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보는 한국사잡록(雜錄)⋅필기(筆記)류 자료를 통해 본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2. 중인의 삶

2) 행정 전문가 아전

아전(衙前)은 관청에 소속되어 일을 보던 하급 관료로 조선 시대의 중인 가운데 한 부류이다. 아전은 크게 중앙에서 활동하던 경아전(京衙前)과 지방에서 근무하는 향리(鄕吏)로 구분된다. 경아전은 흔히 서리(胥吏)라고도 하는데 역관이나 의관 등의 기술직 중인잡과를 통해 선발되었던 데 비해 경아전은 간단한 시험인 취재(取才)를 통해 뽑혔다. 경아전은 다시 녹사(錄事)와 서리(書吏)로 구분되는데 경아전의 대다수를 차지한 이들은 서리이다. 녹사는 조선 초기에만 해도 사족과 동등한 신분이었지만 점차 지위가 하락하여 서리와 별반 차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지방의 향리는 경아전보다 지위가 낮았다. 그래서 경아전은 향리들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중인으로 불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그들도 아전의 일원이었다.

경아전은 정식 관료였음에도 불구하고 직무에 상응하는 처우를 받지 못하였다. 다른 무엇보다 경아전의 대부분은 녹봉을 지급받지 못하였다. 생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 경아전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전의 수는 증가하였는데 그 이유는 경아전이 되면 신역(身役)을 면제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행정 실무를 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업무 처리 과정에서 수입을 얻을 수도 있었다. 양반 관료들은 본래 행정에 어두운데다가 잦은 관직 변동으로 실무 지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 행정 업무는 경아전들이 거의 맡다시피 하였다. 녹봉도 지급받지 못하여 스스로 생활 자금을 마련해야 했던 경아전들은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뇌물⋅착복 등 각종 부정을 저지르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다음은 간단한 하나의 사례이다.

〔사료 2-2-01〕

호서 공산현(公山縣)에 김성달(金聲達)이라는 이속이 있었는데 산성의 창고지기가 되어 문서⋅장부를 환롱하여 쌀 4백 석을 훔쳤다. 일이 발각되어 옥에 갇힌 지 수년이 되었는데 그 친족까지 연루되어 파산한 집이 수십이었다.

유재건(劉在建, 1793~1880),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장부 조작으로 쌀을 빼내는 것은 흔히 쓰는 수법이었다. 경아전들이 저지르던 부정의 양상은 관사에 따라 매우 다양하였다. 병조에서는 뇌물을 받고 군적에서 빼주거나 군포를 횡령하는 등의 방법이 동원되었고, 형조에서는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받아 챙겼다. 선혜청에서 대동미(大同米)를 수납하는 과정에서 아전들이 뇌물을 요구하는 것은 관례가 되다시피 하였다. 아전들이 자행하던 부정 수법은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아전들은 이러한 각종 부정한 방법을 통해 큰돈을 모을 수 있었다.

경아전은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많았기 때문에 경아전이 되려는 사람도 늘어났다.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병조 낭관을 배행하는 서리가 되기 위해 서리들이 치열한 경쟁이 벌였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병조 낭관이 임명되면 제일 먼저 신임 낭관에게 달려가는 자가 서리로 채용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먼저 관을 벗어 문 안으로 던지는 자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서리들 사이에 전해지는 고사라고 하는데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경아전이 인기 직종으로 부상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조선 후기에는 경아전의 선발 방식도 바뀌어 취재가 아니라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충원하였다. 이렇다 보니 경아전이 되기 위해 양반들과 결탁하는 일이 늘어났다. 양반의 겸인(傔人)1)으로 있다가 경아전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우의정 이은(李溵, 1722~1781)은 선혜청 서리가 일을 잘못 처리했다는 이유로 그를 쫓아내고 자신의 겸인 김완철(金完喆)을 대신 기용하였고, 조태채(趙泰采, 1660~1722)의 겸인이었던 선혜청 서리 홍동석(洪東錫)은 조태채가 유배에 처해지자 선혜청에서 스스로 물러나 조태채를 따라갔다. 이처럼 중앙 관료와 아전은 결탁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지방 향리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사료 2-2-02〕

경진(景眞) 정성우(鄭性愚)가 일찍이 내게 이런 말을 하였다. “전주에 있을 때 손님을 만나러 한 아전 집에 이르렀는데 대청과 방 안에 있는 술병과 술잔, 병풍과 휘장, 정원의 꽃과 돌, 누대와 연못은 서울의 귀한 집에도 많지 않은 것이었네. 벽 위에 종이를 걸어놓고서 아무 집의 생일과 아무 집의 기일, 아무 집의 혼사, 아무 집의 장례를 죽 적어 놓았는데 이조참의나 성균관 대사성도 그 명단에 끼지 못하였네.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가 보낸 물건이 무엇인지를 넌지시 물어보았더니 한 번 바치는 양이 백금이어도 그리 많은 것이 아니며, 대개 연통과 담뱃대 하나를 100전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고 하였네.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만하니 변방 고을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네.”하였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전주의 향리가 중앙 고관의 기념일에 고가의 선물을 바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주처럼 규모가 큰 향리는 중앙 관리와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아전은 관리로서도 필요한 존재였다. 그와 관련하여 송시열(宋時烈)은 “예전에는 조정 벼슬아치들이 서리들과 우호를 맺으면 문득 청망(淸望)이 막힌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조정 신료들은 봉급이 박하여 이 무리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기에 타락한 습속에서 몸을 스스로 뺄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관료들이 오히려 아전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분명 그런 측면도 있었다. 그러한 상황을 보여 주는 자료가 『효빈잡기』에 들어 있다.

〔사료 2-2-03〕

사람들은 모두 감사감영의 아전을 거느린다는 것만 알고 감영 아전이 감사를 거느리는 줄은 모른다. 무슨 말인가? 평소에 보면 감사가 가을에 감영 가까이에 있는 여러 읍을 순시하는데 이것은 감영 아전을 위해 목화를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겨울에는 바닷가 각 읍을 순시하는데 이는 감영 아전을 위해 어물을 거두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 밖에 교활한 아전에게 말려들면 아전에게 놀아나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효빈잡기(效嚬雜記)』

감사가 여러 읍을 순시하는 것이 감영 아전의 편의를 봐주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아전의 현실적 위치가 어떠하였는지 잘 보여 주고 있다. 아전은 관료들과의 결탁 혹은 관료들의 묵인하에 각종 불법을 자행하며 돈을 벌어들였다. 아전의 처지가 소과(小科)에 합격한 생원이나 진사보다도 나았기 때문에 아전의 아내들은 남편이 소과에 급제하면 “이 물건이 집으로 오면 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하니 이처럼 복 없는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횡재를 하지 않는 한 가난함을 면하지 못한다.”라며 백패(白牌)를 집어 던졌다고 한다. 아전들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청렴한 아전 이야기가 일화로 전해지기도 한다.

〔사료 2-2-04〕

김수팽(金壽彭)이란 자는 호조의 이서(吏胥) 가운데 칭송을 받은 자이다. 정조 때에 금곡(金穀)을 오랫동안 관리하였는데, 번고(飜庫)2)할 때 한 낭관(郞官)이 은으로 만든 바둑돌 몇 개를 가지자 김수팽은 한 움큼을 가졌다. 낭관이 크게 놀라며 괴이하게 여기자 김수팽이 말하기를, “관원이 한 개를 취할 경우 아전이 한 움큼을 취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낭관이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니, 이것은 세상을 깨우치는 훌륭한 말이 될 만하다.

이유원(李裕元, 1614~1888), 『임하필기』

서리의 폐단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여러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조식(曺植, 1501~1572)이 1568년(선조 1)에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에서 국가의 주요한 세원(稅源)이 중앙과 지방 관청의 서리들의 손아귀에 있다며 서리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현실을 지적하였다. 조헌(趙憲, 1544~1592)은 서리나 아전들에게 한 푼의 돈도 주지 않기 때문에 관을 속이고 농간을 부려 백성을 협박하여 재물을 요구하고 장부를 위조하여 재물을 훔치고 창고에 들어가 곡식을 훔친다며 서리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거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서리의 요직은 세습되면서 유력한 아전 가문이 탄생하게 되었다. 심노숭은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료 2-2-05〕

서리란 지방 감영이나 관아에서는 범이나 이리 같은 존재이고, 서울에서는 쥐새끼나 좀과 같은 존재이다. 이들을 바로잡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실로 나라가 망해도 구제하지 못한다. 서리의 부정을 바로잡는 방법은 먼저 서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재정을 담당하는 아문의 서리들은 관아에 의지해서 자손을 부양하는 것도 부족하다고 여겨 자손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자가 절반이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자리를 물려주는 아전이 절반이라고 할 정도로 아전직의 세습은 일반화되었다. 그만큼 아전직은 매력적인 자리였다. 물론 아전들이 모두 같은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아전 가운데 일부는 거관(去官)3)한 후에 무과에 응시하여 무관이 되거나 지방관을 맡는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아전의 동향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것은 경아전이 조선 후기 시사(詩社) 활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경아전들은 그간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문학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유명한 위항 문학인이었던 임준원(林俊元, ?~1697)은 본래 집이 가난하여 내수사 아전이 되었던 인물이다. 부지런하고 재간이 있고 사무에 밝아 신임을 얻었으며 아전 생활로 큰 부를 축적하였다. 왕실 재정을 담당하던 내수사 아전은 본래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자리였다. 임준원은 많은 돈을 모으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겨 아전직을 버리고는 시사를 후원하는 일로 여생을 보냈다. 문학 활동에 참여한 것은 경아전들의 역량이 강해졌음을 말해 주지만 한편으로는 양반을 닮고 싶은 욕구가 표출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한말의 유명한 문장가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중인들이 사대부가 될 수 없어 스스로 포기한 채 원대한 학문을 하지 못하고 다만 시로써 회포를 풀 따름이었다.”
신윤복, 풍속화
주막의 풍경으로 제일 오른쪽에 있는 이는 경아전인 나장이다.
(소장 : 간송미술관)
자료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미술작품 > 작가별 작품 > 동양작가 > 조선시대 작가 > 신윤복 > 〈주사거배〉, 《혜원 전신첩》 - 신윤복
1)양반을 시중드는 사람
2)창고에 있는 물건을 조사하는 일
3)관직에서 물러남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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