예서나 해서를 혼용하였다. 아직 인장이나 두전에 전서를 사용하는 예는 이러한 전통적인 자체 사용의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석비의 경우 자체가 예서나 해서로 썼어도 두전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제액이나 두전은 표제개념이고, 비음은 기록개념이다. 제액이나 두전의 표제개념은 글자를 크게 써서 쉽게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전서를 사용한 것은 전통의 양식으로 보인다. 삼국통일 후 당으로부터 수용한 두전에도 전서가 전통적으로 사용되었다.

제액과 두전의 발생은 석비문화에서 발생하였다. 석비는 장례의 변천에 따라 양식이나 내용도 변화하였다. 장례의 전통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무덤의 위치를 표시하던 것이, 점차 죽은 이를 추모하고 생전의 공적을 찬양하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제액과 두전의 자체는 인장의 경우와 같이 전통적으로 전서가 대부분이다. 전서는 대전과 소전으로 나누어 사용되었으나 해서와 팔분도 많이 사용되었다. 드물게는 행서로 쓰여 진 두전도 있다. 특이한 경우는 해서와 전서를 같이 사용하여 알아보기 쉽게 한 예도 있다. 각법에 있어서 음각과 양각으로 나눌 수 있으며, 양각도 있으나 음각이 대부분이다.

전서의 종류는 매우 많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몇 종류로 나눈다. 36종의 전서체는 대개 계회도의 화제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특히 계회도나 인장에는 삼십육제서(三十六體書)가 사용되었다. 이런 서체는 제액이나 두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유엽전(柳葉篆)과 전도전(剪刀篆), 옥근전(玉筋篆)과 현침전(懸針篆) 등은 두전에 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의 석비문화는 삼국통일 후 당에서 묘제문화를 수용하면서부터이다. 그래서 신라가 당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부터 제액문화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통일전의 석비에는 제액이나 두전의 표제기록을 볼 수 없다. 다만 가장 이른 시기의 표제기록은 〈당유인원기공비(663)〉이며 누구의 글씨인지는 모르지만 양각소전으로 써서 새겼다. 당시 당에서는 대부분 당전(唐篆)을 썼고 각법도 음각이 일반적이었다. 그 예로는 당나라 사람에 의하여 대륙에서 서사된 〈禰寔進墓誌(7세기)〉가 있고, 다른 하나는 당인(唐人)에 의하여 백제에서 서사된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각자(660, 權懷素 書)〉이 있다. 후자는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고 정림사지오층석탑의 측면에 권회소(權懷素)로 하여금 글씨를 쓰게 하고 새긴 것이다. 같은 시기에 대륙에서 당나라 사람에 의하여 서사된 백제인 〈녜식진묘지〉와 비교해 보면 당의 제액문화를 알 수 있다. 이 시기 묘지에는 대부분 개석(蓋石)에 제액을 썼다. 여기에 쓰여 진 제액들은 명찰과 같은 표제개념으로 그 크기가 매우 작다. 이상과 같은 제액을 신라에서 수용하게 되었다.

당에서 제액양식을 수용하여 서체를 변용한 제액이 있다. 그 예로 김인문(金仁問, 629~694)이 쓴 것으로 전하는 〈태종무렬왕릉비(661~681, 金仁問)〉를 비롯하여, 〈찬지비(8~9세기)〉ㆍ〈쌍계사진감선사비(887, 崔致遠 奉敎撰幷書篆額)〉ㆍ〈실상사(深源寺)수철화상릉가보월탑비(893)〉 등이 서체를 달리 변용한 예이다.

당의 제액법을 수용한 예로는 통일신라기의 〈쌍봉사철감선사탑비(868)〉ㆍ〈보림사보조선사부도비(884)〉ㆍ〈사림사홍각선사비(886, 崔夐 篆額)〉 등이 있다. 서체는 일반적으로 소전이 서사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당전의 필획과 결구를 수용한 서법에 해당한다.

대전제액(大篆題額)으로는 〈쌍계사진감선사비(887, 崔致遠 奉敎撰幷書篆額)〉가 있다. 당의 제액문화가 소전을 일반적으로 구사한 것에 비하면 〈쌍계진감선사비(887)〉은 매우 희귀한 예로 필획과 결구, 서체와 자체가 모두 특별하다. 유엽전제액의 예로는 〈태종무열왕능비〉ㆍ〈쌍계사진감선사비(887)〉ㆍ〈실상사수철화상비(893)〉 등이 있다. 이 제액들의 서체는 유엽전인데 〈천발신참비(267)〉와 유사한 필획법으로 기필과 수필에서 노봉의 전서를 구사한 것이 특징이다. 〈태종무열왕능비〉는 김인문이 쓴 것으로 전하는데, 김인문(629~694)은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651년 왕명으로 당에서 좌령군위장군의 벼슬을 하였고, 653년 신라로 돌아왔기 때문에 당의 중앙 문화를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다.

〈쌍계사진감선사비(887)〉는 고운 최치원선생이 28세에 귀국하여 31세에 왕명으로 서사한 것이다. 대전으로 쓴 것은 당시 당에서는 볼 수없는 예이다. 이는 秦 李斯에 의하여 문자가 통일되기 전의 이른바 육국문자이다. 당시 당에서도 대전을 금석에 사용한 예가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 육국문자는 북송 때 하남성 낙양 출신의 곽충서(郭忠恕, ?~977)에 의해 정리되어 『패휴(佩觿)』와 『한간(汗簡)』을 간행한바 있을 정도이다.

해서제액은 〈찬지비(8~9세기)〉가 처음 보이는 예이다. 이런 해서제액은 편액의 개념과 유사한 것이다. 본디 편액에서도 세로기록방식이 고식이며 후에 가로기록방식으로 바뀐다.

제액의 각법은 대체로 음각이 일반적이지만 양각도 있다. 양각제액은 〈태종무열왕릉비(661~681)〉ㆍ〈사림사홍각선사비(886)〉ㆍ〈쌍계사진감선사비(887)〉 등이 있다. 음각제액의 예로는 〈찬지비(8~9세기)〉ㆍ〈쌍봉사철감선사탑비(868)〉ㆍ〈보림사보조선사부도비(884)〉ㆍ〈실상사(심원사)수철화상릉가보월탑비(893)〉 등이 있다. 양각이 음각보다 적은 예는 그만큼 새기기 어렵고 품이 많이 들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시대의 석비 표제기록양식은 세로기록방식의 제액이었다. 당에서 수용되어 신라인에 의하여 표현된 제액문화는 소전음각의 일률적인 양식만이 아니라, 대전과 소전, 그리고 양각과 음각의 변용이었다. 이수에 쓰여 진 제액은 명찰개념으로 그 크기가 매우 작다. 각법은 음각과 양각을 함께 사용하였다. 자체는 대전과 소전, 해서 등을 구사하였고, 필획은 철선전과 옥근전, 유엽전을 사용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제액은 일률적인 당전의 예도 있지만, 다양한 양식으로 변모시켜 활용한 것이 신라인들의 문화 수용 자세였음을 알 수 있다. 서자자의 경우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누가 전액을 썼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비음을 쓴 사람이 제액과 함께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태종무렬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 661~681)〉는 김인문이 썼다고 전하는데 제액 역시 그의 필적으로 볼 수 있다. 석비의 제액문화는 〈태종무렬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 661~681, 金仁問)〉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인문의 글씨는 〈만년궁명비〉에도 전하는데 같은 필법이다. 그러나 유행하는 시기는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 〈쌍봉사철감선사탑비(雙峯寺澈鑑禪師塔碑, 868)〉로부터 유행되었다. 유학생ㆍ유학승ㆍ숙위 등의 많은 인원이 당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당의 문화에 대하여 익숙해진 시기에 해당한다.

생활기록이나 행정기록은 대부분 목간으로 전한다. 경주 주변에서 발굴된 목간들은 남조에서 유행한 필법인 왕희지체가 많아서 당시의 유행을 알 수 있다.

기록문화 중에서 특별한 사경문화를 들 수 있다. 사경은 삼보의 하나로 숭배의 대상이다. 그래서 사경은 모두 단정한 해서로 썼으며 행서나 초서로 기록된 사경은 없다. 종이에 묵서로 쓴 사경은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754, 국보 제196호)〉이 있다. 금석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화엄사화엄석경〉이 대표적이다. 〈화엄사화엄석경〉은 여러 사람의 글씨로 대부분 사경승의 기록이다. 사경은 전통성이 강하기 때문에 주로 북조사경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목판 인본으로는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751)〉은 세계 최고의 인쇄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가 만든 글자인 무후자가 사용된 점이 특징으로 이 또한 전통성 때문으로 생각된다.

글씨를 모아 만든 집자비는 남북조시대부터 당(唐) 회인(懷仁)이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글자를 집자하여 672년에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 672〉를 만든 것이 처음이다. 이를 모방하여 통일신라시대부터 집자비를 만들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유명한 명필의 글씨를 자본으로 집자되었는데 시대별ㆍ개인별로 그 취향이 다르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글씨를 집자한 〈무장사비아미타불조상사적비(鍪藏寺碑阿彌陀佛造像史蹟碑, 801)〉ㆍ〈사림사홍각선사비(沙林寺弘覺禪師碑, 886)〉 등이 있어 왕희지체의 유행을 알 수 있다.

2) 발해

발해는 다민족국가였다. 그러나 국가 지도층은 고구려인이었음을 기록문화를 통화여 알 수 있다. 발해는 알려진바 적지만 〈광개토왕릉비〉의 예서로 쓰여 진 압인와(押印瓦)가 많이 출토되어 남아 전한다. 〈광개토왕릉비〉에 사용된 이체자의 사용은 고구려의 기록문화가 그대로 전수되었음을 의미한다. 해서의 석비는 〈정혜공주묘비〉와 〈정효공주묘비〉가 구양순체로 기록하였다. 〈함화4년명불상명(咸和4年銘佛像銘)〉은 북조와 고구려에서 유행한 북조의 필법이다.

왕족인 대간지(大簡之)는 발해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송석소경(松石小景)을 잘 그렸다는 기록이 『해동역사』 권67에 전한다. 중국의 『화사회요(畵史繪要)』를 인용한 이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산수화를 잘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송석(松石)의 절지법(折枝法)은 글씨에도 응용되었을 것이다. 이는 통일신라가 통합 이후 당의 문화를 여과 없이 수용한 반면, 발해는 문화수용의 속도도 느릴 뿐만 아니라 무조건 수용하지 않은 점이 서로 다르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남북국시대에 수용된 선진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사경의 발달과 함께 다양하고 많은 서체가 유행하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명필은 이환추(李桓樞), 구족달(具足達), 장단열(張端說) 등을 위시하여, 채충순(蔡忠順), 손몽주(孫夢周), 안민후(安民厚), 탄연(坦然), 이암(李嵒/1297~1364), 권중화(權仲和/1322~1408), 한수(韓脩/1333~1384)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이환추, 구족달, 장단열, 손몽주, 안민후 등은 구양순체 해서에 능했고, 탄연과 이암은 왕희지체 행서의 명필이며, 권중화와 한수는 팔분의 명가였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사경이 발달하여 명품의 사경이 많이 전한다. 고려시대 집자비로는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한 〈흥법사진공대사비(興法寺眞空大師碑)/940)〉ㆍ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954년(광종5년)〉,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직지사대장당기비(直指寺大藏堂記碑)/명종 15년(1185)忘失〉ㆍ〈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충렬왕 21년(1295)〉 등의 집자비가 있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하여 불교문화와 관련된 문자자료가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묵본으로 전하는 사경과 금석문으로 전하는 석비와 묘지석이 대표적이다. 묵본으로 전하는 사경은 백지묵사경, 감지금사경, 감지은사경, 그리고 각종판본이 있다. 사경에는 조성기가 있어서 사경의 제작과정과 서사자, 시주자, 제작연유 등을 상세하게 살필 수 있다. 다만 서예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서체의 다양성이 결여된 것이 단점이다.

각종 판본은 활자본과 목판본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활자와 목판은 제작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서체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활자와 목판은 사경을 기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방정한 해서가 대부분이다. 이런 예는 금석문의 석비에 있어서도 서법이 엄격한 해서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고려 초기와 중기에는 구양순체의 해서가 유행하였고, 중기부터는 왕족들의 사치에 따라 왕희지체의 아름답고 유려한 글씨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래서 왕희지나 당 태종의 글씨나,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는 집자비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일상생활의 단면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서체의 보고는 묘지(墓誌)이다. 묘지는 대부분 돌에 새겨 땅속에 시체와 함께 매장하였다. 그래서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많이 있으며 330여개의 고려묘지가 전한다. 비록 도자로 돌에 새긴 글씨이지만 묘지에는 많은 부분 당시의 기록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자료를 통하여 각종의 각법도 함께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고려시대에는 구양순체와 왕희지체가 유행하였고, 가끔은 유공권과 저수량을 변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고려 말에 원나라 조맹부체와 이부광의 설암체는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새로운 영역의 문호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왕희지체를 배운 조맹부체는 고려 말 이암을 필두로 조선의 왕공귀족들 사이에 유행하여 조선 초 명필 안평대군 이용을 낳았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왕족들을 중심으로 유행한 조맹부체는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유행하여 각종 판본, 공문서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조맹부체가 유행하였다. 고려 말 이제현(李齊賢/1287~1367)ㆍ이암(李嵒/1297~1364) 등은 조맹부체를 바탕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공민왕은 설암체를 본받아 많은 편액을 썼고 이른바 액체(額體)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그래서 편액이나 주련에는 모두 액체를 사용하였으며, 그 후 액체 문화는 600년 동안 지속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석비의 표제기록양식인 제액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두전으로 바뀐다. 제액은 이수에 세로기록방식으로 서사되는 것이지만, 두전은 비신 상단에 가로기록방식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제액과 두전의 절충양식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제액식두전이다. 제액식두전의 표제기록양식은 세로기록방식인 제액과 가로기록방식인 두전의 절충식으로 글씨와 규모가 커진다.

이런 양식의 변화와 유행은 고려 초기(10세기), 고려 중기(11~12세기), 고려 후기(13~14세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렇게 구분한 이유는 표제양식이 변화하는 양상이 이런 시기를 기점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3기로 시대를 구분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기별로 다음과 같은 양식의 변화와 유행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석비의 표제기록문화이다.

1) 고려 초기(10세기)

고려는 초기(10세기)부터 과거제도의 시행으로 기록문화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더구나 잡과에 서업(書業)을 두어 서체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업은 서사(書寫)를 전업(專業)하는 것으로 수험과목은 『설문(說文)』과 『오경자양(五經字樣)』이 기본 교양과목이고, 실기로는 해서ㆍ행서ㆍ전서 등 각 서체를 통과해야 한다. 이 서업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성균관에 서학박사가 있고, 서리로는 각 관청마다 서령사(書令史)ㆍ서예(書藝)ㆍ시서예(試書藝)ㆍ서수(書手) 등이 배치되어 서사를 담당하였다” 이 같은 관련제도의 정비는 서법의 흥융과 보급을 촉진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왕희지와 구양순체의 글씨가 유행하였다. 왕희지체의 유행으로 그의 글씨를 집자한 집자비가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시대 왕희지 글씨를 집자한 집자비로는 〈直指寺大藏殿碑(1185)망실〉ㆍ〈麟角寺普覺國師碑(1295)〉 등이 있다. 그리고 왕희지체에 능했던 김생의 글씨를 석 단목(釋 端目)이 집자한 〈태자사랑공대사백월서운탑비(954)〉가 있다. 이런 집자비를 통하여도 왕희지체의 유행을 짐작할 수 있다. 왕희지체에 능했던 사람으로는 김생(金生, 711~?)과 탄연(坦然, 1070~1159)이 있다. 한편으로는 금석에 주로 사용한 구양순체가 유행하였는데, 이롼추(李桓樞ㆍ구족달(具足達)ㆍ장단열(張端說)ㆍ한윤(韓允) 등이 모두 고려 초기에 구양순체를 잘 썼던 명필들이다.

고려 초기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수에 제액을 하였다. 이수에 쓰여 진 제액은 명찰개념으로 그 크기가 매우 작다. 그 예로는 〈菩提寺大鏡大師塔碑(939, 李桓樞 奉敎書幷篆額)〉ㆍ〈毘盧庵眞空大師碑(939, 李桓樞 奉敎書幷篆額)〉ㆍ〈淨土寺法鏡大師碑(943, 具足達 奉敎書)〉ㆍ〈寧越興寧寺澄曉大師碑(944, 崔潤 奉敎書兼篆)〉ㆍ〈無爲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946, 柳勳律 奉敎書)〉ㆍ〈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965, 張端說 奉勅書幷篆額)〉ㆍ〈高達寺元宗大師碑(975, 張端說 奉制書幷篆額)〉ㆍ〈普願寺法印國師碑(978, 韓允 奉制書幷篆額)〉ㆍ〈燕谷寺玄覺禪師塔碑(979, 張信元 書)〉 등이 있다. 필획과 결구가 소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필법으로 역시 소전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해서제액으로는 〈정토사법경대사비(943)〉가 유일하다. 이 제액은 구양순체의 대가인 구족달의 글씨인데, 역시 사면에 계선을 넣어 구양순체로 썼다.

전서제액은 〈보제사대경대사탑비〉ㆍ〈비로암진공대사비〉ㆍ〈영월흥녕사징효대사비〉ㆍ〈무위사선각대사편광령탑비(946)〉ㆍ〈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965, 張端說 奉勅書幷篆額)〉ㆍ〈고달사원종대사비(975, 張端說 奉勅書幷篆額)〉ㆍ〈보원사법인국사비(978, 韓允 奉制書幷篆額)〉ㆍ〈연곡사현각선사탑비(979, 張信元 書)〉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의 필획은 起筆과 收筆에서 露鋒을 사용한 유엽전의 필획이다. 이환추는 939년 같은 해, 같은 종류의 유엽전을 구사하였는데 모두 양각이다. 아마 〈태종무열왕능비〉 두전의 필법을 모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소전음각제액은 가장 많은 양식이다. 음각은 양각에 비해 새기기 쉬워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소전음각제액의양식은 〈무위사선각대사편광령탑비(946, 柳勳律 奉敎書)〉ㆍ〈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965)〉ㆍ〈고달사원종대사비(975)〉ㆍ〈보원사법인국사비(978)〉ㆍ〈연곡사현각선사탑비(979)〉 등으로 그 수가 가장 많다.

소전양각제액은 〈보제사대경대사탑비(939)〉ㆍ〈비로암진공대사비(939)〉ㆍ〈영월흥녕사징효대사비(944)〉 등이 선을 보이다가, 11세기가 되면 없어진다. 이런 소멸은 경제상황과 비례하여 제작원가의 절감과 양각의 어려움으로 생각된다.

제액과 두전은 전통적으로 전서로 썼으나 때로는 해서나 행서로 쓴 예가 있다. 그러나 같은 표제개념의 기록이지만 편액은 해서가 많다. 바로 이점이 제액ㆍ두전과 편액이 다른 점이다. 고려 초기 구양순체를 잘 썼던 이환추ㆍ구족달ㆍ장단열ㆍ한윤 등의 명필들이 있는데, 이들이 쓴 제액과 두전을 서사자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환추는 〈보제사대경대사탑비(939, 李桓樞 奉敎書幷篆額)〉와 〈비로암진공대사비(939, 李桓樞 奉敎書幷篆額)〉를 유엽전으로 써서 양각을 하였다. 일반적인 소전제액과 다른 점이다. 구양순체에 익숙하였던 이환추의 유엽전은 소전이지만 필획에 方筆과 露鋒을 사용하였다. 역시 일반적인 전서의 필법에서 볼 수 없는 이환추의 서법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런 서법은 김인문이 서사한 것으로 생각되는 〈태종무열왕능비〉가 본이 되었을 것이다.

구족달도 구양순체에 능한 명필인데 〈정토사법경대사비〉를 구양순체 해서로 썼다. 역시 제액에서도 구양순체에 익숙한 구족달의 서법이 엿보인다.

장단열의 제액은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ㆍ〈고달사원종대사비〉 등이 있다. 전형적인 소전의 필획과 결구이다. 그러나 唐篆을 벗어나지 못하여 필획이 활달하지 못하고, 결구가 옹색하다. 이런 소전이 고려 초기에 사용된 일반적인 소전이다.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는 가운데 계선을 세 줄로 그어 차별화하였다.

한윤의 〈보원사법인국사비〉 역시 필획과 결구가 당나라의 전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최윤은 〈영월흥녕사징효대사비〉를 썼으며, 유엽전으로 이환추의 〈보제사대경대사탑비〉ㆍ〈비로암진공대사비〉 등과 같은 필법과 양식의 제액이다. 〈무위사선각대사편광령탑비〉ㆍ〈연곡사현각선사탑비〉 등도 소전과 같은 필법이다.

통일신라부터 고려 초기인 10세기까지는 소전의 필획과 결구가 사용되었고, 장법은 갸름한 직사각형의 제액이 유행을 하였다. 다만 유엽전을 사용하였다거나, 양각을 사용하여 다양한 구사를 한 것은 구별되는 점이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세로기록방식의 제액양식이 통일신라시대와 서로 같지만 서체나 刻法의 사용에 있어서는 매우 자유분방한 시기였다.

4. 조선시대

조선왕조는 건국당시 불교를 배척하고 주자학파의 유학을 바탕으로 통치의 기본원칙이 세워졌다. 그래서 성리학의 유행과 함께 많은 예술 활동이 위축되었다. 이는 서화에 있어서도 같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 초기 필법의 주류는 행서와 초서에서 왕희지체와 조맹부체의 유행, 팔분은 당팔분과 전서의 유행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맹부체는 왕과 왕족을 중심으로 궁중에서 선호하였고, 왕희지체는 사림에서 서법이 전승되었다. 그리고 초서는 전통적으로 장초와 광초가 작품에 응용되었다. 이런 필법과 유행은 조선 후기까지 별다른 변화없이 사승관계와 가학으로 이어졌다.

조선의 해서명필은 강희안(姜希顔, 1417~1464), 박팽년(朴彭年, 1417~1456), 성삼문(成三問),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성임(成任, 1421~1484), 한호(韓濩) 등을 들 수 있다. 행서에 능한 안평대군 이용(1418∼1453)과 윤순(尹淳, 1680∼1741), 초서명필은 김구(金絿, 1488 ~ 1534), 양사언(楊士彦, 1517년 ~ 1584년), 황기로(黃耆老, 1521∼?),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 백광훈(白光勳, 1537년 ~ 1582년) 등이 있으며, 팔분으로는 김수증(金壽增, 1635~1705)이 대표적이며, 전서로는 허목과 김진흥(金振興, 1621~?)이 특별하였다. 예서는 김정희(金正喜)의 추사체가 유명하다. 특히 16-17세기는 광초가 유행한 시기이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는 왕 희지(王 羲之, 321-379)ㆍ왕 헌지(王 獻之, 348-388), 조 맹부(趙 孟頫, Zhao Mengfu, 1254-1322) 이외에도 명나라 축 윤명(祝 允明, 1460-1526), 문 징명(文 徵明, 1470-1559) 의 서법이 수용되어 유행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 최흥효, 유 응부(兪 應孚, ? ~ 1456년),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 ~ 1462), 박 팽년(朴 彭年, 1417~1456), 안평대군 이 용(安平大君 李 瑢, 1418-1453)ㆍ강 희안(姜 希顔, 1417(태종 17)-1464(세조 10))ㆍ김 종직(金 宗直, 1431-1492)ㆍ정 난종(鄭 蘭宗, 1433-1489) 등이 유명하였다.

조선 중기는 초서가 가장 유행하던 시기이다. 초서의 유행은 소 세양(蘇 世讓, 1486-1562)ㆍ김 구(金 絿, 1488-1534)ㆍ성 수침(成 守琛, 1493-1564)ㆍ이 황(李 滉, 1501-1570)ㆍ김 인후(金 麟厚, 1510-1560), 양 사언(楊 士彦, 1517-1584)ㆍ황기로(1521-?), 성 혼(成 渾, 1535- 1598) 등이 초서의 유행이 전승되었다. 그 중에서도 김 구(金 絿, 1488-1534), 황기로(1521-?), 황영로 형제, 김 인후(金 麟厚, 1510-1560), 양 사언(楊 士彦, 1517-1584), 신 사임당(申 師任堂, 1504-1551), 이 우(李 瑀. 1542∼1609) 모자, 백 광훈(白 光勳, 1537-1582), 백 진남(白 振南, 1564-1618) 부자, 이 산해(李 山海, 1539-1609), 이 경전(李 慶全, 1567-1644) 부자가 유명하였다. 장 필의 대자 광초는 김 구(金 絿, 1488-1534)가 특별하고, 김 인후(金 麟厚, 1510-1560)는 천자문을 광초로 썼다. 김 구(金 絿, 1488-1534), 양 사언(楊 士彦, 1517-1584)ㆍ황 기로(1521-?) 등이 대자 광초를 유행시켰다.

해서와 행서에 있어서 조맹부체의 유행은 인쇄활자의 서체에 있어서도 영향이 컸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이 조맹부체를 선호 하였고 수집ㆍ인출하여 서체의 보급에 앞장서 조맹부체를 대중화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왕명으로 조맹부의 진필을 여러 차례 수집하여 간행하였는데, 태종(太宗)은 대소신료들에게 왕명으로 각도에 소재한 사사(寺社)의 비명을 탁본하여 서법으로 삼고자 모인(摹印)하여 바치게 하였다. 세종은 조맹부의 글씨로 새겨 인쇄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종친과 여러 신하에게 하사하였고, 문종 4년에는 안평대군이 〈역대제왕명현집(歷代帝王明賢集)〉이란 고첩과 〈왕희지행초(王羲之行草)〉ㆍ〈조자앙진초천자문(趙子昻眞草千字文)〉 등의 서법판본을 바치니, 교서관에 명하여 사람들이 모인(摹印)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세조는 주자소(鑄字所)ㆍ교서관(校書館)ㆍ승정원(承政院)ㆍ예조(禮曹) 등에 명하여 성균관의 학생들과 일반인에 이르기 까지 조맹부의 글씨를 자본으로 삼아 학습하게 하였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세조는 어느 왕보다도 수집과 인출을 많이 하여 조맹부의 대중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궁중의 내외가 모두 이런 시류에 합류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기록문화에 조맹부체의 유행을 가져왔다.

인쇄의 활자체에 있어서도 1434년 갑인자(甲寅字)를 시작으로 1684년 운각자(芸閣字)가 출현하기 전까지 조맹부서법이 지배적이다. 갑인자는 위부인자(衛夫人字)라고도 하는데 경자자(庚子字)가 너무 작고 조밀하므로 보기 어렵다 하여 대군들의 요청으로 활자를 새로 주조하였으며, 명초의 판본인 〈효순사실(孝順事實)〉ㆍ〈위선음즐(爲善陰騭)〉ㆍ〈논어〉 등의 서적을 자범(字範)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쓰게 하였고, 김돈(金墩)ㆍ이천(李蕆)ㆍ김빈(金鑌)ㆍ장영실(蔣英實)ㆍ이세형(李世衡)ㆍ정척(鄭陟)ㆍ이순지(李純之) 등에게 명하여 두 달 동안에 활자 20여만 자를 주조하였다. 이 활자가 조선 활자사상에 있어 중추라 할 수 있는 갑인자이다. 특히 갑인자는 왕희지와 조맹부의 서체로 아름답고 인쇄가 깨끗하여 여덟 번이나 개주하여 사용된 글자인데, 강희안의 글씨인 을해자와 함께 조맹부체의 유행에 큰 역할을 하였다.

문서는 역사서적ㆍ문집ㆍ의궤 등의 서적류와 추안(推案)ㆍ국안(鞠案) 등의 재판관계서류, 기부(記簿)ㆍ장부(帳簿) 등의 상업관계문서 등을 비롯하여 관청 및 국가 간에 오가던 관문서(官文書)ㆍ공문서(公文書)ㆍ사대문서(事大文書)ㆍ교린문서(交隣文書) 등과, 개인 간의 토지ㆍ노비ㆍ가옥매매ㆍ재산상속과 전곡차용(錢穀借用) 때 사용된 문권(文券)ㆍ문기(文記) 등의 모든 문서가 포함된다. 문서는 원본ㆍ초본ㆍ사본(寫本) 등의 세 가지가 있다. 원본은 하나만 작성되는 단문서(單文書)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왕의 교서(敎書)ㆍ윤음(綸音)과 관청의 방(榜)이나 재산분배를 위한 화회문기(和會文記) 등은 2통 이상 작성된다. 이들의 기록은 대부분 사자관(寫字官)이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의 기록문화도 금석문에 많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지배층들은 유교의 윤리적 가치관에 입각해서 조상에 대한 숭모정신으로 일정한 격식에 따라 묘비를 건립하였다. 특히 사대부들은 묘비의 입석행위가 선조의 덕을 밝히고 현양하는 행위로 보았으며 동시에 예의 실천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조상의 사적을 비에 새김으로써 가문의 빛남을 자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재물을 써서 당대의 저명한 문장가에게 청하여 비문을 짓고 이름난 서예가의 글씨를 받아서 화려한 비를 세웠다. 이렇게 최대의 공을 들여서 세운 석비는 대부분 당시의 귀중한 역사ㆍ문화를 담고 있으며, 특히 문학ㆍ문자학ㆍ서예ㆍ조각 등의 종합적인 사료가 된다. 석비의 구조나 형식은 조각에, 서체와 문양은 서예ㆍ회화ㆍ조각 등에 많은 미술사적 연구 자료를 제공한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석비의 두전을 통하여 당시 전서의 기록문화를 조망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석비의 표제의 양식과 자체와 서체별로 양상이 다른 유행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전서는 석비의 두전과 인장에 많이 남아 전한다. 석비표제양식의 자체(字體)는 전서(篆書)가 대부분이다. 전서는 대전과 소전으로 나누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해서(楷書)와 팔분(八分)도 많이 사용되었고, 드물게는 행서(行書)로 쓰여 진 두전도 있다. 특이한 경우는 해서와 전서를 같이 사용하여 알아보기 쉽게 한 예도 있다. 각법에 있어서는 양각, 음각을 기본으로, 음양각, 음평각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음각(陰刻)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는 새기는 어려움 때문으로 보인다.

전서의 종류는 매우 많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몇 종류로 나눈다. 38종의 전서체는 대개 계회도의 표제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두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유엽전(柳葉篆)과 전도전(剪刀篆), 옥근전(玉筋篆)과 현침전(懸針篆) 등은 두전에 사용되었으며, 특히 계회도나 인장에는 조전(鳥篆) 상방대전(上方大篆) 구서(龜書) 수서(穗書) 기자전(奇字篆) 지영전(芝英篆) 벽락전(碧落篆) 대전(大篆) 비백서(飛白書) 과두서(科斗書) 금착서(金錯書) 조적서(鳥跡書) 고전(古篆) 유엽전(柳葉篆) 수서(殳書) 현판서(懸板書) 전숙전(轉宿篆) 옥근전(玉筋篆) 도해전(倒瀣篆) 인서(麟書) 종정서(鐘鼎書) 용서(龍書) 곡두서(鵠頭書) 정소전(鼎小篆) 진새전(秦璽篆) 고정서(古鼎書) 현침전(懸針篆) 봉미서(鳳尾書) 용조전(龍爪篆) 수운서(垂雲書) 각부서(刻符書) 전도전(剪刀篆) 소전(小篆) 수로전(垂露篆) 영락전(纓絡篆) 태극전(太極篆) 분서(墳書) 조충전(雕蟲篆) 등의 서체가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전서의 참고서로는 몇 종류가 있는데 불과하다. 신여탁(申汝擢)의 『전운(篆韻)』, 전자관(篆字官) 경유겸(景惟謙)의 『전자편람(篆字便覽)』, 주지번(朱之蕃)의 『전결』 등이 있다. 그리고 김진흥(金振興, 1621~?)의 『전대학(篆大學)』ㆍ『전자운서(篆字韻書)』ㆍ『동명(東銘)』 등은 고전 38체로 자체도안의 집대성이다. 이러한 참고서들은 당시 전서의 전범으로 석비의 두전, 계회도의 화제, 서책표제, 인장 등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자서들은 당시 전서의 전범이 되었으며, 그가 쓴 책으로 『대학장구(大學章句)』ㆍ『전해심경(篆海心鏡)』 등이 있다.

참고문헌

손환일, 2008, 百濟의 文字生活과 木簡 分類, 百濟木簡, 국립부여박물관

손환일, 2009, 高麗 末 朝鮮 初의 趙孟부體, 학연문화사

손환일, 2009, 韓國 古代木簡의 서식과 書體 고대의 목간 그리고 산성,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손환일, 2011, 한국고대의 문자생활, 국립중앙박물관, 한국 고대 문자전

손환일, 2011, 한국서예문화의 역사, 국사편찬위원회

박병천, 1983, 한글궁체연구, 서울, 일지사

이철경, ‘한글서예의 어제와 오늘’ 목화(木花) 6호(동덕여대 : 1977)

박병천, 윤양희, 김세호, 1994, 조선시대 한글서예, 예술의 전당

김일근, 1986, 언간의 연구, 건국대학교 출판부

김일근, 1972, 이조어필언간집, 경인문화사

김정수, 1990, 한글의 역사와 미래, 열화당

문화체육부, 1990, 아름다운 한글글자체 600년전 도록,(박병천외 6인 집필)

문화체육부, 1993, 한글서예큰잔치 도록

박병천, 2000, 한글판본체연구, 일지사

박병천, 2007, 한글서간체연구, 도서출판 다운샘

예술의 전당, 1991, 한글서예변천전, 예술의 전당

예술의 전당(박병천,윤양희, 김세호), 1994, 조선시대 한글서예

예술의 전당, 2003, 조선왕조어필 도록, 예술의 전당

이기대, 2007, 명성황후 한글편지, 도서출판 다운샘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