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식적인 천민, 노비
노비는 조선 시대의 최하층 신분이다. 물건처럼 사고 팔렸던 데서 노비의 처지는 단적으로 드러난다. 노비는 개인에게 예속된 사노비와 관에 소속된 공노비로 크게 구분되었는데 사노비는 주인집의 가사 노동을 비롯한 온갖 잡무를 도맡아 하였고 공노비는 관청에서 잡역을 담당하였다. 조선 시대에 사노비가 없는 양반의 삶이나 공노비가 없는 관청의 모습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최하층 천민이었던 노비의 처지는 그야말로 열악하였는데 다음 일화는 이를 잘 보여 준다.
〔사료 4-1-01〕
내가 젊은 시절 금천 시골집에서 책을 읽고 지낼 때였다. 봄날 한강의 얼음이 단단하지 않아 행인들이 많이 빠져 죽었다. 한 의금부 종이 등에 쌀을 지고 강을 건너는데 얼음이 꺼져 몸의 절반만이 얼음 위에 걸쳐 있게 되었다. 같이 가던 이가 “등에 지고 있는 짐을 풀어 버리면 살 수 있네.”하고 말하자 의금부 종이 말하기를 “당신이 나보고 이 짐을 버리라고 하는가? 이 짐을 버리고 산다면 살아서 당할 고통이 죽는 것만 못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얼마 안 있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어우야담(於于野談)』
아마도 유몽인이 전해들은 이야기로 생각된다. 유몽인은 의금부 종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한편 종이 스스로 목숨을 포기할 만큼 가혹한 환경에 혀를 찼다. 임매(任邁, 1711~1779), 『잡기고담(雜記古談)』에서 “게으른 사람을 꼭 ‘종놈[奴隷]’이라고 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자를 조롱할 때는 반드시 ‘종놈의 재간[奴才]’이라고 한다.”면서 조선에서는 종들을 짓밟기를 마치 개와 돼지, 소와 말처럼 한다고 지적하였다.
임매의 말처럼 노비의 처지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노비의 상황이 모두 그러하였던 것은 아니다. 사노비의 경우 그의 지위는 일단 모시는 상전이 누구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상전의 지위가 낮을 때 그의 노비 또한 처지가 열악한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권세가를 주인으로 둔 노비 가운데는 주인을 믿고 위세를 부리는 자들도 있었다. 아래 자료는 황소(黃釖, 1647~?)라는 이가 약관 시절 직접 목격했다는 내용이다. 황소가 하루는 노량진 나루에 가게 되었는데 한 선비가 와 보라고 해서 가 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사료 4-1-02〕
그곳에는 가마 하나가 땅에 내려져 있었는데 벌써 반쯤은 부서진 상태였다. 가마 안에서는 어떤 부인의 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고 또 열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가마 뒤에 서서 울고 있었다. 종이나 말은 보이지 않았다. 선비가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 부인 일행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복창군(福昌君, 1641~1680)의 궁노 십여 명이 말을 타고 오면서 가마를 치고 지나가더이다. 그래서 가마채를 잡은 하인들이 이를 항의했더니 궁노들이 화를 버럭 내며 십여 명이 동시에 말에서 내려서는 가마부터 끌어내리고 욕을 하며 ‘우리가 이 여자를 범하겠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더니 가마를 때려 부수고 가마꾼과 말도 두들겨 패 가마꾼과 말은 바람이 눕듯 달아나 버렸지요. 그리고 궁노들은 모두 말을 타고 유유히 가더군요.” 그러면서 선비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저기 앞에 가고 있는 자들이 그들이라고 일러주었다.
임방(任埅, 1640~1724) 『천예록(天倪錄)』
인용문의 뒤에는 홀연 한 무사가 추격을 해 와 등자를 휘둘러 궁노들을 모두 말에서 떨어뜨리고는 혼을 내주었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패거리 가운데 궁노는 네 명이고 나머지는 궁노를 따라 악행을 저지르는 다른 집의 종들이었다고 한다. 종을 거느리고 가마를 탔다면 양반집 여성일 텐데 궁노들이 양반집 여성을 이렇게 욕보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천예록(天倪錄)』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은 사실과 동떨어진 황당한 것들이 많아 위의 자료도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일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러나 허구적인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줄거리가 만들어진 것은 행패를 일삼는 권세가의 노비들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관에 소속되어 있던 공노비의 경우도 관리들을 믿고 위세를 부릴 수 있었다. 공노비였던 조막동(趙莫同)은 젊은 시절 자신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료 4-1-03〕
조막동은 천한 종으로 관가에서 먹고 살다가 그 몸을 마쳤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젊어서 5부(五部) 사령(使令)이 되어 부의 관리가 길 닦는 것을 감독하러 가면 나도 반드시 따라갔는데 근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장만하라고 요구하여 마음대로 마시고 배부르게 먹고는 그 나머지를 두었다가 해가 저물어 관원이 시장해 할 때를 기다려 가져다 바치면서 말하기를 ‘마침 적은 음식을 준비하여 감히 한 번 맛볼 자료를 장만했습니다.’라고 하면 관원들이 매우 좋아하면서 먹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정재륜(鄭載崙, 1648~1723),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관청의 잔심부름꾼에 불과한 막동이 관리의 묵인하에 백성들을 상대로 행패를 부렸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막동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천인 신분인 막동의 실제적인 지위는 일반 백성들보다 오히려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노비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상전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상전과의 불화로 노비가 상전을 살해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때 원영사(元永思)의 노비였던 충개(蟲介)와 복수(福守) 부부가 상전과 갈등을 겪은 끝에 주인집 가족을 살해하였다. 원영사는 충개를 첩으로 데리고 있다가 내보냈는데 충개가 복수와 혼인하자 충개 부부에게 과도한 신공을 부과하였다. 그 때문에 충개 부부는 그에 앙심을 품고 주인 가족을 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주인을 살해한 노비는 목숨을 보전할 수 없었다.
반면 주인과 인간적 유대 관계를 맺고 있던 노비들도 많이 존재하였다. 다음은 경평군(慶平君)1)의 종이었던 김예봉(金禮奉, 1601~?)의 일화이다.
〔사료 4-1-04〕
김예봉은 경평군의 종이었다. 말을 잘 훈련시켜 팔아서 돈을 모았다. 숭정 병자년 겨울에 말 1필을 전창위(全昌尉) 유연량(柳延亮) 집에 팔았다. 비싼 값을 받은 지 10일이 되기도 전에 북쪽 변방에서 적이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왔다. 예봉이 돈을 돌려주며 말을 달라고 말하기를 “우리 집주인이 피난을 가야 하는데 탈것이 없어 이 말로 모시려고 합니다. 말 값이 비싸도 상관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유 공이 종으로 주인과의 의리를 내세웠으므로 곧 말을 내주었다. 예봉이 과연 이 말로 경평군을 모시고 능히 난을 피했다.
정재륜(鄭載崙, 1648~1723),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난이 끝난 후 예봉은 주인에게 충직한 종이라는 칭찬을 받았고 이 일로 면천되어 뒤에 무과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실제 『무과방목(武科榜目)』에 김예봉은 면천(免賤)된 후 37세 되던 1637년(인조 15)에 무과에 급제한 것으로 나와 있다. 흔한 일은 아니겠지만 상전의 배려로 학문을 익히고 양반들과 교유하는 노비도 있었다. 동서 분당의 빌미를 제공하였던 심의겸(沈義謙)의 아우이자 명종 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인 심충겸(沈忠謙, 1545~1594)의 종 서씨가 그러한 경우였다.
〔사료 4-1-05〕
서 아무개는 심충겸의 종이다. 학문을 약간하여 헛된 명성이 있었다. 그러자 그 주인이 그를 놓아주어 일을 시키지 않고 한가롭고 편안히 살게 하였다. 경진년과 신사년 사이에 공산과 유성에 살았는데 내가 일찍이 그와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서가 “성은 진실되고 정은 거짓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상대하여 변론하였으나 그의 생각은 돌릴 수가 없었다. 그 사람 됨됨이가 이와 같이 흐리멍덩한데도 한 시대의 많은 선비가 그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효빈잡기(效嚬雜記)』
『효빈잡기(效嚬雜記)』의 저자 고상안(高尙顔, 1553~1623)은 서씨의 수준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서씨는 양반들의 스승이 되어 그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심충겸의 배려가 없었다면 서씨는 애초에 학문을 익힐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서씨의 학문이 높아지자 심충겸은 아예 서씨를 자유롭게 해 주었다. 재상 심열(沈悅)의 종이었던 서기(徐起, 1523~1591)는 심열이 세상을 떠난 후 심열의 아들을 가르쳤으며 조헌(趙憲)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서기가 이렇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심열이 서기를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주인과 인간적인 유대를 맺고 있던 노비들도 있었지만 이는 특수한 사례일 뿐이다. 대다수의 노비는 인격적으로 예속된 최하층 신분일 뿐이었다. 그들은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였는데 이는 다음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사료 4-1-06〕
양민과 천민은 서로 혼인을 맺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부유하면서 친족들이 강성한 노비들은 갖은 방법을 다 써서 노비 대장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신분을 숨길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상전을 살해하는 자도 있었다. 근세 이래로 법망이 느슨해져서 오늘날에는 양민과 천민의 경계가 거의 흔적도 없이 되어 버렸다. 내가 듣자니, 백여 년 전에는 가난하고 몰락한 양반이 추노(推奴)를 하러 갔다가 해를 당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임매(任邁, 1711~1779), 『잡기고담(雜記古談)』
아예 노비 대장에서 이름을 빼거나 심지어 상전을 살해하는 등의 방법으로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다. 노비들이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고자 했던 상황은 1684년(숙종 10) 적발되어 큰 충격을 준 살주계(殺主契)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살주계’는 글자 그대로 주인을 살해하기 위한 목적에서 결성된 계 조직이다. 계원 가운데는 당시 남인 실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목래선(睦來善, 1617~1704)의 노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살주계를 조직한 사실이 발각되자 목래선은 자신의 노비를 잡아 죽였다. 포도청에서 관련자들을 신문한 기록에 따르면 살주계원들은 모두 칼을 차고 있었고, ‘양반을 죽일 것’, ‘부녀자를 겁탈할 것’, ‘재산을 탈취할 것’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고 한다. 또 남대문과 언관(言官)들의 집에 ‘우리들이 모두 죽지 않는 한 끝내는 너희들의 배에 칼을 꽂으리라’라는 섬뜩한 내용의 방을 붙인 사실도 자백하였다. 살주계 사건은 노비들의 양반에 대한 적개심과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얼마나 컸던가를 잘 보여 준다.
위에서 제시한 『잡기고담』에 따르면 18세기 당시 양인과 천인의 경계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실제 ‘양천교혼(良賤交婚)’ 즉 양인과 천인 사이의 혼인이 널리 행해지면서 양인과 천인의 구분이 이전에 비해 모호해져 갔다. 그렇다고 노비들의 신분제에 대한 불만이 해소되었던 것은 아닌데 이는 다음 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료 4-1-07〕
혜화문(惠化門) 밖의 냇가 동쪽에 석벽이 있었다. 거기에 돌로 만든 처마가 덮여 있고 두 개의 기둥이 지탱하고 있는데 기둥 역시 모두 돌로 만든 것이다. 벽면에 불상 하나가 조각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노비부처[奴佛]’라 부르고 그 시내를 ‘불천(佛川)’이라 이름 지었다. 도성 동쪽의 나무하는 노비들이 날마다 그 밑에 모여들어 올려다보며 욕하기를, “우리를 남의 종으로 만든 놈이 이 불상이다. 불상이 무슨 면목으로 우리를 쳐다본단 말인가.” 하면서 낫을 추켜들어 눈을 파내니 불상의 두 눈이 모두 움푹 파였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노비로 태어난 자신들의 억울한 심정을 애꿎은 돌부처에게 화풀이하는 모습에서 노비들의 불만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러나 노비들의 처지가 점차 개선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결국 1801년(순조 1) 공노비들이 우선적으로 천민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