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는 쿠데타 직후부터 농업 증산에 큰 관심을 가졌다. 당시 심각했던 식량 부족 문제는 무엇보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였을 뿐만 아니라, 빈곤의 극복은 5·16 군사 쿠데타의 중요한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농업 생산량은 점진적으로 증가하였다. 비료 공장들이 속속 가동되면서 비료 공급이 확대되고, 경지와 수리 시설 등이 큰 폭으로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증산은 품종의 변화보다는 주로 생산 요소 투입의 합리화 및 영농 지도 체제의 정비를 통하여 거둔 성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경제 규모가 팽창하면서 쌀은 오히려 더 부족해졌다.
-
농업 증산 요원 농사 교육
농사 교육을 마친 농업 증산 요원들. 전남 화순군 북면 한광희 씨 소장
-
증산 교육
고령군 우곡면 대곡리의 증산 및 농사 소득 증대 교육 광경이다. 고령군 새마을 지회 소장(1969년)
-
‘증산·수출·건설’이라는 표어가 걸린 순천역
1966년의 순천역이다. 수출, 건설과 함께 증산은 박정희 정부의 주요 과제였다. 전남 화순군 북면 한광희 씨 소장
-
1967년 화순의 어느 면사무소
‘들에는 증산, 산에는 개간, 집에서 양잠’이라는 슬로건이 걸려 있다. 화순군 동복면 문제선 씨 소장
-
지하수를 농업 용수로 이용하기 위해 판 관정
고령군 우곡면 야정2동 부강 마을의 관정에 부면장이 현지 지도차 방문해 있다. 양수기 보급과 수리 시설의 개선은 1960년대 식량 증산의 배경이 되었다. 고령군 새마을 지회 소장(1969년)
-
관정에 넣을 돌을 운반하는 광경
고령군 우곡면 야정2동 부강 마을. 고령군 새마을 지회 소장(1969년)
-
고령군 쌍림면 매촌동 지하수 개발
경북 고령군 쌍림 면사무소 소장(1969년)
-
하계 농민 대학 양계과 수료 기념
새로운 영농법은 가난을 극복하려는 젊은 농군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전남 화순군 이서면 김상운 씨 소장(1970년)
-
고령군 쌍림면 신촌동 퇴비 증설 작업
화학 비료가 부족했던 시절, 마른 풀을 썩혀 만든 자연 비료인 ‘퇴비’의 생산은 정부가 농민들을 독려했던 주요 증산 정책이었다. 퇴비를 쌓아 둔 퇴비장에 ‘집집마다 퇴비 증산, 들판마다 식량 증산’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 전해균 씨 소장(1970년대)
-
정돈된 퇴비장
앞의 것과 같은 고령군 쌍림면 신촌동의 퇴비 증설 작업. 전해균 씨 소장(1970년대)
-
퇴비 재료가 될 풀들
‘반당 25**씩 넣어 식량 자급 지속하자!’라는 구호가 보인다. 이 풀들을 거름과 함께 썩혀 천연 비료인 퇴비를 만들게 된다. 경북 고령군 쌍림면 신촌동 전해균 씨 소장(1970년대)
-
고령군 쌍림면 마을 금고 교육
증대된 소득이 저축으로 이어지도록 증산과 저축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강조되었다. 경북 고령군 쌍림 면사무소 소장(197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