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맺음말 – 신탁 통치 파동의 귀결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이 국내에 전달되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신탁 통치 파동은 타스 통신의 삼상 회의 협상 과정 공개로 일단락되었으나 1945년 말과 1946년 초의 탁치 파동 이후 한반도의 정치 지형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국면 전환이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점령 목적을 일본군 무장해제와 소련에 대한 보루 구축으로 이해하였고, 그의 점령 통치는 그러한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점령 직후 시점에서 미 군정이 한국의 정치 세력을 구분했던 기준은 공산주의 세력 대 민족주의 세력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 미 군정이 상부에 보낸 보고서들은 한결같이 남한 정치를 급진주의자(radicals) 대 보수주의자(conservatives)의 대립으로 묘사하였다.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장군의 고문으로 미 군정에 친일 세력과 한민당 인사들을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윌리엄스(George Z. Williams) 1) 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남한 정치를 급진 세력(radicals) 대 민주주의자(democrats)의 대립으로 묘사하였다. 보수주의자란 미 군정의 통치 규범을 잘 받아들이는 자를 이르며, 그런 측면에서 민주주의자였다. 주한 미군 사령부 군사관의 관찰에 의하면 이러한 구분법은 미 군정에서는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이러한 구분법이 사용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미소의 분할 점령이라는 상황에서 점령의 다른 한 당사자인 소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해방 직후 한반도의 정치 지형 자체가 이념적 구분이 무의미한 민족 혁명적 열기의 분출에 이끌리고 있었고, 초기의 건국 준비 위원회나 각 지역 인민 위원회가 대부분 좌우 합작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초기의 보수 대 급진의 정치 지형이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적 구분을 전제로 한 정치 지형으로 바뀌는 데에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의 국내 전달과 이로부터 비롯된 신탁 통치 파동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반탁 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 지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이 있은 뒤 모든 정치 세력들이 남조선 대한 국민 대표 민주 의원이라는 우익 블록과 민주주의 민족 전선이라는 좌익 블록으로 ‘헤쳐 모여’ 함으로써 1946년 초 국내 정치에 좌⋅우 구분이 정착되기에 이른다. 그 이전 시기까지만 해도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민족 대 반민족’이라는 정치적 대립 구도가 보다 중요한 기준이었고, 미 군정 내에서는 ‘급진주의자 대 보수주의자(민주주의자)’의 구분법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1945년 말과 1946년 벽두의 신탁 통치 파동을 거치면서 김성숙(金星淑)의 표현대로 좌우 대립은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지경에까지 이른다.
해방 직후 한국인 정치 세력들 사이에서는 좌⋅우 간의 견제가 없지 않았고, 반공주의적 태도가 조기에 대두하기도 하였다. 한민당은 결성에서부터 중경 임정 추대와 인공 반대를 분명히 하였고, 중경 임정의 대표는 귀국에 앞서 1945년 8월 30일 중경의 미국 대사관을 방문하여, 강한 대소(對蘇) 경계론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경계 의식을 내비치면서 한국 내에서 미국 점령군과 협력하기를 희망하며, 안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하여 친미 여론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는 취지의 비망록을 전달하였다.
하지만 좌⋅우 어느 세력이든 민족 통일 전선에 대한 대중적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고, 표면적으로는 모두 연합과 단결을 내걸었다. 미군 진주 소식을 접하자 공산주의자들의 주도하에 급조된 ‘조선 인민 공화국’은 이승만을 주석에, 김구를 내무부장에 추대하였고, 친일 혐의가 있는 김성수까지 문교부장에 추대하였다. 이승만은 귀국 제1성으로 전 국민이 대동단결할 것을 방송하였으며, 임정은 귀국 뒤 바로 조선 인민 공화국 측과 합작 문제를 논의하였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은 조만식과의 제휴를 적극 모색하였으며, 조만식은 김일성 환영 군중 대회에서 그를 대중들에게 소개하였다. 즉 내면적인 경쟁에도 불구하고 어느 세력이나 민족 통일을 통한 신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탁 통치 파동을 거치면서 국내 각 정치 세력들 간의 경쟁과 갈등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주한 미군사』 한국 정치 편을 집필한 군사관 로빈슨이 해방 이후 좌우 구분은 식민지기 이래의 활동 노선과 경험의 차이 외에도 미 군정에 대한 태도 여하를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고 지적한 점이다. 즉, ‘좌’, ‘우’라는 구분이 해방 이후에는 미 군정에 대한 ‘반대’인지, ‘지지’인지를 가리키는 의미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한편 신탁 통치 파동 이후 북한 역시 반탁 운동 지도자들을 반공주의자, 반민주 파시스트로 비난하였으며, 나아가 이들을 제국주의 미국의 앞잡이로 몰아갔다. 1946년 봄 북한에서 나온 한 선전 문건은 김구, 이승만을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조선 민족의 반역자이다. 그들은 조선 봉건 세력과 친일파의 결합체이며 외국 파쇼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 문건은 정세를 고려해서 ‘파쇼 제국주의’를 구체적으로 미국이라고 지목하지 않았지만, 전후 맥락으로 보건대 이 용어는 미국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었다. 반공주의자, 즉 미국의 앞잡이라는 북한의 선전 방향은 공산주의, 즉 소련의 앞잡이라는 남한 반탁 진영의 선전 방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남한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 공세나 북한에서 반공주의에 대한 이념 공세는 모두 상대 이념의 담지자들을 외세의 앞잡이로 몰아가는 데 치중하였다.
찬⋅반탁 논쟁 당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논쟁은 미⋅소의 이해관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형식으로 표출되었다. 이것은 해방 이후 반공주의 형성에서 미⋅소의 강한 원심력, 다시 말하면 국제 정치적 계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 한 연구자는 한국 반공주의 형성의 국제 정치사적 계기를 크게 두 가지로 파악하였다. 첫째, 일제가 주입한 반 볼셰비즘이 해방 후 남한에서 일본인 고관과 친일파 조선인들을 통하여 미 점령군에 대소 경계심으로 이양된 점, 둘째, 공산주의 세력이 모스크바 삼상 회의 지지 입장으로 전환한 것을 소련에 의한 신탁 통치 내지 조선 ‘합병’ 의도와 연결시킴으로써 민족주의에 내재해 있던 외세에 대한 독립이라는 민중들의 열정을 끌어내 반공주의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인 정치 세력 사이의 대립이 좌우 대립 구도로 전환되자 미 군정은 자신들의 점령 목적을 국내의 정치적 대립 구도와 일체화, 단순화시킴으로써 미 군정에 대한 반대 세력을 모두 좌익으로 몰아 탄압할 수 있는 명분과 이데올로기적 해석권을 가질 수 있었다. 일단 좌우 대립의 의미가 미 군정에 의하여 새롭게 규정된 뒤 ‘좌익=빨갱이’라는 의미는 계속 그 외연을 확장하여 나갔다. 미 군정의 좌익 탄압이 본격화하는 1946년 봄부터 미 군정은 자신들을 반대하는 모든 움직임을 좌익과 외부(소련)의 사주⋅선동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2) 여기에는 민중 운동도 예외가 될 수 없었는데, 극단적으로는 ‘제주 4⋅3 항쟁’에 대한 미 군정 정보 보고서에서는 군대, 경찰, 우익 청년 단체의 토벌을 ‘레드 헌트’로 명명하기도 했다.
북한에서도 신탁 통치를 둘러싼 논쟁은 정치 지형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다. 이 결정이 발표된 직후 민주당을 중심으로 일부 지방의 공산주의자들까지 가세한 반탁 운동이 벌어질 조짐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은 1946년 1월 소련군 민정국 정치⋅행정 담당 이그나치예프 대좌가 작성한 세 편의 보고에 잘 나타나 있다. 3) 이들 문서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북한 내 정치사회적 분규로 인하여 특히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공산당과의 연립 정권에서 이탈하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조만식의 연금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듯 1946년 초부터 소련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민족 부르주아지와 결별하고 북한에서 인민 민주주의 혁명을 강화하는 단계로 들어섰다.
1) | 공주 영명 학교를 세운 선교사의 아들. 조병옥과 어릴 적 친구로 하지에게 조병옥을 경무부장으로 추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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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주한 미군 사령부와 산하 방첩대는 이러한 자신들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간헐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방첩대의 일방적인 자료 편찬 태도는 종종 미 군정 내 자유주의 관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미 군정의 좌우 합작 막후 담당자였던 버치 중위는 방첩대에서 작성한 「Political News」의 논조가 중도파가 공산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듯한 왜곡된 이미지를 심고 있다고 항의하는 편지를 정보 참모에게 보냈다. |
3) | ’칼라쉬니코프 동지에게‘ 1946. 1. 4, ЦАМО, ф. УСГАСК, оп. 102038, д. 2, лл. 3∼5; ’조선 후견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과 관련한 북조선 주민의 정치적 동향 보고‘ 1946. 1. 14, Там же, 6∼11; ’북조선 주민의 정치적 동향에 관한 보고‘ Там же, 66∼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