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보는 한국사잡록(雜錄)⋅필기(筆記)류 자료를 통해 본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1. 양반의 삶

1) 관료가 되는 길

양반(兩班)이 언제부터 하나의 특권층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양반은 처음에는 법제적인 신분이 아니었지만 점차 신분처럼 변해 갔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신분이었던 것은 아니다. 양인(良人)이라면 누구든 양반이 될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양반이 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과거(科擧)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과거는 또한 양반층이 자신들의 신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었다. 안정복(安鼎福)의 부친 안극(安極)은 후손들에게 남긴 유서(遺書)에서 가문이 계속해서 과거를 통해 가문의 명성을 유지해 왔는데 자신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선대를 드러내지 못했다며 자책하였다. 양반이 되기 위해, 양반으로 남기 위해 많은 이들이 과거에 매달렸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은 과거의 속성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사료 1-1-01〕

이익이 많은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로 인한 해로움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양반만큼 이점을 누리는 것이 없다. 그래서 양반이 될 수만 있다면 패가망신도 각오하였으므로 과거로 인해 패가망신한 자가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패가망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과거에 매진하였으니 큰 이익이 있기 때문이었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권4, 「성언(醒言)」

특권층인 양반이 되기 위해 과거에 모든 것을 거는 풍조를 비판하고 있다. 풍수가로 잘 알려져 있던 남사고(南師古, 1509~1571)는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당시 유현들에게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다. 남사고 같은 인물은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의외로 그도 늘그막에 이르기까지 과거를 포기하지 못해 계속 응시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 과표(科表) 모음집

양반 가운데는 과거를 요식 행위처럼 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다음 자료는 허구적인 내용일 가능성이 크지만 과거와 관련된 당시의 풍조를 보여 준다.

〔사료 1-1-02〕

한 시골 선비가 식년을 당하여 과거 길을 걱정하자 그의 노비가 말했다. “생원님,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생원이 말하기를 “가난한 양반이 또 과거볼 때가 되었으니 어찌 걱정이 안 되겠느냐?”하였다. 노비가 말하기를 “과거 때마다 생원님이 행차를 하면 노마(奴馬)의 비용이 적지 않은데 구차한 살림에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니 금년 과장에는 소인이 대신 가겠습니다. 그러면 이름 적는 시험지와 노잣돈만 필요할 뿐 그 외 다른 경비는 크게 줄 것입니다.”하였다. 선비가 “네가 어찌 양반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꾸짖자 노비가 말하기를 “다리 밑에 시험지 버리는 일을 어찌 모르겠습니까?”하였다.

장한종(張漢宗, 1768~1815), 『어수신화(禦睡新話)』

실력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과거에 응시하는 양반층에 대한 풍자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도 들어 있다. 매번 향시에는 합격을 하는데 회시에 합격하지 못하는 시골 양반이 또 회시를 보러 가려고 하자 노비가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력이 있든 없든 조선 시대 남성들에게 과거 응시는 일상이었다.

과거소과(小科)라 부르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기만 해도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지만 과거의 꽃은 역시 문과(대과) 급제였다. 같은 문과 급제라도 소과를 거쳐 문과에 합격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과거에 따라 소과(小科) 없이 바로 대과(大科)만 치르는 시험도 있었기 때문에 소과(小科)에 합격하지 않고도 문과에 급제할 수는 있었다. 물론 소과를 거치지 않고 바로 문과에 합격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는 다음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료 1-1-03〕

세상에서 유학(幼學)으로 문과 급제한 이를 비렴(飛簾)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생원이나 진사를 거치지 않고 급제한 이를 세상에서 희귀하게 여겨 급제자를 발표한 뒤 유가(遊街)할 때 사람들이 발을 걷고 구경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심수경(沈守慶, 1516~1599), 『견한잡록(遣閑雜錄)』

하지만 소과(小科)를 거치지 않고 문과에 급제한 이들은 소과와 대과를 모두 합격한 이들에게 약간 무시를 받았다. 심재(沈 , 1722~1784)의 『송천필담(松泉筆談)』에는 그를 보여 주는 일화 한 편이 들어 있다.

〔사료 1-1-04〕

상국 유척기(兪拓基)와 상서 조관빈(趙觀彬)은 둘 다 신미년(1691)에 태어났고 갑오년(1714) 증광시에 동방(同榜)으로 급제하였다. 방이 내걸리던 날 함께 궐문을 나서는데 유 공이 마침 조 공의 앞자리에 있자 조 공이 그를 부르며 말하기를 “유 모(某)는 사대부과거에 오르면서 어찌 홍패 하나를 가지고 앞에서 가는가? 내가 두 개의 백패와 하나의 홍패를 천(川) 자로 나란히 세우고 있는 것을 보게나.”라고 하자 유 공이 자못 머쓱해졌다.

심재(沈 , 1722~1784), 『송천필담(松泉筆談)』

조관빈이 진사시생원시에 모두 합격하고 문과까지 급제하였음을 내세우자 유척기는 기가 한풀 꺾였던 것이다. 소과와 대과에 모두 합격했다고 해서 승진에 더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조관빈과 유척기의 경우만 보더라도 조관빈은 대제학과 판서에 그쳤던 반면 유척기는 영의정에 올랐다. 과거는 관료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지만 학문적 능력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김상복(金相福, 1714~1782)은 소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곧장 대과에 급제하여 지위가 영의정에 이르렀지만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면 늘 소과에 급제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림으로 유명한 김안국(金安國, 1478~1543)진사시에 장원을 하였지만 생원시진사시 모두 장원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러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이(李珥, 1536~1584)생원시진사시를 비롯한 각종 시험에 응시하여 여러 차례 합격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김홍도, 「모당평생도」 중 응방식(應榜式)
김홍도가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의 일생을 그린 그림 가운데 하나로 과거에 급제하여 삼일유가(三日遊街)하는 장면이다.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자료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 주제별 문화원형 > 회화 > 풍속화 콘텐츠 > 모당평생도 응방식

이이처럼 여러 차례 과거에 장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실제 과거에 급제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 시대의 1년 평균 문과 급제자 수는 3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응시하는 사람은 많은 데 반해 합격자 수는 적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였다. 그래서 벌어지는 과장(科場) 풍경 가운데 하나가 시권(試券), 곧 답지를 먼저 내려는 다툼이었다. 답안지가 너무 많아 일일이 채점하기 어려워 먼저 낸 사람들 위주로 점수를 매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은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세태가 각박해져 답지를 먼저 내기 위한 다툼이 심해졌다며 자신의 경험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사료 1-1-05〕

지난 갑인년(1794) 춘도기(春到記) 대궐 시험장에서 두 사람이 내 옆에 같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갑은 문장이 제법 좋았고 을은 그렇지 못하였는데 을이 주위에서 노복처럼 시중을 들고 있었다. 갑이 답안을 다 쓰고 일어나 제출하려고 하자 을이 “자네 시권은 내가 제출할 테니 자네는 나를 위해 내 시권을 마저 써서 제출해 주게나.”라고 하였다. 시권을 제출하면 바로 나가는 것이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갑은 을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를 둘둘 말아 훌훌 털고 나가버렸다. 을은 겸연쩍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앉아 있었다. 마침 나는 시권을 거의 다 썼기에 “급한 불을 끄는 데 친소(親疏)를 따질 것 있나요? 내 시권을 제출하시오. 내가 그대를 위해 힘을 써보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을은 크게 기뻐하면서 시권을 가지고 나갔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심노숭은 두 사람이 모두 소론 명문가의 자제로 아주 가까운 인척 사이인데도 그러하였다며 인심이 각박해지는 현실을 탄식하였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심노숭이 과거 부정에 해당하는 행위를 인정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식인들이 과거 부정에 얼마나 무감각하였는지 잘 보여 준다.

김홍도,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
과거 시험장의 풍경을 묘사한 그림으로 윗부분에는 강세황(姜世晃)이 쓴 제발(題跋)이 있다.
(소장 : 미국 개인 소장가)
자료 출처 ▶ 〈서울신문〉, 2007년 4월 12일, 26면 > 문화 > 김홍도 ‘과거시험장’ 첫 공개

과장에서의 부정행위는 조선 전기에도 많이 일어났다.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때 외척 권신 이량(李樑)의 아들인 이정빈(李廷賓)은 표절로 장원을 하고도 요직을 차지하자 공론이 일어나 삭직을 당하였고, 여계선(呂繼先)이라는 이는 차천로(車天輅)의 글을 표절하여 장원했다가 탄로나 국문을 당하고 과거 합격이 취소되기도 하였다. 과거 부정은 후대로 갈수록 심해져 돈을 받고 답안을 대신 지어 주는 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경상남도 합천군의 유광억(柳光億) 같은 이는 과시(科詩)를 잘하기로 영남에서 소문이 났는데 서울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큰돈을 받고 대리 시험을 치러 여러 사람들을 합격시켰다고 한다.

과거가 엄격하게 관리되지 못하자 함량 미달인 자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심재는 대제학이나 정승⋅판서의 반열에 오른 이들을 보면 문장 실력이 소과에 합격하지 못한 이름 없는 선비 정도이면서도 거듭 벼슬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정한 방법을 쓰지 않고 낙방한 것이 칭송 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척화파 대신 김상헌(金尙憲)의 손자 김수증(金壽增)이 그러한 경우였다.

〔사료 1-1-06〕

근래 경외 유생들이 대소 과장(科場)에서 대개 구차한 일을 면치 못하여 간혹 의심스럽다는 시비를 많이 듣게 된다. 그러나 김수증만은 상국(相國) 청음의 손자이며 영의정 김수흥과 김수항 두 사람의 형인데 그 글을 읽은 것이나 착실한 공부가 범상한 선비에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과거를 보러 가서는 시험관의 취하고 버리는 데만 맡기고 한 번도 시속(時俗)의 구구한 짓을 아니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붉은 종이 위에 이름 쓰는 것을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분수를 편안하게 여기고 한가하게 살면서 오직 문집과 사기를 읽으며 글쓰기와 그림 그리는 것으로 혼자 세월을 보내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인격이 청백하고 지조가 높은 것을 탄복하였다.

정재륜(鄭載崙, 1648~1723),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과거가 관료 선발 장치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음서(蔭敍)가 성행하였다. 고려에 비해 조선에서는 음서제의 비중이 크게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고려 시대의 경우 5품 이상 관리의 친속(親屬) 1인에 한해 과거를 보지 않고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될 수 있었던 데 반해 조선 시대에는 공신 및 2품 이상의 친속을 대상으로 하였다. 대상도 축소되었지만 음서 자체에 대한 인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즉 고려 시대의 음서는 대단히 권위 있는 제도였지만 조선 시대에는 과거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음서제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료에 나타나는 상황은 그러한 추측과는 다르다.

〔사료 1-1-07〕

당하관이 맡은 관직으로 정부(政府)⋅양사(兩司)1)⋅사관(四館)2) 및 이조⋅병조⋅예조 등 3조와 태상(太常)3) 외에는 모두 문음(門蔭) 출신을 임명한다. 지방관에 이르러서는 문관으로 군수 자리를 얻은 사람은 겨우 스물에 하나 정도이니 선왕 때와는 크게 다르다. 이른바 문인이라는 것은 이름난 인사의 아버지나 형이 아니면 반드시 자식이나 아우이다. 그러니 혹 나이가 이미 늙었거나 혹 아직 젖 냄새 나는 아이이다. 그런데도 함부로 고을 다스리는 일을 탐내 문득 돈을 움켜잡으려 손을 제멋대로 놀려서 백성들의 고혈이 이미 말랐는데도 오히려 더 빼앗아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나도 돌아보지 않는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효빈잡기(效嚬雜記)』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대 당시의 상황을 지적한 것인데 『효빈잡기』의 저자 고상안은 내직과 외직을 막론하고 문음 출신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고상안은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광해군 대에 들어 과거제가 크게 문란해지고 문음이 성행하였다고 지적하면서 능력 없는 문음 출신들의 탐학 때문에 백성들이 큰 해를 당하고 있다고 탄식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음서제는 문벌을 재생산하는 장치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었다. 때문에 1788년(정조 12) 장령 오익환(吳益煥, 1754~1797)은 권세가의 자제들은 문음으로 벼슬에 올라 시간이 지나면 승진하여 지방관으로 나가는 데 반해 과거에 급제한 이들은 집안이 좋거나 연줄이 있지 않으면 관직에 기용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1)사헌부와 사간원
2)성균관⋅교서관⋅승문원⋅예문관
3)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 국가적인 제사 및 시호 제정 관련 업무를 관장하던 봉상시(奉常寺)의 다른 이름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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