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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우리 문화와 예술에 관련된 수많은 주제들이 언급되고 있으나 대부분 시대별로 간략히 서술되어 그 개념과 변천 과정, 성격 등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영상 문화·예술이야기>는 한국사 속 문화·예술 분야의 주요 주제별로 그 흐름과 변천 과정, 특징과 성격 등을 전문가의 해설을 기반으로 동영상 자료로 제작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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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여기 죽은 자를 심판하는 열 명의 왕을 묘사한 그림, 〈시왕도〉가 있습니다. 불교의 저승관에서는 인간이 저승사자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3년여에 걸쳐 열 명의 왕, 시왕에게 차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망자는 시왕을 만나기 전에 먼저 저승사자와 만납니다. 저승사자는 두 귀가 쫑긋 솟은 모자를 쓰고 편하게 바지를 묶은 차림에 빠른 속도로 저승까지 함께 가기 위해 말도 한 필 대동하고 있죠. 현대의 우리가 상상하는 저승사자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입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저승사자와 사후 세계는 〈시왕도〉나 〈사자도〉를 통해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요, 이렇게 〈시왕도〉나 〈사자도〉처럼 불교의 세계관을 표현한 그림을 불교회화, 불화라고 합니다. 불화는 사원을 장엄하는 용도뿐 아니라 심오하고 난해한 불교의 교리를 쉽게 전달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사찰의 벽면에 직접 그리는 벽화 형태의 불화가 많이 조성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불단의 벽에 그림을 거는 형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족자형이나 액자 형태의 불화를 뜻하는 ‘탱화’라는 명칭은 지금까지 불화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입니다.

삼단 탱화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사찰의 전각 내부 구성은 조선 후기에 정착된 것입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의 전쟁을 거치며 피해를 입은 사찰들은 재건과 복구의 과정을 겪게 되는데요, 당시 죽은 사람들을 천도하는 의식이 활발히 개최되며 사찰이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도록 변화합니다. 전각의 외부뿐 아니라 전각 내부 또한 의식이 개최되는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불화는 의식의 주요한 매체로 활용됩니다. 불화는 봉안되는 주제와 위계에 따라 상단탱, 중단탱, 하단탱 등 삼단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중심 전각은 삼단의식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중심 전각은 삼단의식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전각의 상단에 모셔진 상단탱은 불상 뒤에 거는 불화라는 의미로 후불화, 후불탱으로 불렸습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상단탱은 봉안되는 전각과 그곳에 모셔진 불상과의 관계로 주제가 정해지는데요.

대웅전에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는 〈영산회상도〉를 걸었다면, 극락전에는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하는 〈아미타불회도〉가 걸립니다. 중단불화, 즉 중단탱은 전각의 동벽 또는 서벽에 걸리는데요, 전각 내에서 행해진 실질적인 의식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삼장보살도〉와 같이 수륙재가 열릴 때 청하는 신들을 그리게 된 것부터, 사후에 받아야 할 죗값을 미리 갚는 예수재로에서 유래한 〈지장시왕도〉, 일상의례에서 불교의 여러 신들에게 공양하는 〈신중도〉가 중단탱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신중도의 인기는 매우 높아 전국의 사찰에 걸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조성되었습니다.

하단불화, 즉 하단탱은 상단과 중단에 받들었던 공덕이 하단을 통해 영혼이 해탈되어 마무리되는 과정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감로도가 봉안되었습니다.

괘불 탱화

일반적으로 불교의 의식과 법회는 중심 전각을 중심으로 개최되는데요, 그 규모가 커질 경우 전각의 외부까지 확장됩니다. 흔히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모습이란 뜻으로 쓰이는 ‘야단법석’이란 표현이 바로 이 야외 법회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야외 법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만큼 대형 불화를 걸게 되는데 이를 괘불, 괘불탱이라고 합니다. 괘불은 대체로 10m에 달하는 큰 규모로 조성되었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괘불은 120여 점으로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22년에 제작된 죽림사 〈세존괘불탱〉입니다. 결가부좌를 한 석가모니가 금빛 광배를 배경으로 오색구름에 휩싸여 있는 모습이 장엄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공주 마곡사 〈석가모니 괘불〉은 높이 11미터에 이르는데, 이 거대한 크기는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화려한 보관을 쓰고 연꽃을 든 석가모니불과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인 34명의 인물이 가득 채워진 마곡사 괘불은 모란이 어우러진 광배와 밝고 부드러운 색감, 유려한 필선의 형태 묘사로 17세기 후반기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힙니다.

탱화와 화승

불화는 한 명의 손에 의해 그려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게는 두세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의 화가가 참여하여 분업적으로 그려나갔습니다. 조선 후기 불화는 대부분 승려들이 제작을 전담하였는데 이들을 화승이라 불렀습니다.

화승은 수행하는 승려이자 뛰어난 예술가로서, 조선시대 불교 예술을 꽃피운 주역들입니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큰 사찰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불사(佛事)에 초대되어 불화를 제작했습니다. 남장사의 〈십육나한도〉와 같이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활동하던 화승이 경상도에 내려가서 그곳 화승들과 협업하여 불화를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십육나한도〉는 얼핏 비슷한 그림으로 보이지만 배경을 이루는 나무나 나한 주변에 있는 소품에서 서울과 지방 양식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불화를 조성할 때는 가장 출중한 수화승이 여러 화승을 지휘했습니다. 수화승은 금어, 또는 도화사라고 부릅니다.

화승들의 삶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 수화승들이 남긴 자화상을 통해 그들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불교화단에 서양 화법인 음영을 사용하여 새로운 화풍을 일으킨 수화승 축연은 승려의 초상을 그리면서 자신의 서명을 그림 속에 살짝 써 놓았으며 조선 말기 대표적인 수화승인 석옹 철유는 드물게 자신의 자화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불화의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출초라고 하는데요. 출초된 초본을 바탕으로 채색하여 불화를 완성합니다. 이처럼 화승들은 먼저 그린 초본을 사용하거나 선배 화승들의 초본을 모본 삼아 다시 밑그림을 그려 사용하였습니다. 이로써 불화의 양식이 지속적으로 계승될 수 있었습니다.

[에필로그]

이제 다시 저승사자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저승사자에 의해 끌려온 망자는 제5대 대왕인 염라대왕 앞에 서게 됩니다. 염라대왕청에는 망자가 생전에 지은 죄를 비춰 볼 수 있는 업경이 있습니다. 머리채를 잡힌 망자를 거울 앞에 데려가니 도끼를 들고 있는 인물과 소가 비춰집니다. 그에게 살아있는 생명을 죽인 살생의 죄업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공포스러운 지옥과 극락을 함께 표현해놓은 〈시왕도〉의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살면서 선을 베풀고 악을 행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을 것입니다. 불화는 이렇게 신앙 또는 의식의 대상이 되지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인간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불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을 되돌아보는 거울과 같은 그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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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국사편찬위원회
제작 : 스튜디오 바카
자문 : 유경희
검수 : 김정희, 명재림, 서명원
수어통역 : 최황순
촬영·자료 협조: 국립무형유산원,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불교조계종 흥국사(고양), 대한불교조계종 흥국사(여수), 문화재청 문화유산포털, 불교중앙박물관, 성보문화재연구원, 직지성보박물관

해설

2016년 또는 (몇 년 전) 방영되었던 드라마 ‘도깨비’를 기억하시나요? 드라마 속 검은 코트와 검은 모자를 썼던 잘생긴 그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마중하러 오는 저승사자입니다. 사자는 명부(名簿)에 적힌 이름과 그 순간 세상을 떠난 사람을 확인하고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여행을 이끌게 됩니다. 더 오래 전인 기억속의 ‘전설의 고향’에서도 저승사자를 그린 적이 있었습니다. 검은 도포를 검은 갓을 쓴 저승사자는 흰 얼굴에 검은색 입술로 핏기하나 없이 묘사됩니다. 망자(亡者)를 데리고 그가 살아생전 지은 죄를 심판받기 위해 어디론가 데려갑니다. 1970년대와 2000년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근거와 방식으로 저승사자를 그렸던 걸까요? 그리고 더 오래 전,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저승사자를 생각했을까요?

여기 명부(冥府)의 세계에서 망자를 심판하는 열명의 왕을 그린 시왕도(十王圖)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승에서 명부의 세계로 죽은 자를 데려간다는 저승사자도 있습니다. 지금의 생각과는 달리 사자는 검은 도포나 검은 모자가 아닌 두 귀가 쫑긋 솟은 모자를 쓰고 망자와의 먼 여정을 편하게 갈 수 있도록 바지를 묶은 아주 편한 차림입니다. 그의 뒤쪽에는 빠른 속도로 저승이 세계까지 함께 할 말이 대동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왕도와 사자도처럼 불교의 세계관을 나타난 그림을 크게 불교회화, 줄여서 불화라고 부릅니다. 불교회화는 부처의 말씀이나 불교의 세계관을 그림으로 담은 종교화입니다. 불교의 세계를 깊이 알기 어려운 일반인들에게 심오하고 난해한 불교 교리를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마도 경전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보다 시각화하여 이를테면 멋진 도깨비나 전설의 고향을 통해 보여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듯 전통시대였던 조선시대에는 드마라와 영화가 아직 나오기 전이었습니다. 다행이 불교의 세계관이 구현된 사찰에 가면 불화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저승사자와 지옥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 불교의 수용과 함께 조성되기 시작한 불화는 신앙생활의 방편으로서 뿐 아니라 사원의 예배, 그리고 장엄을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삼국시대 이래 수많은 작품들이 조성되었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대부분 고려 후기 이후의 것들이며, 그 중에서도 조선 후기의 불화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사찰의 벽면에 그리는 벽화(壁畫)보다 전각의 후불벽(後佛壁) 등에 거는 탱화(幀畫)의 형태로 조성되었기에‘탱화’라는 용어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거는 불화인 탱화에서부터 벽에 그린 벽화, 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사경(寫經), 그리고 전각의 외관을 채색한 단청에 이르기까지 좁은 의미에서부터 넓은 범주에 이르기 까지 불화의 범위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정유재란의 피해를 입은 사찰의 중건사업이 이루어지면서 불화제작도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이 시기 불화의 제작에는 일반 서민(庶民), 승려들이 시주, 발원자로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불교의식집이 간행되면서 사찰의 구성형식이 상단(上壇), 중단(中壇), 하단(下壇)의 삼단신앙으로 확립되었으며 이에 따라 불화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에 따라 주불전(主佛殿)에는 삼단신앙에 의해 상단에는 석가모니불도(釋迦牟尼佛圖),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약사불도(藥師佛圖), 삼세불화(三世佛圖) 등이 걸렸고, 중단에는 삼장보살도 (三藏菩薩圖)및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신중도(神衆圖) 등이, 하단에는 영가천도를 위한 감로도(甘露圖)가 봉안되었습니다. 불화의 조성배경과 주제, 시주자 등을 기록하는 화기(畫記)에 영산회상도, 관음보살도 대신에 상단탱화 또는 중단탱화라고 기록한 것에서도 불화가 의식과 깊은 관련을 갖고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주전각 이외의 명부전, 관음전 등의 전각에도 관련 신앙에 따라 그에 맞는 불화가 봉안됩니다. 의식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불화로는 괘불(掛佛)을 들 수 있습니다.

괘불은 전각 내부에 봉안되는 불화와 달리 전각 외부라는 야외의식에서 걸리는 대형불화입니다. 규모가 작은 세로 4~5m 정도의 작은 화폭에 그려진 예도 있으나 대부분 10m가 넘는 대형 화폭에 조성되었습니다. 평소에는 함에 넣어 전각 내부에 보관하다가 의식이 있는 날, 아침 중정(中庭)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괘불은 의식의 규모가 커서 전각 내부에 신도를 수용할 수 없거나 야외에서 개최해야 할 성격을 지닌 불교의식에서 괘불을 걸고 의식을 진행하였습니다. 괘불은 불·보살에 대한 공양의식에서 출발하여 점차 영산회(靈山會)와 밀접한 의식을 갖고 전개되었습니다. ‘영산회’란 석가모니가 『법화경(法華經)』을 설했던 인도의 기사굴산의 설법모임으로, 영산회상을 재현한 불화라는 의미와 영산회 의식에 걸리는 괘불화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지닙니다. 영산회는 여러 종류의 의식 앞에 행하는 재전(齋前) 작법(作法)으로 오랜 가뭄 끝에 비를 청하는 기우재(祈雨齋), 죽어서 갚아야 할 생전의 업을 미리 갚는 예수재(豫修齋)에서 본격적인 의식이 개최되기 전 불보살에 바치는 권공을 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현존하는 괘불 중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예는 1622년의 〈죽림사 괘불〉을 필두로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100여 점이 알려져 있습니다. 현존하는 괘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후 대규모 천도의식(遷度儀式)이 활발히 개최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괘불은 야외의식을 위한 전용 불화가 필요했던 조선 후기 불교신앙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조선 후기 불화는 대부분 승려들이 불화의 제작을 전담하였습니다. 불화의 제작은 맡은 승려는 일반적으로 화승(畫僧)이라 하는데 그들은 승려 본연의 수행을 닦고 경전을 읽는 것에서부터 불사(佛事)를 맡아 불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혼자서 작업하기 보다 적게는 2~3명, 많게는 수십 명에 이르기까지 공동작업을 통해 불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한편 조선 초기에는 도화서(圖畫署) 화원들이 불화의 조성을 맡는 경우도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화승들이 대다수의 불화를 조성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불화에는 화기란을 마련하여 탱화의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의 이름을 기록했기 때문에 많은 화승들의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 화승들은 금어(金魚) 또는 도화사(都畫師)라고 불리는 수화승(首畫僧)의 지휘에 따라 분업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들에 의해 각 지역마다 독특한 양식을 형성하면서 불화양식을 주도해 갔습니다.

다시 저승사자로 돌아갑니다. 저승사자에 의해 끌려온 망자는 명부의 세계를 주관하는 제 1대왕 앞에 서게 됩니다. 의자위에는 푹신한 짐승털이 덮인 의자에 앉아 관을 쓰고 홀을 든 진광대왕이 심판을 주관합니다. 진광대왕의 앞에 높인 금빛 업경대에는 망자의 생전에 지은 죄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화면의 아래쪽에는 그가 주관하는 지옥의 모습도 그려지는데요. 무시무시한 칼산 위에 꽃힌 죄인들은 뱀이 칭칭 감싸고 있습니다. 벌어진 큰 입을 한 옥졸의 두 손에는 다시 칼산으로 던져질 죄인이 들려있습니다. 그리고 성벽의 앞쪽에는 곧 지옥세계를 대기하는 포승줄에 묶인 사람도 있습니다. 형장의 도구들은 불화제작자의 상상이 일궈낸 기상천외한 것들이지만 화가의 사고가 일상생활의 범위를 넘지 못하는 한 당시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지옥의 장면은 더욱 현실성을 얻게 됩니다. 지옥에서 강조된 공포감은 그 탈출구를 미리 화면에 설정해 놓음으로써 절대적 공포를 넘어 가능한 불성(佛性)을 현실로서 일깨우고 있습니다. 결국 불화를 통해 표현된 지옥과 극락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항시 느낄 수 있는 공포와 희열과 같은 감정의 대극적 개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도록

  • 국립중앙박물관 편, 2003, 『영혼의 여정』, 국립중앙박물관
  • 국립중앙박물관 편, 2014, 『한미산 흥국사 괘불』, 국립중앙박물관
  • 국립중앙박물관 편, 2021, 『조선의 승려장인』, 국립중앙박물관

단행본

  • 김정희, 2009, 『불화: 찬란한 불교 미술의 세계』, 돌베개
  • 김정희, 2020, 『조선왕실의 불교미술』, 세창문화사
  • 문명대, 1990, 『한국의 불화』, 열화당
  • 문명대, 2021, 『한국불교회화사』, 다할미디어
  • 박은경, 2008, 『조선 전기 불화 연구』, 시공사

논문

  • 정명희, 2013, 「조선시대 불교의식의 삼단의례와 불화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