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잡록(雜錄)⋅필기(筆記)류 자료를 통해 본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5. 특수층의 삶

1) 무당

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신의 존재와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유학자들은 불교를 비롯한 종교를 비합리적인 것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렇지만 사회에는 늘 종교적 구원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유학에서 위안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찾을 수밖에 없다. 유학자들은 불교나 무속 등을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지속적으로 탄압했지만 그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불교나 무속은 굳건하게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신흠(申欽, 1566~1628)은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료 5-1-01〕

아조(我朝)에 이르러 여러 가지 모든 문물을 한결같이 중국 제도를 모방하여 고루 갖추어 볼 만했다. 그러나 무당과 부처에게 비는 것은 아직도 오랑캐 풍속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조종조(祖宗朝)에서도 임금이 병이 나면 중이나 무당이 경을 외우고 인정전(仁政殿) 위에서 빌며 또 송악신사(松岳神祠)를 더욱 숭상하여 신사에서 예를 행한 뒤에는 무당이 자리를 만들어 놓으면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들어가 참여하였다. 심지어 무당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것까지도 전혀 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때 무당이 신사에 왕래하는 데 필요한 물건은 모두 관청에서 공급했다.

신흠(申欽, 1566~1628), 『상촌잡록(象村雜錄)』

왕실에서도 불교나 무속에 의지하고 있던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왕실에서도 이러하였으니 민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민간에서는 특히 무속이 매우 성행하여 조상의 제사를 무당의 집에 가서 지내거나 병이 났을 때 목숨을 대신한다며 노비를 무당 집에 바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에는 무속 행위를 단속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다. 무당 집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이들은 죄를 주고 관리로 임용될 수 없도록 하고, 무당에게 헌납한 노비는 관에서 몰수하였다. 무당의 경우에는 만약 망령되게 신을 자칭하거나 신이 몸에 내렸다며 사람들을 현혹시키면 처형하고, 무적(巫籍)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무속을 행위를 하는 무당은 도성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무당들에게 세금도 징수하였다. 외방에 거주하는 무당들에게 신당(神堂)의 세포(稅布)와 퇴미(退米) 등의 세를 거두었으며 환자의 치료를 돕도록 동⋅서활인서에 소속시킨 무녀들에게까지 세를 받았다. 때문에 무당들의 괴로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패관잡기(稗官雜記)』의 다음 자료는 세금에 시달리던 무속인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사료 5-1-02〕

세상에 전하기를, ‘관청에서 무당에게 세포를 너무 많이 거두어들였으므로 매양 관원이 문에 이르러 외치면서 들이닥치면 온 집안이 쩔쩔매고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면서 기한을 늦추어 달라고 애걸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이 하루걸러 있거나 연일 계속되어 그 괴로움과 폐해가 헤아릴 수 없었다.

어숙권(魚叔權), 『패관잡기(稗官雜記)』

무적을 통해 무당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도를 벗어난 무속 행위를 일절 단속한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무속 신앙은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신흠이 비판했던 송악신사에서의 무속 행위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이덕형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료 5-1-03〕

성종 조에 대신들이 위에 아뢰어서 이를 엄금시켰지만 척리나 귀가에서는 오히려 그 전의 습관을 답습하였고, 시정의 부자 상인 집에서는 다투어 사치를 부려 온갖 도구를 줄지어 싣고 성악(聲樂)이 길에 가득했으므로, 한 번 차리는 비용이 중인의 경우 한 집안의 재산을 다 기울여도 부족할 정도였다. 이런 일은 문정왕후 때에 이르러 더욱 심하였다. 중관(中官)과 궁녀가 길에 끊어지지 않고 음식 제공도 적지 않았으며, 남녀들이 산골짜기를 메워 여러 날씩 머물고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자못 더러운 소문까지 있었다.

이덕형(李德泂, 1566~1645), 『송도기이(松都記異)』

성리학에 투철한 믿음을 지니고 있던 유학자들은 무속을 철저히 근절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지방 사회에서 무당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단속하였다. 예를 들어 윤휴(尹鑴, 1617~1680)는 「향약절목」에서 상(喪)을 치르면서 무당을 부르거나 불공을 드리는 자를 경계하였고, 무당이나 광대 등은 계(契)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윤휴는 무당이나 광대 등은 모두가 오랑캐 짓을 하는 자들로 윤리를 심하게 어지럽히는데도 백성들이 속아 넘어가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관료가 되어 무속을 직접 없애고자 했던 이들도 있었는데 1679년(숙종 5) 경상 감사로 나갔던 박신규(朴信圭, 1631~1687)가 그러한 경우이다.

〔사료 5-1-04〕

판서를 지낸 박신규가 경상 감사가 되어 고을을 순시하다가 성주에 이르렀다. 밤에 들으니 읍내 마을에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굿을 하는데 매우 요란하였다. 공이 그 고을 원에게 말하였다. “내가 순시를 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는데 무슨 놈의 굿을 이토록 무엄하게 하는고?” 그러자 아전이 말하였다. “이 고을에는 성산군이라는 귀신이 있사온데 매우 기이합니다. 봄가을로 날짜를 정해 놓고 굿을 하며 비는데 관가에서도 능히 금하질 못하고 있사옵니다. 오늘이 마침 그 정한 날이 되어 무당들이 귀신들을 즐겁게 하는가 보옵니다.” 이튿날 박공은 무당들을 잡아들여 모두 중형을 가하였다. 그리고 고을의 군졸들을 징발하여 신당을 헐어 없애고 신상을 무너뜨려 부수어 버렸다. 박 공이 위태로운 일을 한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뒤 고을 사람들은 힘을 모으고 재산을 갹출하여 신당을 다시 지었다.

신돈복(辛敦復, 1692~1779), 『학산한언(鶴山閑言)』

박신규는 관에서도 어쩌지 못했던 무속 행위를 과감하게 근절시켜 버렸다.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 신당을 다시 짓고 무당을 맞아다가 큰 굿판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무당을 둘러싼 환경은 점점 열악해져 갔지만 무속은 백성들 사이에 매우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무속은 서울과 지방 모두에서 여전히 성행하였다. 허목(許穆, 1595~1682)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진주 지방에 내려간 일이 있었는데 종형 허후(許厚)에게 보낸 편지에서 “음사(淫祀)와 저주(咀呪)를 숭상하여 밤낮으로 요망한 무당이 불을 들고서 귀신을 꾸짖는데 이것들은 모두 남쪽 지방을 멀리 유람하며 보았던 괴이한 볼거리”라고 그곳의 풍속을 소개하였다. 경상도 합천의 삼가(三嘉)에서 생활하였던 이옥(李鈺, 1760~1812)도 “이 고장에는 귀신을 숭상하는 습속이 있어 가을걷이가 끝나면 집집마다 모두 귀신에게 굿을 하고, 조그마한 질병이 있어도 반드시 무당을 부른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서울의 상황은 다음 자료에 잘 나타나 있다.

〔사료 5-1-05〕

지금 들으니 도성 안에는 하루에도 귀신을 먹이는 자가 무수히 많은데 한 번 먹이는 비용이 적지 않게 든다고 한다. 시골에도 질병이 있거나 상사가 있으면 귀신을 먹이는 데 소비하지 않는 자가 없어 걸핏하면 두어 달 먹을 양식을 소모한다고 한다. 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익(李瀷, 1681~1763), 『성호사설(星湖僿說)』, 「인사문 : 巫」

서울에서도 이처럼 무속이 성행하자 1763년(영조 39)에 사헌부에서 무녀들이 사람에게 화를 끼치고 재물을 낭비하게 하는 것이 심하다며 무녀들을 도성 밖으로 쫓아버리도록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무녀들이 더 이상 도성에서 거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무녀들은 한강 남쪽으로 자리를 옮겨 가 그곳에서 무속을 행하였고 무당을 찾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다음 자료는 그러한 상황을 잘 보여 준다.

〔사료 5-1-06〕

요즘 나라에서 무당을 성 밖으로 물리쳐 사술을 부리며 성안에 거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무당들은 모두 노강(鷺江)1) 남쪽에 모여 너울너울 무당춤을 추고 깨갱깨갱 악기를 두드려대니 완구(宛丘)2)의 유풍이 있다. 민간의 귀신을 좋아하는 자들이 줄지어 찾아오는데 붉은 가마를 타고 푸른 옷차림으로 끊임없이 모여드니 완구가 또 한 번 변해 상궁(上宮)이 되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수양버들 늘어진 서호(西湖)3)가 모두 그들에게 더럽혀지게 되었다.

이옥(李鈺, 1760~1812), 『유화유수관소고(柳花流水館小稿)』

신윤복, 풍속화

무속은 정부 혹은 유학자들로부터 끊임없이 견제와 비판을 받으면서도 굳건하게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특히 지방 사회에서는 무속의 영향력이 상당하여 무속 행위가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무당하면 흔히 천인처럼 생각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보면 민간에서 무당의 실제 지위가 그렇게 낮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1)노량진
2)무당굿이 성행했던 곳
3)마포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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