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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농촌생활과 새마을운동 사진 아카이브

공동체

새마을 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마을’ 운동이라는 것에 있었다. 만일 시멘트가 개인이나 면·군에 보내졌다면 농민들은 과연 어느 정도의 응집력으로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을까. 새마을 운동이 아니라 ‘새농민 운동’이나 ‘새면 운동’ 혹은 ‘새군 운동’이었으면 어떠했을까. 새마을 운동이 농민들의 자발성을 이끌어 낸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마을’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농촌에서의 마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통 시대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주거 공간인 마을은 생활 공동체이자 운명 공동체로 기능하였고, 1970년 무렵에도 이러한 공동의 정체성은 비교적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농촌의 마을 공동체는 새마을 운동의 가장 중요한 동원 기반이었다.

  • 화순 길성리 농악팀. 화순 길성리 농악팀.

    농악은 풍물·두레·풍장·굿이라고도 하며 농촌에서 집단 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이다. 농촌 마을의 공동 노동 관행인 두레는 1960년대 중반까지도 남아 있었지만 이촌 향도 현상이 심화되면서 노동력 부족으로 사라지게 된다. 1970년대에 이르면 농번기에 일꾼을 구하기 어려워졌으며 일꾼에게 비싼 품삯을 지불해야 했다. 전남 화순군 북면 개인 소장(1965년)

  • 리민 위안의 밤 리민 위안의 밤

    근대화된 마을 축제의 모습으로, 마을 청년들이 분장을 하고 주민들을 모아 연극을 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아직 농촌에도 청년들이 많이 남아 있어 마을 공동체도 굳건해 보인다. 전남 화순군 북면 개인 소장(1964년)

  • 동복 만경대 뱃놀이 동복 만경대 뱃놀이

    마을 남성들의 야유회는 빈번하였지만 여성들의 참여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 새마을 운동 이전의 마을 놀이 문화였다. 전남 화순군 동복면 오재찬 씨 소장(1960년)

  • 동복면 이장 일동 동복면 이장 일동

    군사 쿠데타 직후 이장의 나이는 점점 젊어지기 시작했다. 행정 업무가 그만큼 많고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근대 교육을 받고 군 복무를 마친 마을 청년들이 이장이 되어 외풍으로부터 마을을 방어하는 경향을 보였다. 청년 이장의 등장은 국가 행정 기관의 요구인 동시에 마을의 자발적 대응 과정이었다. 전남 화순군 동복면 김형채 씨 소장(1963년)

  • 이장의 책임과 권리 이장의 책임과 권리

    1970년대까지 마을 이장은 모든 주민들의 도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장은 주민들을 대신해서 수고하는 존재인 동시에 임의로 많은 일들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 역시 막강했다. 고령군 쌍림면 매촌동 마을 주민 협의회 장면. 쌍림 면사무소 소장(196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