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 운동 시기 농민들의 실질 소득을 뒷받침한 것은 통일벼와 증산 체제였다. 1974년 통일벼 재배 면적의 확대와 증산 분량의 정부 수매 체제는 1970년대 농민들의 실질 소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기반이었다. 통일벼는 일반 벼에 비해서 수확량이 많았던 반면, 밥맛이 좋지 않아 소비자들이 선호하지 않았으므로 농민들은 재배를 기피하였다. 식량 증산에 박차를 가하던 정부에서는 통일벼 재배 면적의 확대를 강요하는 한편, 생산된 전량을 높은 가격에 수매함으로써 재배 면적의 확대를 유도하였다. 통일벼는 1960년대 중반 서울 대학교 농학 대학 허문회 교수가 필리핀의 국제 미작 연구소(IRRI)에서 개발한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교잡한, 생산성이 높고 한국의 병충해에 강한 새 벼 ‘IR667(이후 ‘통일’로 명명)’이었다. 1960년대 말 국내에 정식으로 도입되어 실용화를 목표로 육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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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벼 못자리 작업
한 농민의 통일벼 못자리 작업 광경으로, 오른쪽으로는 다 자란 보리 이삭이 보인다. 광주 광산군 평동 이태백 씨 소장(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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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모내기 작업
고령군 쌍림면 월막동 공동 모내기 작업. 경북 고령군 쌍림면 전해균 씨 소장(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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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 화암2동의 통일벼 모내기 작업
고령군 새마을 지회 소장(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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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 우곡면 한해 대책 노력 봉사대
고령군 우곡면에 지원 나온 인력들의 모내기 작업. 멀리 ‘한해 대책 노력 봉사대’라는 깃발이 보인다. 젊은 층이 떠나자 농촌은 심각한 일꾼 부족 문제를 겪었으며 이에 대한 사회적 지원 체계가 요구되었다. 고령군 새마을 지회 소장(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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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의 모내기 지도
고령군 우곡면 야정2동 부강 마을에 면 직원과 지서 직원이 나와 4점식 모내기를 지도하고 있다. 통일벼는 농민들이 그때까지 접해 보지 못한 신품종이었다. 냉해에 약하고 비료 주기가 중요했기 때문에 통일벼 재배의 확대는 영농법에 대한 관공서의 개입을 강화시켰다. 고령군 새마을 지회 소장(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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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 한다리들 본답 병충해 방제 공동 작업(1)
고령군 새마을 지회 소장(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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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 한다리들 본답 병충해 방제 공동 작업(2)
통일벼는 병충해에 강한 품종으로 개발되었지만 재배 면적이 늘어나고 단작화가 진행되면서 신종 도열병의 급습을 받게 된다. 고령군 새마을 지회 소장(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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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방제 작업(1)
고령군 쌍림면 고곡동의 공동 방제 작업. 고령군 쌍림 면사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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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방제 작업(2)
고령군 쌍림면 고곡동의 공동 방제 작업. 농약 사용이 급격히 늘면서 농약 피해 사고도 속출하였다. 고령군 쌍림 면사무소 소장(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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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양곡 보관 창고
전남 화순군 동복면 김형채 씨 소장(197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