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이야기 고려사3. 고려 중기 정치 이념의 분화와 발전

2) 정치 사상의 갈등이 고려 왕조를 뒤흔들다

인종서경묘청⋅백수한⋅정지상 일파는 국왕에게 서경 천도를 건의하고, 칭제 건원(稱帝建元), 즉 황제가 되어 독자의 연호를 쓰면 금나라가 항복을 하고 주변의 여러 국가가 고려에 복속할 것이라 했습니다. 유교 관료 집단의 대표격인 김부식과 새로운 외척으로 등장한 정안(定安) 임씨 임원애(任元敱) 등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종서경 세력을 정치 파트너로 삼아 새로운 정치를 시도합니다. 이는 정치 사상사적 차원에서 매우 주목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1129년(인종 7) 1월 서경에 신궁(新宮)인 대화궁(大華宮)이 완성되고, 다음 달 인종서경에 행차합니다. 이때도 묘청 일파는 칭제 건원을 건의하고, 과거 북송의 영토인 황하 유역을 다스리기 위하여 산동의 유예(劉豫)를 황제로 삼은 금의 괴뢰 국가인 대제(大齊)국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협공할 것을 제의합니다.

1131년(인종 9) 8월 대화궁의 외성(外城)인 임원 궁성(林原宮城)이 완성되자, 신궁(新宮)에 다음과 같은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합니다.

〔사료 3-2-01〕 『고려사』 권 127 묘청 열전

묘청은 왕을 달래어 임원 궁성을 쌓고 팔성당을 궁중에 설치하게 했다. 팔성(八聖)은 첫째, 호국 백두악(護國白頭嶽) 태백 선인(太白仙人)이며, 실체는 문수 사리 보살(文殊師利菩薩)이다. 둘째, 용위악(龍圍嶽) 육통 존자(六通尊者)이며, 실체는 석가불(釋迦佛)이다. 셋째, 월성악 천선(月城嶽天仙)이며, 실체는 대변 천신(大辨天神)이다. 넷째, 구려 평양 선인(駒麗平壤仙人)이며, 실체는 연등불(燃燈佛)이다. 다섯째, 구려 목멱 선인(駒麗木覓仙人)이며, 실체는 비파시불(毗婆尸佛)이다. 여섯째, 송악(松嶽) 진주 거사(震主居士)이며, 실체는 금강색 보살(金剛索菩薩)이다. 일곱째, 증성악 신인(甑城嶽神人)이며, 실체는 늑차 천왕(勒叉天王)이다. 여덟째, 두악 천녀(頭嶽天女)이며, 실체는 불동 우파이(不動優婆夷)이다. 모두 그 화상(畵像)을 설치했다. 그리고 김안(金安)⋅이중부(李仲孚)⋅정지상(鄭知常) 등이 말하기를, ‘이는 성인의 법이요, 나라를 이롭게 하고 국기(國基)를 연장시키는 술(術)이다.’라고 했다. 김안 등은 또 팔성에 제사할 것을 왕에게 건의했다.”

위의 기록은 묘청 일파의 또 다른 사상을 살피는 데 참고가 되는 기록입니다. 8성은 각각 국내 8개의 명산(名山)을 주가(住家)로 하면서, 각각에 선불(仙佛)의 신격(神格)을 설치한 것입니다. 주목되는 사실은 각 성당(聖堂)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앞부분에는 산의 명칭에다 선인⋅천신의 명칭이 결합되어 있고, 뒷부분에는 그 실체로서 부처⋅보살⋅천왕의 명칭이 붙어 있습니다.

이는 본지 수적설(本地垂迹說)과 관련이 있습니다. 뒷부분의 실체로 기록된 여러 부처를 본지(본신(本身), 본체(本體))로 하고, 뒷부분의 산악 명칭과 결합된 선인(仙人)을 수적(관현(權現), 묘용(妙用))으로 하여 국내의 주요 8개 산에 배치한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호국 백두악은 백두산, 용위악은 대화궁의 주산(主山), 월성악은 황해도의 토산(兎山), 구려 평양 선인은 평양의 선인, 구려 목멱은 평양의 목멱산, 송악은 개경의 송악산, 증성악은 황해도의 증산, 두악은 강화도의 마니산으로 추정합니다(이상 이병도, 『고려 시대의 연구』, 아세아문화사, 1980, 204-207쪽 참고). 이로 보아 8성당은 고유의 산악 숭배 사상과 도교, 불교 사상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결국 8성당 설치를 통하여 묘청 일파가 풍수지리와 도참사상 외에도 불교와 도교, 산악 숭배 사상을 중시했던 사상 경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 주요 명산 가운데 백두산, 평양 선인, 평양 목멱산 등 대부분의 산은 대체로 옛 고구려 영역 내에 있습니다. 더욱이 평양은 단군왕검의 고조선 도읍지이자, 이후 기자가 정주한 곳으로서, 고려 때 이곳에 기자 묘가 설치된 곳이기도 합니다. 증성악도 단군 신앙이 행해진 곳입니다. 따라서 묘청 일파는 고구려의 전통을 강조하고, 이를 계승하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건국 직후 태조는 옛 고구려의 수도인 서경을 중시하고, 이곳을 북진 정책의 기지로 삼아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려 했습니다. 서경 지역의 이러한 상징성은, 2백여 년이 지난 시점에도 고구려 계승 의식과 함께 금나라 정벌을 주장한 묘청 일파에게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료 3-2-02〕 『고려사절요』 권 10 인종 10년 1월 조

“(개경에) 처음으로 궁궐을 세우는데 그 터를 닦을 적에 묘청이 평장사 최홍재(崔弘宰) 등 재신 3, 4명과 공사를 담당한 관원⋅관리들로 하여금 모두 공복을 입고 차례대로 서게 하였다. 장군 4명은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사방에 서게 하고, 군사 1백 20명은 창을 들었으며, 3백 명은 횃불을 들고 20명은 촛불을 들어 둘러서게 하였다. 묘청은 한가운데서 3백 60보 길이의 흰 삼으로 된 끈 네 가닥을 사방으로 당겨 술법을 쓰며 말하기를, ‘이것은 태일 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인데, 선사 도선(道詵)이 강정화(康靖和)에게 전수하였고, 정화가 나에게 전수한 것이요, 내가 늙어서는 백수한에게 전한 것으로 여러 사람이 아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묘청 일파는 1132년 1월 개경 궁궐의 수축에 ‘태일옥장보법’이라는 비술(秘術)을 활용합니다. 이 비술은 도선-강정화-묘청-백수한으로 이어진다고 했는데,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술법, 즉 병가 압승(兵家壓勝)의 술법입니다. 주목되는 것은 이 무렵이면 서경뿐만 아니라 개경에까지 묘청 일파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유교 정치 이념을 지닌 개경 정치 세력과의 정치적, 사상적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묘청 일파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데, 다음의 기록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료 3-2-03〕 묘청 일파에 대한 비판과 반발 1

1) “뒤에 중군(中軍; *김부식)이 말하기를, ‘윤언이가 정지상과 결탁하여 서로 죽기로 맹세한 당이 되어 대소의 일을 진실로 함께 의논하였고, 임자년(1132, 인종 10)에 임금이 서경으로 행차하실 때 글을 올려서 건원(建元)하고 황제로 칭하기를 청했으며, 또 국학생을 시켜 앞의 일을 아뢰게 하였습니다. 이는 금나라를 격노케 하였고 그 틈을 타서 뜻을 방자히 하여 자기 당이 아닌 사람은 처치하고 반역을 꾀하고자 한 것이니, 신하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고려사』 권 96 윤언이 열전)

2) “왕이 서경에 행차하자, 정지상과 김안이 묘청과 함께 속여 말하기를, ‘대동강에 서기(瑞氣)가 있으니 이는 신룡(神龍)이 침을 토한 것입니다. 이는 천년 동안에 만나기가 드문 것이니 천심에 순응하여 존호(尊號)를 칭하여 금나라를 누르자.’고 건의했습니다. 왕이 이지저(李之底)에게 묻자, ‘금나라는 강적이라 가볍게 여기지 못합니다. 양부 대신이 개경에 있으니, 한두 사람의 말을 치우쳐 듣고 대계(大計)를 결정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왕이 이 말을 따랐다.”(『고려사』 권 97 이지저 열전)

사료 1)에는 칭제 건원론에 대한 김부식의 생각이 윤언이 열전에 간접적으로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묘청 일파의 칭제 건원론은 고려와 금나라 사이를 불편하게 했으며, 그러한 불편한 관계를 틈타 반역을 꾀하려는 음모로 보았습니다. 이같이 김부식은 칭제 건원론 자체를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료 2)는 1132년 3월 묘청 일파의 금나라 정벌론에 대하여 이지저는 금나라는 강국이기 때문에 쉽게 결정할 수 없으며, 개경의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정할 일이라 했습니다. 이는 금나라 정벌론을 우회적으로 반대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료 3-2-04〕 묘청 일파에 대한 비판과 반발 2

3) “(인종) 11년(1133, 3월) 직문하성 이중(李仲), 시어사 문공유(文公裕) 등이 상소하기를, ‘묘청⋅백수한은 요망한 사람이며, 그 말이 해괴하여 믿지 못할 자입니다. 근신 김안⋅정지상⋅이중부(李仲孚), 환자(宦者) 유개(庾開)가 결속하여 심복이 되어서 여러 차례 서로 의논하고 천거하여 성인으로 삼고 또 대신이 따라서 이를 믿습니다. 이 때문에 왕께서는 이를 의심하지 않으시나, 정인(正人)과 직사(直士)는 모두 이를 미워하여 원수같이 여깁니다. 바라건대 속히 (근신들을) 물리쳐 멀리하십시오.’라고 했다. 말이 매우 간절하고 곧았으나, 국왕이 대답하지 않았다.”(『고려사』 권 127 묘청 열전)

4) “임원애(任元敱)가 상서하기를, ‘묘청과 백수한 등은 간사한 꾀를 방자히 하여 해괴한 말로 민심을 미혹하게 하며 한두 대신과 근시(近侍)하는 사람도 깊이 그 말을 믿고 국왕을 미혹하게 하였으니 신은 장차 불칙한 환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묘청 등을 저자에서 죽여 화의 싹을 끊으십시오.’라고 했으나, 국왕은 답하지 않았다.”(『고려사』 권 127 묘청 열전)

5) “폐하께서 묘청을 총애하시니 좌우의 근신과 대신들이 번갈아 (묘청을) 추천하여 성인으로 생각하는데, 그 뿌리가 깊고 꼭지가 여물어 확고하여 뽑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화궁 공사에서부터 백성을 괴롭게 하고 뭇 사람을 동요케 하여 백성이 원망하고 탄식했습니다. 지난해 순행하실 때 재앙이 불탑에서 나타났고 금년 순행에서는 유성(流星)이 떨어지고 말이 놀라는 마경(馬驚)이 잇따라 나타났습니다. 또한 이 궁궐은 복을 구하기 위한 것인데, 이미 7, 8년이 되어도 한 가지 좋은 징조도 없고 재변만 거듭 일어나니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늘의 뜻이 간사한 사람이 임금을 현혹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사람은 비록 속일 수 있으나 하늘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전일의 재변은 하늘이 폐하를 경계하여 깨닫게 한 것이니, 폐하는 어찌 한 명의 간신을 아껴서 하늘의 뜻을 어기십니까. 원컨대 폐하는 위엄을 떨쳐 묘청의 머리를 베어 위로는 하늘의 경계함에 보답하시고 아래로는 민심을 위로하십시오.”(『고려사』 권 98 임완 열전)

위의 기록은 당시 묘청 일파에 대한 개경 정치 세력의 반발이 상당히 컸음을 잘 보여 줍니다. 사료 3)은 이중⋅문공유 등이 묘청을 성인으로 받드는 김안⋅정지상⋅이중부 등 국왕의 근신을 비판하면서, 이들을 멀리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바르고 곧은 선비는 모두 이들을 원수같이 여기고 있다고 하여 당시 개경 정치 세력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묘청 일파의 득세에는 국왕과 그 측근 세력의 지원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자료입니다. 사료 4)는 국왕의 장인인 외척 임원애의 상소인데, 묘청 일파는 민심을 현혹시켰으며, 국왕 측근은 묘청 일파의 말을 믿어 국왕을 현혹시켰다고 합니다. 이는 결국 환란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묘청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133년(인종 11) 8월에 올린 상소입니다. 사료 5)에서 임완은 당시의 잦은 재변은 묘청 일파에 대한 하늘의 경고이며, 묘청을 처단하는 것이 하늘의 뜻에 보답하고 민심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천인 감응(天人感應) 사상에 입각하여 묘청 일파를 비판한 내용입니다. 임완의 상소는 1134년 5월에 올린 것입니다.

묘청 일파는 이자겸의 난 이후 왕실과 왕권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려는 국왕 인종과 그 측근 세력들이 결합하면서 고려 정국에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1127년(인종 5) 인종서경 행차가 그들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들은 풍수도참 사상에 입각하여 개경의 지덕이 쇠하였기 때문에 길지인 서경에 새 궁궐을 지어 이곳에서 새로운 정치를 펼칠 것을 요구합니다. 1129년 대화궁이 완성되자, 묘청 일파는 칭제 건원과 금나라 정벌을 주장합니다. 1131년 대화궁 주변의 임원 궁성이 완성되자, 산악 숭배 사상, 불교 및 도교 사상에 입각하여 8성당을 설치합니다. 서경 행차 이후 약 4, 5년 동안 서경 세력인종과 결탁하여 당시의 정치를 주도해 나가는 형국이었습니다.

개경 세력의 반대는 앞에서 인용한 사료에서도 알 수 있듯이 1132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료 1)과 2)는 묘청 일파의 칭제 건원과 금국 정벌론에 대한 개경 세력의 비판이 담긴 자료입니다. 사료 3), 4) 그리고 5)는 서경 세력의 사상에 대한 반대를 뛰어넘어, 묘청을 처단해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개경서경 정치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은 원초적으로 서로 다른 이질적인 정치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이 무렵이 되면 두 세력은 정치 사상의 대립과 갈등을 뛰어넘어 정치적⋅물리적 충돌, 즉 내란이라는 심각하면서도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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