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의 표어와 슬로건은 그 시대 국가의 주민 동원 이데올로기를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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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의 슬로건 ’재건’
쿠데타 직후 추진된 재건 국민 운동은 새마을 운동의 직접적 전사였다. 쿠데타에 대한 관심을 국민 자신의 문제로 돌리고 정치에 대한 욕망을 생활 개선 운동으로 전환시켰다. 전남 화순군 북면 한광희 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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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의 슬로건 ’건설’과 ’혁명’
전라남도 산업 교육원 제1기 전문 축산반 교육생 일동.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동 오덕열 씨 소장(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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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은 ’일하는 해(1)’
북 면사무소 앞에서. ‘우리는 모두 박정희 대통령을 본받자.’라고 외치는 듯 공무원의 검은 선글라스 착용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전남 화순군 북면 한광희 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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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은 ’일하는 해(2)’
북 면사무소 앞에서. 전남 화순군 북면 한광희 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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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의 슬로건 ’증산’, ’수출’, ’건설’
화순 경찰서 동복 지서 앞에서. 전남 화순군 동복면 오재찬 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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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은 ’더 일하는 해’
북 면사무소 앞에서. 전남 화순군 북면 한광희 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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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의 슬로건 ’세입 증대’와 ’저축 증강’
‘세입 증대로 내 고장 건설하자.‘, ’저축 증강으로 자립 경제 확립하자.’라는 표어가 두 기둥에 적혀 있다. 화순군 이서 면사무소. 전남 화순군 북면 한광희 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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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은 ’전진의 해’
화순 용곡리 1구 사무소의 광경이다. ‘그늘 밑에 노는 사람 쌀독이나 들여다보소.’라는 표어에는 아랑곳없이 청년들의 모습은 여유만만이다. 전남 화순군 북면 한광희 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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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의 슬로건
연초 순시차 방문한 군수의 뒤로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건설하자.’라는 표어가 걸려 있다. 고령군 새마을 지회 소장(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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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의 슬로건 ’근면 협동’
이 시기에는 ‘근면 협동’이 슬로건으로 등장하였다. 멀리 ‘한 번 실패는 해도 두 번 실패해서는 안 된다.’라는 구호는 무엇을 말하는지 아리송하다. 전남 화순군 이서면 김상운 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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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의 슬로건 ’중단 없는 전진’
1960년대 말의 경제 위기를 중화학 공업화로 극복하려는 국면에서 나온 슬로건이다. 또한 4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힘겹게 삼선에 성공한 시점이기도 하다. 전남 화순군 북면 한광희 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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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은 ’총력 안보의 해’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말 국가 비상 사태를 선언하고 총력 안보 태세의 확립을 강조하면서 1972년을 ‘총력 안보의 해’로 정했다. 이는 10월 유신 선포의 전초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전남 화순군 이서면 김상운 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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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의 슬로건 ‘새마을 정신’
1970년에 시작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 전면적인 새마을 운동으로 확대·발전된 시기로, 전라남도 새마을 지도자 학교에서는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첫 새마을 교육이 시작되었다.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김노석 씨 소장(19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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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은 ‘유신 이념 구현의 해’
새마을 운동은 곧바로 10월 유신과 결합되어 유신의 실천 도장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전남 화순군 북면 한광희 씨 소장(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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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의 슬로건 ’새마을’과 ’유신’
새마을 교육을 받은 공무원들은 전원 유신 이념 구현에 앞장서기로 했다. 전남 화순군 북면 한광희 씨 소장(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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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화순 새마을 운동 현장의 벽보
새마을 다리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의심 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라는 표어이다. 1970년대의 안보 태세 강조는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던 농촌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7·4 남북 공동 성명 직후에 선포된 유신 헌법은 통일을 위해서는 안보가 더욱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전남 화순군 남면 민동기 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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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의 슬로건 ’방첩’과 ’멸공’
동북 면민 멸공 궐기 대회. 전남 화순군 동복면 오재찬 씨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