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보는 한국사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1. 고조선의 건국 신화에 나타난 역사상

2) 단군 신화를 이해하는 몇 가지 논점들

▣ 단군 신화의 형성 시기

단군 신화가 기록으로서 전해진 것은 일연의 『삼국유사』가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그 후 조선 시대에도 『응제시주』와 같이 단군 신화에 대하여 여러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은 단군 신화의 내용들이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하여, 고조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단군왕검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단군과 고조선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견해는 20세기 들어 일제 관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논거는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단군 신화가 실려 있는 가장 오래 된 기록인 『삼국유사』는 13세기에 씌어진 것으로, 고조선은 기원전 2세기경에 멸망하였으니 그 시간적 차이가 무려 1500여 년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단군 신화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군 신화에 등장하는 환인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산스크리트 어의 '제환인타라(提桓因陀羅:천제(天帝))’에서 차용한 말로서 4세기 이후 불교가 수용된 이후에나 나타날 수 있는 용어라는 점, 그리고 풍백⋅우사⋅운사 등도 도교적인 용어로서 고조선 시대의 신화에 들어갈 수 없는 용어라는 점이 주된 논거였다. 그래서 단군 신화는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단군 신화의 존재가 『삼국유사』의 것보다 이른 시기의 자료에서도 확인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먼저 중국의 산동성 가상현(嘉祥縣)에 있는 무씨(武氏) 집안의 사당에 그려진 화상석의 일부 그림이 단군 신화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주장이다. 이 무씨 사당 벽화는 147년에 그려진 것으로, 이 견해가 옳다면 매우 이른 시기부터 단군 신화의 내용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더욱이 중국의 산동성 일대는 이른바 ‘동이족’의 거주지라는 주장과 결부되어 많은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무씨 사당 벽화가 중국 고대 신화의 주인공인 황제와 치우의 전투를 그린 것으로, 단군 신화와는 무관하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지금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무씨 사당 화상석
출처: 중앙일보

한편 5세기 중엽의 고구려 벽화 고분인 각저총 씨름도에도 단군 신화의 모티브를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어 주목을 받았다. 즉 많은 새가 앉아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곰과 호랑이의 형상이 서로 등을 지고 앉아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곰과 호랑이는 단군 신화에서 매우 중요한 모티브이다. 더욱이 우리 전통 신앙에서 솟대의 예와 같이 새는 하늘과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일종의 하늘의 전령자로 믿어지는 신앙을 고려한다면, 새가 깃들어 있는 커다란 나무는 일종의 신앙의 대상, 즉 단군 신화의 신단수로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이 각저총의 벽화는 단군 신화의 주요 모티브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다만 몇 개의 유사한 모티브만으로 이 벽화가 단군 신화와 연관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벽화 자료가 5세기경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적어도 단군 신화와 유사한 모티브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 퍼져 있었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각저총 씨름도
출처: 동북아 역사 재단 편, 『고구려 문명 기행』, 2007.

이와 같이 비록 『삼국유사』 이전의 기록에서 단군 신화의 존재가 확인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단군 신화를 고려 시대의 창작품으로 볼 수는 없다. 비록 현재 전하는 단군 신화 안에서 불교⋅도교적 용어 표현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후대에 이러한 용어를 통하여 윤색된 것으로 보아야지, 단군 신화 자체가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환인이라는 존재는 본래 하늘 신, 천신이라는 개념을 제석 신앙이 유행했던 고려 시대의 불교 용어로 바꾸어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풍백⋅우사⋅운사라는 용어도 농경 사회에서 당연히 숭배하기 마련인 바람 신⋅비 신⋅구름 신을 도교 용어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단군 신화가 언제 등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몇몇 후대적인 용어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단군 신화의 신화적 구조와 주요 모티브가 과연 어느 시기의 역사적 산물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단군 신화의 핵심은 하늘 신의 아들인 환웅이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고 많은 무리를 거느리며 세상일을 주관하다가, 웅녀와 결합하여 단군을 낳았고, 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건국의 시조가 하늘 신의 아들이라는 천손강림(天孫降臨)형 신화는 가까이는 주몽 신화나 박혁거세 설화, 수로왕 설화를 비롯하여 동북 아시아에 널리 분포하는 고대 국가들의 건국 신화이다.

그리고 짐승과 결합하여 건국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신화 역시 고대적인 사고방식의 하나로서, 특히 곰을 조상신으로 하는 토템 신앙은 시베리아 일대에 분포한 퉁구스 족과 고아시아 족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신앙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단군 신화는 동북 아시아 일대의 고대 신화 유형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며, 그런 점에서 단군 신화는 이 지역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로서 전혀 손색 없는 내용과 구성을 갖추고 있다 하겠다.

태백산 천제단
출처: 문화재청

다음 환웅(桓雄)이 하늘에서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그곳에 신시(神市)를 차렸다는 내용에서는 산악(山岳) 신앙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신단수는 인간으로 변신한 웅녀가 잉태하기를 기원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태백산과 신단수는 천상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만나는 접점이기도 하다. 이와 유사한 산악 신앙의 면모는 가락 왕국의 시조 김수로(金首露)가 구지봉(龜旨峰)에 내려왔다는 설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단군 신화의 태백산이나 김수로 설화의 구지봉은 하늘 신을 맞이하는 장소로서 종교 행사나 제천 행사가 베풀어지는 곳이라는 점에서 산악 신앙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의 산악 신앙은 시베리아나 일본의 신화에 나타나는 이른바 ‘우주 산’ 또는 ‘세계 산’이라는 면모와 연관 지어 볼 수 있다. 물론 단군 신화의 태백산이 세계와 우주의 중심이라는 측면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환인이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고 환웅에게 천부인을 주어 보내 환웅이 태백산 정상으로 내려왔다는 내용을 보면, 이 태백산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단군 신화에 보이는 산악 신앙 역시 고대 초기 신앙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면모로 볼 때 단군 신화는 고조선 당시에 형성되었던 건국 신화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고조선의 건국 시기

단군 신화가 고조선 당대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현재 전해지는 단군 신화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여기에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당시의 관념이나 이데올로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또 그것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후대적인 요소도 첨가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단군 신화의 내용을 통하여 고조선의 역사상을 파악하는 일은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을 검토하면서, 고조선 당대의 역사적 사실이나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관념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가장 논란이 되는 문제의 하나는 고조선의 건국 시기가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때, 즉 기원전 2333년이라는 기록이다. 과연 단군 신화의 내용대로 고조선은 이때 건국되었을까?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 역사학은 물론 고고학이나 인류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즉 농업 경제나 청동기 문화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발전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농업 경제는 그 지표를 찾기 어려우니, 고고 자료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는 청동기 문화의 발전 수준을 고려하면,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서 국가 형성의 조건을 갖출 정도의 청동기 문화 기반은, 대략 기원전 12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따라서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고조선의 국가 형성 역시 빨라야 기원전 12세기경으로 올려 볼 수밖에 없으니, 단군 신화의 기원전 2333년 개국 기년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후대의 관념적인 산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북한에서 단군 능을 발굴하였고, 그 고분에서 출토된 인골을 연대 측정한 결과 5천 년 전으로 것으로 확인되어, 이를 단군왕검의 능으로 확정하고 대대적인 복원 사업을 벌인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의 연대 측정은 신뢰할 수 없는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게다가 현재 북한에서 발굴했다는 단군 능은 고구려 시대의 돌칸흙무덤인 데다 그곳에서 출토된 금동관 역시 삼국 시대 양식이다. 이에 북한에서는 고조선의 단군 능을 고구려 시대에 새로 개장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가 많아진다. 왜냐하면 한번 개장을 거친 고분의 자료이기 때문에 연대 측정 자료로는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에서 단군 능을 발굴하였다는 주장은 신뢰성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이를 근거로 고조선과 단군의 개국 시기를 따져 볼 수는 없겠다.

그러면 단군 신화에서는 왜 중국의 요와 같은 때라고 하였을까? 중국의 요임금은 공자 이래 유교에서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숭배하던 인물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도 어느 시기에 우리 역사의 시원도 중국 못지않게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단군왕검의 개국 기년을 중국의 요와 맞춘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중국사에서도 요⋅순 시대를 국가 형성기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단군왕검의 개국 기년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후대의 관념적 산물로 보는 것이 옳겠다. 이러한 관념이 등장하는 시기 역시 고조선 당대라기보다는 유교가 수용되어 정치적 이념으로 기능하던 후대 시기로 볼 수 있다. 아마도 고려 시대가 유력하지 않을까 짐작된다.

단군 능

▣ 조선과 고조선의 명칭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이 발견되는 이른 시기의 중국 측 문헌 자료로는 『관자(管子)』, 『사기』, 『산해경(山海經)』을 들 수 있다. 『관자』는 중국의 춘추 시대(기원전 8~7세기)에 활동했던 제(齊)나라의 재상 관중(管仲: ?~기원전 645)이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실제는 전국 시대(기원전 403~221) 사람들이 편찬한 책이다. 이 『관자』라는 책에서는 단지 ‘조선’이라는 명칭만 등장할 뿐, 위치 등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어 조선의 실체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사기』, 『산해경(山海經)』도 조선의 위치와 주변 종족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했을 뿐이다. 여기서 각 사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는 없겠지만, 일단 ‘조선’이라는 명칭이 기원전 7세기 전후한 시기에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는 있겠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국가의 옛 이름은 ‘조선’이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고조선’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고조선이라는 이름은 『삼국유사』에서 단군 조선을 가리키는 국호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현존하는 자료로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용례이다. 일연이 조선을 ‘고조선’이라 한 것은 기자 조선이나 위만 조선과 구분하고자 하는 뜻이었을 것이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보다 약간 후대에 저술된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에서는 단군 조선을 ‘전 조선(前朝鮮)’, 기자 조선을 ‘후 조선(後朝鮮)’이라 하였다. 즉 고조선은 고려 시대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이름이 아니고, 전 조선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 곰과 호랑이의 존재에 대한 견해

단군의 모계는 곰에서 변신한 웅녀(熊女)와 연결된다. 곰이 인간으로 변신한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이 곰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단군 신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곰과 일종의 경쟁 관계에 있는 호랑이의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관련된 기왕의 논의에서는 곰과 호랑이를 단순한 동물이 아닌 신성한 존재, 즉 신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곰과 호랑이의 존재에 대하여, 이를 토템으로 보는 견해, 지모 신(地母神)으로서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보는 견해, 산신(山神)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이 중 어느 견해가 타당한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어떤 것으로 보더라도 환웅이 하늘을 대표하는 신적인 존재라면, 곰과 호랑이는 지상을 대표하는 신적 존재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단군 신화에서는 호랑이와 곰 중에서 최종적으로 곰이 변신한 웅녀가 하늘 신인 환웅과 결합한다. 즉 곰이 경쟁 관계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역사적으로 곰과 호랑이로 대표되는 세력 집단의 경쟁 관계를 상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신앙적인 측면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곰을 신성시하는 관념은 시베리아 지역에서 널리 확인되고 있다. 곰은 산신이나 신의 사자, 혹은 샤먼의 수호자, 인간의 조상, 토템 등등으로 숭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곰에 대한 숭배의 관념이 단군 신화에 투영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곰이 신성한 존재라면 인간으로 변신하지 않고도 환웅과 혼인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인간이 되어 환웅과 결혼하였을까 하는 점도 궁금한 부분이다. 따라서 곰의 변신 과정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곰과 호랑이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햇빛을 보지 않고 마늘과 쑥만 먹고 100일을 지내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원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숙의 제의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곰이 인간이 되는 과정은 시련을 통한 성숙의 과정이고, 이 과정을 통해 비로소 단군 모계로서의 신성한 혈통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즉 곰이 웅녀로 변신하는 과정 역시 단군의 혈통적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신화적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하늘을 상징하는 환웅과 땅을 상징하는 웅녀와 같은 신성한 존재들의 결합이라는 전제를 통하여, 이들의 아들인 단군은 생래적으로 신성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단군의 신성성은 그 탄생에 그치지 않는다. 단군이 일반적인 인간과는 달리 초인간적인 장수를 누리며, 죽음으로 최후를 맞는 것이 아니라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된다는 신화의 마지막 내용이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 준다. 단군이 지상의 산신이 되었다는 점은 고구려의 주몽 신화에서 주몽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내용과 유사하면서도 일정한 차이점을 보여 주기도 한다.

▣ 기자 조선의 존재 여부

기자 조선은 단군 조선의 뒤를 이은 고조선으로 기원전 195년, 위만(衛滿)에 의하여 멸망당했다. 기자 조선의 ‘기자(箕子)’라는 인물은 중국 역사상 은나라 인물로 전해진다. 그런데 중국 진(秦)나라 이전의 문헌인 『죽서기년(竹書紀年)』, 『상서(尙書)』, 『논어』 등에는 기자가 은(殷)나라 말기의 현인(賢人)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한(漢)나라 이후의 문헌인 『상서대전(尙書大傳)』 은전(殷傳), 『사기』 송미자 세가(宋微子 世家),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등에 기자는 은나라의 충신으로서 은나라 멸망을 전후해 조선으로 망명하여 백성들을 교화시켰으며, 이에 주(周)나라는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한나라 이후의 문헌에서야 비로소 기자 조선의 존재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에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은 적어도 중국 한나라 이후, 즉 위만 조선이 멸망하고 그 지역에 한 군현이 설치된 이후, 기자에 대한 한나라의 인식이 고조선 지역에 전해지면서 추가된 내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현재 한국 학계에서는 기자가 동쪽으로 조선에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단군 신화에 보이는 기자 조선의 실체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기자 조선을 세운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기자 조선은 그 이전의 단군 조선과는 다른 어떤 정치적 변화를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기자 조선의 대두를 토착 사회 내에서의 세력 교체로 보고, 춘추(春秋)에서 전국(戰國)으로 연결되는 시기에, 한반도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한씨 조선(韓氏朝鮮)이 성립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여 기자 조선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시도되었다. 한국의 청동기 문화는 무문 토기⋅지석묘⋅석관묘, 그리고 비파형⋅세형 동검과 동경 등이 특징적인 유물이다. 이러한 청동기 문화의 양상은 같은 시기 중국의 청동기 문화와는 전혀 이질적이다. 따라서 문헌 자료상 기자 조선이 존재했던 기원전 12세기∼기원전 2세기의 기간은 바로 청동기 문화에서 철기 문화로 계기적(繼起的) 발전이 진행되던 시기에 해당되며, 이러한 문화의 주체는 양식 생산 단계에 있던 예맥족으로 보고, 기자 조선을 예맥 조선(濊貊朝鮮)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물론 기자 조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견해도 있다. 즉 기자가 동쪽으로 왔다는 사실은 부인하나 기자를 조상신으로 섬기는 기자족이 평양 지역으로 이동해 오면서 기자 조선의 존재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견해이다. 이에 대하여 기자가 봉해진 기국은 중국 호남성(河南省) 적구현(適丘縣) 지역이며, 은⋅주 교체기에 난하(灡河) 하류 지역으로 이동했고, 진나라 통일 이후 다시 난하의 중⋅하류 동부 연안으로 이동하여 고조선과 접해 있었다고 보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어쨌든 은나라의 기자와 연관된 기자 조선은 그 역사적 실체가 고조선과는 무관하며, 자료상의 기자 조선은 청동기 문화의 발전 과정에서 단군 조선의 뒤를 잇는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정치체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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