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천자국 체제의 밑그림; 일통 의식(一統 意識)
왕건은 928년 견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시대상에 대하여,
〔사료 1-2-01〕 『고려사』 권 1 태조 11년 1월
“근자에 삼한에 액운이 닥치고 온 나라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반란군에 붙고 전답은 텅 비어 황폐해지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라고 탄식했습니다. 후삼국이 정립한 이래 약 50여 년에 걸친 길고 지루했던 전쟁은 민중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참상이 이와 같은 기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다음의 기록도 그러합니다. 통합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934년(태조 17) 태조 왕건이 내린 조서에 따르면,
〔사료 1-2-02〕 『고려사』 권 2 태조 17년 5월
“남자는 모두 전쟁터에 나가고 부녀자들까지 공사장의 인부로 동원되자, 고통을 참지 못한 백성들은 산 속으로 숨거나 관청에 호소하는 자들이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왕의 친족이나 권세가들이 어찌 방자하고 횡포하여 약한 자를 억눌러 나의 백성을 괴롭게 함이 없다 할 수 없으나, 내 한 몸으로 어찌 능히 집집마다 가서 눈으로 볼 수 있겠는가. 백성들은 이러하므로 호소할 방도가 없었으니 저 하늘에 울부짖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역시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잘 알려 주는 기록들이며, 그 어떤 명분과 형식의 전쟁이라도 최대의 희생자는 언제나 힘없는 하층민이라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이러한 참상 속에서도 하층민들은 전장에 동원되었고, 전쟁은 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이어지게 된 것은 당시 지배자들의 지배와 정복욕을 합리화하는 교묘한 이데올로기의 조작과 유통 과정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작과 유통이라 했지만, 물론 그 속에는 민심을 끌어들이는 그럴듯한 명분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영웅 군주들은 어떠한 이데올로기로 전쟁을 이끌어 나갔을까요? 이는 당시의 정치 이념과 사상의 문제로, 당시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와 마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배와 정복의 시대를 지속하게 한 이념과 사상의 동력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고려사』에 소개된 다음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당시 궁예의 태봉국 수도 철원에는 당나라에서 온 상인 왕창근(王昌謹)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철원의 저자 거리에서 어떤 노인으로부터 거울을 하나 구입했습니다. 거기에 147자의 글이 적혀 있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료 1-2-03〕 『고려사』 권 1 태조 총서
“ ‘삼수 중(三水中) 사유(四維) 아래에 옥황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리셨다.’라고 함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이다. ‘사년(巳年) 중에 두 용(龍)이 나타나 한 용(龍)은 청목(靑木) 중에 몸을 감추고 한 용(龍)은 흑금(黑金) 동쪽에 몸을 나타낸다.’라고 하였는데, 청목(靑木)은 송(松)이라, 이는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 용(龍) 자 이름을 가진 사람의 자손이 임금이 될 것이라는 뜻이니 왕 시중(王侍中)은 왕후의 상을 지닌 지라 아마도 이 분을 두고 이른 것인가 보다. 흑금(黑金)은 철(鐵)이라 지금 도읍한 철원(鐵圓, 鐵原)을 가리키니 지금의 임금이 처음에는 이곳에서 성하였다가 아마 다음에는 이곳에서 멸할 것인가 보다. ‘먼저 계(鷄)를 잡고 뒤에 압(鴨)을 친다.’ 함은 왕 시중(王侍中)이 나라를 얻은 뒤에 먼저 계림(鷄林; 신라)을 얻고 뒤에 압록강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이 기록은 태조 왕건이 918년 6월 고려 왕조 건국 3개월 전에 작성된 것입니다. 내용은 궁예의 몰락을 예언하고 왕건의 국왕 등극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예언적인 설화인데, 아마도 왕건이 즉위한 후에 꾸며진 설화가 아닌가 합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당시의 역사를 읽을 수 있는 대목도 있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옥황상제께서 진마(辰馬; 진한과 마한)의 땅에 아들을 내려 보내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先操鷄 後搏鴨).’”라고 한 구절입니다. 이는 ‘먼저 계림(鷄林; 신라)을 잡고 압록강을 되찾는다.’라는 것으로서, 삼한을 통일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궁예를 몰아낸 쿠데타의 명분을 합리화하면서 동시에 왕건이 삼한을 통일할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한 주모자의 한 사람인 홍유(洪儒; *洪述)도 궁예 축출의 명분을 삼한 통일의 실패에서 찾고 있습니다.
〔사료 1-2-04〕 『고려사』 권 92 홍유 열전
“삼한(三韓)이 분열하여 도둑 떼[群盜]가 다투어 일어나니 지금 왕 궁예가 용기를 떨치고 크게 호령하여 드디어 도적들[草寇]을 무찌르고 한반도[遼左]의 태반을 가지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한 지 벌써 20여 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끝을 잘하지 못하고 잔학한 짓을 함부로 하며, 음란한 형벌을 마음대로 하여 처자를 죽이고 신료(臣僚)를 죽였으며, 백성을 도탄에 빠뜨려 미워하기를 원수와 같이 하였습니다. 걸(桀)과 주(紂)의 악함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습니다. 어둠을 폐하고 밝음을 세움은 천하의 대의(大義)이니 청컨대 공은 은주(殷周)의 일을 행하소서.”
건국 직후 국토의 절반을 차지했던 궁예가 20여 년이 지났으나 삼한을 통합하지 못하고 포학을 일삼는 군주이기 때문에, 홍유는 궁예를 몰아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한편 이 말 속에는 삼한을 통일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인물을 갈망하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삼한 통일이라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은 여러 기록에서 나타납니다.
궁예는 901년 나라를 세워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던 까닭에 평양의 옛 도읍이 피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다.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리라.” 했습니다.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 일을 국왕 즉위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입니다. 견훤은 927년 왕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 남은 일은 그대와 같이 평양의 정자에 활을 걸고 대동강 물을 말에게 마시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삼한을 통일해야 한다는 뜻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지요.
고려 후기 역사가 이제현은 태조 왕건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습니다.
〔사료 1-2-05〕 『고려사』 권 2 태조 26년; 태조에 대한 사평(史評)
“우리 태조께서는 즉위한 후에 아직 김부(金傅; *신라 경순왕)가 복종하지 않고 견훤이 포로가 되기 전인데도 자주 서도(西都; *평양)에 행차하여 친히 북방의 국경 지역을 돌아보셨다. 그 뜻이 또한 동명왕(東明王)의 옛 땅을 내 집에서 쓰던 청전(靑氈)같이 생각하고 반드시 석권하여 이를 차지하려 하였으니 어찌 다만 계림(鷄林)을 취하고 압록강(鴨綠江)을 칠 뿐이었겠는가? 이로써 보면 비록 크고 작음에서 세력은 같지 않으나 두 태조(太祖; *송나라와 고려의 태조)의 기개와 도량은 이른바 그 입장을 바꾸어 보면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제현 역시 삼한 통합의 정치적 이상을 실천한 것을 태조 왕건의 주요한 치적으로 평가하면서, 5대 10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 태조에 버금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실제로 왕건 자신도 자신의 정치 이념이 삼한 통합에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사료 1-2-06〕 『고려사』 권 92 최응(崔凝) 열전
“옛적 신라가 9층탑을 세워서 드디어 통일의 업[一統之業]을 이룩하였다. 이제 개경에 7층탑을 세우고 서경에 9층탑을 세워서 부처의 힘을 빌려 나쁜 무리[群醜]를 제거하고, 삼한을 합하여 일가(一家)를 삼고자 하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발원소(發願疏)를 지어 달라.”
위의 사실은 태조 왕건이 자신의 측근 참모인 문사(文士) 최응(崔凝)에게 삼한 통합을 위해 불교의 힘을 빌리려는 뜻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이같이 삼한을 통일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정치 이데올로기는 당시의 정치 주역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이 고통스러운 전쟁을 이겨 내는 이념적 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앞에서 왕건이 최응과 대화하면서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세워 삼국을 통일한 사실을 언급한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수백 년 전 신라의 통일 전쟁 경험을 빌려 삼한을 통일하려는 그는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일통지업(一統之業)’이라 하면서, 자신의 정치 이념도 그와 다를 바 없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이 시기를 지배한 정치 이념의 하나를 ‘일통 의식(一統意識)’ 혹은 ‘삼한 일통론(의식)’이라 부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일통 의식은 이미 신라의 삼국 통일기에도 나타났습니다. 통일 후 신라는 당의 군사들을 한반도에서 축출하는 전쟁에서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하고, 안승(安勝)을 고구려 왕에 봉하였습니다(670년). 또한 백제 유민을 신라의 중앙군에 편제하고, 백제의 옛 관료들에게 신라의 경위(京位)를 주었으며(673), 나아가 중앙과 지방을 차별하는 외위를 없애고 백제와 신라의 지방민에게 경위를 개방하여(674년), 옛 삼국의 주민을 일체화시켜 통일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통 의식은 옛 삼국 주민들이 그간의 분열과 대립을 지양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동일한 공동체로서 역사 의식을 공유하려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합니다.
신문왕(681-692년) 때 전국을 9주로 편성하여, 삼국의 옛 영역을 각각 3주씩 배치했습니다(685년). 특히 9주 제도는 중국 하(夏)나라 우(禹) 임금이 전국을 9개 주로 나누어 통치한 제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뒷날 중국에서 새로운 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여 통치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서 이 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한반도의 동남 변방인 신라가 삼국 통일 후에 비록 형식적이지만 9주 제도를 시행했다는 것은 신라가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일통 국가라는 자부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실제로 청주시 운천동에서 발견된 사적비(686년)에 따르면, ”(신문왕은) 삼한을 합쳐 땅을 넓히고 창해에 살면서 위엄을 떨쳤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한 이 비문에는 천하를 통합하여 9주를 설치한 삼한 일통의 수명(受命) 군주인 신라 국왕, 즉 신문왕의 덕업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춘추(春秋)』에 따르면 일통(一統)의 ‘통(統)’은 시작을 뜻합니다. 즉 군왕이 천명을 받들어 천하에 정교(政敎)를 반포하고, 공후(公侯)와 서인(庶人)에서 만물에 이르기까지 천명을 받은 군왕을 받들어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통틀어 대일통(大一統)이라 했습니다(隱公 元年 何言乎正月 大一統也 (注) 統者 始也 揔繫之辭 夫王者始受命 改制布政 始敎於天下 自公侯至於庶人 自山川至於草木昆蟲 莫不一一繫正月 故云政敎之始 (疏)王者受命 制正月以統天下 令萬物無不一一皆奉之以爲始 故言大一統也; 『춘추(春秋)』 공양전(公羊傳)). 대일통은 이같이 하늘에 두 개의 태양, 땅에 두 왕이 없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군왕의 일통(一統) 사업을 존숭하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왕이 역(曆)을 만들고 천하에 정교를 반포하여, 천하가 새로운 정치를 시작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삼한 일통 의식은 옛 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통합하여 동일한 역사 공동체를 형성하는 한편, 천명을 받은 천자 아래 천하가 하나 되는 천자국(天子國) 체제를 지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100여 년이 지난 혜공왕(惠恭王; 765-780년 재위) 때에는 일통 국가의 면모는커녕 왕조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정도였습니다. 진골 귀족 위주의 폐쇄적인 정치 구조 및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으로 왕실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고, 민심은 크게 이반되었습니다. 비록 정치적으로 삼국은 통합되었으나 옛 고구려나 백제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 길은 막혀 있었고, 옛 삼국의 문화가 융합되어 일통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새로운 문화는 창조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수도 경주를 조금만 벗어나도 독자의 영역과 군사력을 갖춘 지방 세력이 곳곳에서 발호하여, 중앙 왕실에 반기를 들 정도로 혼란스러운 대립과 분열의 후삼국 분립 시대를 낳게 된 것입니다.
수 많은 희생과 고통을 초래했던 통합 전쟁은 외형상 궁예⋅견훤⋅왕건 등 영웅 군주 사이의 패권 다툼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삼한이 하나 되어 새로운 천하 국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삼한 일통 의식이라는 새로운 정치 이념이 싹트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려 왕조라는 통합 왕조의 출현을 가능케 한 이념적 기반은 삼한 일통 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