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보는 한국사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5. 고종 개혁 정책의 좌절과 평가

2) 대한제국의 개혁 사업의 평가

대한제국의 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시기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의정부 제도의 재수립과 지방 제도의 개편에 이어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이후 8월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10월에 환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갖고 대한제국을 출범시켰다.

대한제국의 개혁 이념은 ‘구본신참(舊本新參)’이라는 용어로 불렀다. 당시 갑오개혁으로 인해 폐지된 옛 제도와 새로운 제도와의 갈등과 부조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반성하면서 구본, 즉 옛 체제를 기본으로 하면서 새로운 제도를 참작하여 나간다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해서 대한제국이 갑오 이전 옛 제도로 복귀하지는 않았다. 신분제 철폐를 뒷받침하는 법적 조치를 취했으며, 근대적 조세와 토지제도의 틀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탁지부의 주관 아래 국가예산제도와 재정운영체계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후 대한제국은 사회 전반의 근대화를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하였다. 예컨대, 광무 양전⋅지계 사업은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에 비교하여도 손색 없는 근대적인 토지제도의 수립과정이었다. 측량 기술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을 취하기는 했으나 서양의 신식 측량 기술을 받아들였다. 종래 지주제를 서구의 근대 소유권의 개념으로 그대로 인정하고 토지 소유자에게 지계를 발급하여 소유권자로 인정해 주었다. 대한제국은 위로부터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여 기존의 지주층과 대상인층을 근대적 지주⋅자본가로 전환시키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 근대 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이렇듯 광무개혁은 대한제국의 구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근대 국가⋅근대 사회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광무개혁’이란 용어가 학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해 논의된 것은 1970년대 중반이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독립 협회의 개혁운동이 높이 평가받던 상황이었다. 이때에는 ‘광무개혁론’이란 말은 아예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1898년 독립 협회만민 공동회가 추진한 ‘헌의 6조’와 중추원의 의회 개편 운동은 대의 민주주의와 입헌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는 근대 국가⋅시민사회 형성에 가장 바람직한 것이었다. 이 운동을 통해 러시아와 일본과 같은 외세를 후퇴시킴으로써 국제 세력 균형을 확립시켜 일시적이나마 이권 침탈을 저지하고 독립을 강화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운동을 탄압한 자들이 바로 고종과 측근 정치세력이었으므로, 광무 정권이야말로 반개혁적⋅수구적 반동 정권이라고 비판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 추진 과정과 성과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제반 개혁 사업의 추진 주체와 그 실체를 해명하려고 하였다. 근대 개혁 과정에서 황실이 수행한 역할을 대단히 긍정적으로 보기도 했는데, 정치적으로는 관료제의 정비를 통해 왕권의 절대성을 추구하고 경제적으로는 지주제의 근대적 개편과 보호 상업주의 틀 내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하면서도 군비의 측면에서 황실 중심의 군사권 강화를 꾀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외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최근에는 대한제국과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조처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전제군주제의 근대적 변용’이라는 것이다. 독립 협회를 통해 추진된 독립문 건립이나 국기⋅애국가의 제정은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상징 조작으로 보았다. 황제 즉위 과정에서 보여준 칭제상소, 존호의 격상, 왕실 행사의 확대 등을 통해서 황실 권위를 높였다고 보았다. 그래서 고종은 만국공법에 입각하여 대한제국을 근대 국가로 개편하고 계몽군주로서 자신을 개혁의 주체로 격상시켰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반면에 고종을 위시한 집권 세력의 무책임한 실정 부분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황제권의 지나친 강화와 황실 재정 기구의 확대, 민중에 대한 조세 수탈의 강화, 외획 제도(外劃制度)의 남발과 백동화 유통권의 확대 등 내정의 난맥상이 있었다. 서구 열강과 중국⋅일본의 외압이라는 이중의 외압에 대응하여 왕실의 안정을 위해 각종 이권을 팔아넘기면서 외세를 끌어들였다. 당시 국내외 상황과 개혁의 과정에 대한 정합적인 해석 없이 고종의 개혁의지만 일방적으로 부각시키려는 논리는 고종의 특정 국면만을 부각시키는 연구에 불과하다는 비판이다.

한편 광무 정권의 무능을 비판하면서 종전까지 외적 실패의 원인으로 돌렸던 일제의 침탈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시각도 제기되었다. 최근 한국경제사학계에서는 19세기 생산력이 정체적 위기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대한제국의 근대개혁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들은 19세기 후반 이래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문호 개방의 영향으로 제반 생산력의 발전이 가속화되었지만, 대한제국은 그러한 발전을 가로막는 역기능을 가졌다고 보았다. 반면에 일제는 이를 순기능적으로 흡수하여 한국 사회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긍정하는 논자들로 보인다. 이들은 광무개혁론의 주창자들이야말로 장기 구조적인 변화와 실상을 무시한 채 협애한 민족주의론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극단적인 찬반론의 경계를 허물고 개혁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한제국의 근대 국가상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첫째, 대한제국은 과연 정치적으로 입헌 군주제이건 아니면 의회 제도의 도입이건 간에 민권의 정치참여와 제도화에 어느 정도 나아가고 있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당시 대한제국과 독립 협회의 정치 개혁운동을 처음부터 상호 적대적인 성격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1898년만 해도 고종독립 협회의 주장을 받아들여 입헌제 근대 국가로의 지향성을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대한제국은 주민들을 근대 국가의 국민으로서 어떻게 탈바꿈하려고 했으며, 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반 법적⋅제도적 장치를 어떻게 마련해 나갔는가 하는 측면을 밝혀야 한다. 1899년 대한국 국제의 경우에도 황제의 권리만 규정한 것이었지만, 향후 민⋅형법의 제정을 통해 국민들도 국가적인 의무와 권리를 보장받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당시 지주⋅자본가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형성하려고 하면서도 노동자⋅농민의 사회관계를 어떻게 맺으려고 했는가와도 관련된다.

이렇듯 대한제국기 근대 개혁의 특성과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 관료들이 지향하고 있었던 근대 개혁의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전통에 철저하게 근거하면서도 근대적인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구본신참’의 발상법이 자기 전통의 긍정과 내적 자산을 통한 발전 모색이라는 방향에 주목하여야 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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