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보는 한국사이야기 고려사3. 고려 중기 정치 이념의 분화와 발전

5) 사상의 지형이 다른 두 역사책; 『삼국사기』와 『편년통록』

다양한 정치 사상이 등장하여 대립과 갈등을 벌이던 고려 인종의종 대에 주목할 만한 역사서가 편찬됩니다. 김부식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나서 10여 년이 지난 1145년(인종 23), 고구려⋅백제⋅신라(통일신라 포함)의 역사를 담은 『삼국사기』를 편찬합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인 의종 때(1157-1160년 무렵) 김관의(金寬毅)가 『편년통록(編年通錄)』을 편찬합니다.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고려사』의 첫머리인 「고려 세계(高麗世系)」에 고려 태조의 6대조에 관한 서술에서 이 책의 내용을 옮겨 적고 있어, 이 책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책은 약 10년의 시차를 두고 편찬된 같은 시기의 역사서이지만, 서로 다른 역사관에 입각하여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이를 통하여 고려 중기의 역사 의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 사상까지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삼국사기』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편찬 후 국왕 인종에게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를 올립니다. 여기에서 이 책의 편찬 의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료 3-5-01〕 『동문선』 권 44 「진삼국사기표」

“신(臣) 부식(富軾)은 아룁니다. 옛날 여러 나라는 각기 사관을 두어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그 까닭에 맹자는, ‘진(晉)의 승(乘), 초(楚)의 도올(檮杌)과 노(魯)의 춘추(春秋)는 같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해동(海東)의 삼국은 역사가 오래되었으니, 마땅히 그 역사를 드러내어 책에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저에게 명하여 역사를 편찬하게 했습니다.”

출처: 문화체육관광부 선현의 표준영정

김부식은 중국 역대 왕조가 사관을 두어 역사서를 편찬했듯이, 우리나라 삼국도 오랜 역사를 지녔기 때문에 역사서를 편찬해야 하며, 국왕 인종의 명령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왕명에 의하여 편찬된 관찬(官撰) 사서로, 편찬 책임자 김부식의 개인 저술인 사찬(私撰) 사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요 역사 사건의 경우 그 끝에 김부식의 견해를 담은 사론(史論) 31개가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하여 김부식의 역사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삼국사기』는 삼국의 역사를 서술한 부분과 김부식의 역사관이 담긴 사론, 이렇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삼국의 역사라 하더라도 당시까지 전해 오던 자료를 취사 선택하는 과정에서 김부식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없지 않았기에,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반드시 올바르지는 않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김부식의 글을 보면 마치 처음으로 삼국의 역사를 편찬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 시기에 이미 고구려에서는 『유기(留記)』와 『신집(新集)』이, 백제에서는 『서기(書記)』가, 신라에서는 『국사(國史)』가 편찬되었습니다. 고려 왕조의 경우에는 광종 때 『삼국사(三國史; 또는 구삼국사(舊三國史))가 편찬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때 다시 『삼국사기』를 편찬했을까요? 바로 이 점에서 이 책의 편찬 배경과 특징을 찾을 수 있으며, 아울러 당시의 시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김부식이 올린 글을 인용하기로 하겠습니다.

〔사료 3-5-02〕 『동문선』 권 44 「진삼국사기표」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상 폐하는 중국 요 임금의 문사(文思)를 타고났고, 우 임금의 근검함을 체득하여 밤낮의 여가에 옛 역사를 널리 읽고 말씀하시기를,

‘오늘날 학사 대부가 오경(五經)과 제자(諸子)의 서적, 진나라와 한나라의 역사는 두루 통하고 자세히 설명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매우 한탄스럽다. 더욱이 신라⋅고구려⋅백제는 나란히 나라를 세워, 예(禮)로써 중국과 서로 통하였다. 그 까닭에 범엽(范曄)의 『후한서』, 송기(宋祁)의 『당서』 열전에 삼국의 사실이 실려 있다. 그런데 중국의 사실은 자세히 다루고 외국의 사실은 간단히 다루어, 삼국의 역사가 모두 갖추어 실려 있지 않다. 또한 고기(古記; 옛 기록)는 문자가 졸렬하고 역사도 빠지고 없어진 것이 많다. 이 까닭에 군주의 선하고 악함, 신하의 충성과 사악함, 국가의 편안함과 위태로움, 백성에 대한 통치의 잘잘못을 모두 드러내어 그것을 권장하고 경계할 수 없다. 마땅히 훌륭한 역사가의 재주를 가진 자를 얻어 나라의 역사를 완성함으로써 태양과 별과 같이 밝게 만세에 전하고자 한다.’

라고 했습니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지금의 학사 대부들은 5경과 제자, 그리고 중국의 역사는 잘 알고 있으나 정작 우리나라의 역사는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원인에 대하여 김부식은 삼국이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했던 사실이 중국 역사서에 실려 있는데, 거기에 중국의 역사는 자세히 다루었으나 삼국 자체의 역사에 대해서는 소략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소략한 내용으로 채워진 삼국의 역사를 보완하기 위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국사기』 편찬이 이렇듯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위의 글에 따르면, 중국 기록뿐만 아니라 고려 당시까지 전래되던 국내 기록, 즉 고기(古記)의 경우에도 문장이 졸렬하고 빠진 역사가 많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삼국의 역사가 군주의 선악, 신하의 충성과 사악함, 국가의 안위, 인민의 치란에 관한 내용이 부족하여 교훈을 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삼국사기』 편찬의 근본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 군주와 신하 등 지배층의 통치 방식과, 국가⋅인민의 안위와 치란에 관한 역사를 통하여 지금의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통치 교훈을 제대로 얻을 만한 역사서가 필요하다는 점이 『삼국사기』 편찬의 주요 목표였습니다. 즉 삼국의 역사를 유교 사관에 입각하여 새롭게 재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삼국사기』가 편찬된 것입니다. 한편 고려 초기 광종 때 편찬된 『삼국사』는 이러한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역사서라는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면서, 새롭게 삼국의 역사를 편찬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담겨 있습니다.

유교 정치 이념은 국왕과 관료 집단을 통치 주체로 하는 왕정(王政) 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념으로서, 통치 체제의 주체인 군주와 신하, 그 통치 대상인 인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과거의 역사를 재정리하려는 사관이 바로 유교 사관이며, 『삼국사기』는 그러한 사관이 잘 반영된 역사서입니다.

음양 도참 사상, 불교와 도교라는 정치 이념을 지닌 묘청 일파의 서경 천도 운동을 진압한 김부식개경의 정치 세력은 새로운 정치 이념, 즉 유교 정치 이념에 입각하여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과거 삼국의 역사를 유교 사관에 입각하여 새롭게 정리하려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편찬은 고려 초기 이래 꾸준히 성장해 온 유교 정치 이념이 12세기 정국을 주도하는 지배적인 정치 사상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역사서입니다.

한편 의종 때(1157-1160년 무렵) 김관의는 『편년통록』을 편찬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일부가 『고려사』 첫머리의 「고려 세계」 편에 실려 있어 간접적으로나마 이 책의 성격과 특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려사
출처: 문화재청

김관의가 이 책을 편찬하자, 재상 김영부(金永夫; 1096-1172년)가 이를 왕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책의 편찬에 국왕 의종과 김영부가 관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김영부는 당시의 세태를 비판한 우국 충정의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기존의 관료 집단과는 다른 성향의 인물로 추정됩니다. 문신 관료 집단과 갈등 관계에 있던 의종에게 김영부의 존재는 커다란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의 장남 김보당(金甫當)은 의종이 폐위되자 무신 정권에 반대하여 1173년 의종 복위 운동을 일으킨 인물이라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고려사』 「고려 세계」 편에는 고려 태조의 6대조인 호경(虎景)에서 시작하여 강충(康忠)-보육(寶育)-작제건(作帝建)-용건(龍建)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담긴 역사적 사실과 사상을 통하여 『편년통록』의 특징과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하 인용된 글은 『고려사』의 「고려 세계」 편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사료 3-5-03〕 『고려사』 「고려 세계」에 인용된 『편년통록』의 내용

“호경이라는 사람은 스스로 성골 장군(聖骨將軍)이라 하고, 백두산으로부터 두루 유람하여 부소산(扶蘇山; *개경 송악산) 왼편 골짜기에 와서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중략) 호경이 (함께 사냥하다 죽은) 아홉 명을 장사 지낼 때 먼저 산신(山神)에게 제사 지내자, 산신이 나타나서, ‘나는 과부로서 이 산을 주관하고 있는데 다행히 성골 장군을 만나 같이 부부가 되어 함께 신정(神政)을 다스리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이 산의 대왕이 되어 주소서.’라고 했다.”

고려 왕실의 시조 격인 호경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성골 장군 출신으로서, 개경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곳의 산신과 결합하여 대왕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고려사』 「고려 세계」 편에서는 옛 고구려 영역에 있던 백두산, 신라 왕족인 성골의 명칭을 띤 성골 장군, 송악산의 산신 등 설화적인 내용으로 호경을 미화하고 있습니다.

〔사료 3-5-04〕 『고려사』 「고려 세계」에 인용된 『편년통록』의 내용

“신라의 감간(監干) 팔원(八元)이 풍수술(風水術)을 잘하여 부소군에 왔다가 군이 부소산 북쪽에 자리잡아 산의 형세는 좋으나 초목이 없는 것을 보고, 강충에게 말하기를 ‘만약 군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하는 자가 태어나리라.’라고 하였다.”(강충의 사실(史實))

“늙은이가 말하기를, ‘동쪽 땅에서 왕이 되려면 반드시 그대의 자손 삼건(三建)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 밖의 것이라면 그대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작제건(作帝建)은 말년에는 속리산 장갑사(長岬寺)에 살며 항상 불교 경전을 읽다가 죽었다.”(작제건의 사실(史實))

“세조(世祖: 용건, 왕건의 아버지)가 송악산 남쪽에 새 집을 짓고자 할 때, 도선(道詵)이 당나라에서 일행(一行)의 지리법을 가지고 돌아와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송악산)에 와서 이를 보고, ‘기장[穄: 제(帝)와 동음(同音)으로, 제왕을 의미함]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麻]을 심었는가.’라고 했다. 또한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왕건(王建)이라고 이름하라.’라고 했다.”(용건의 사실(史實))

위의 기록에 따르면 강충은 삼한을 통합할 자가 나타난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송악산에 소나무를 심고, 작제건은 말년에 속리산에서 불경에 심취했으며, 세조는 태조 왕건의 출생을 위하여 풍수지리에 밝은 도선의 말에 따라 36구의 저택을 지었습니다.

『편년통록』은 이와 같이 불교, 도교, 풍수도참 사상에 입각하여 고려 왕실 조상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삼국사기』와는 전혀 다른 사상에 입각한 역사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편년통록』은 불교, 도교, 풍수도참 사상 등 당시 민간에 널리 전래되던 사상과 습합(習合)된 신화와 설화 형식을 빌려, 왕실 조상에 관한 사실을 역사서로 묶은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고려 왕실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편찬된, 국왕 의종이 추구하는 정치 사상의 지향성이 담긴 상징적인 역사서입니다. 과거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에 대한 역사 서술을 통하여 효과적인 통치 교훈을 얻고자 했던 유교 사관의 역사서와는 아주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교 사관을 지녔던 조선 초기의 역사가들은 이 책의 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하게 비판합니다.

〔사료 3-5-05〕 『고려사』 「고려 세계」 이제현의 찬

“옛 서적을 살펴보면, 동지추밀 병부상서 김영부와 징사랑 검교 군기감 김관의는 의종의 신하이다. 김관의가 『편년통록』을 짓고 김영부가 그것을 왕에게 바친 글에, ‘김관의가 제가(諸家)에서 갖고 있던 문서를 방문하여 그것을 모아 편찬했다.’라고 했다. 그 후 민지(閔漬)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편찬하면서, 역시 김관의의 설을 따랐다. 오직 이제현(李齊賢)이 『종족기(宗族記)』와 『성원록(聖源錄)』을 근거로 잘못 전해진 것을 바로잡았다. 이제현 같은 당대 명유(名儒)가 어찌 아무런 생각 없이 경솔하게 당시 국왕의 세계를 논했겠는가?”

고려 후기의 유교 사가 이제현이 『편년통록』에 서술된 고려 왕실의 세계를 비판한 내용이 「고려 세계」에 많이 실려 있습니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기 유교 사가들은 이제현의 비판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는 『편년통록』이 유교 사관과는 다른 입장에서 편찬된 역사서임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위의 기록에 따르면 김관의가 『편년통록』을 편찬하기 위하여 당시 민간에 널리 전해지던 자료들을 수집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유교 사관과는 다른 성향의 자료들이 널리 유행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두 사서가 편찬되었던 12세기 중엽의 사상이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 풍수지리 등의 음양 도참 사상이 함께 유행하고 있었고, 그러한 사회 분위기가 정치권에도 다양한 정치 사상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편년통록』은 다양한 정치 사상이 전개되던 당시 사정을 잘 보여 주는 상징적인 역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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