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외치론(外治論)과 내치론(內治論)의 갈림길에 서다
불교⋅유교⋅도교 등 다양한 사상이 공존했던 고려 왕조기의 경우, 통치 이념을 둘러싼 지배층 내부의 갈등과 대립은 항상 존재했습니다. 특히 유교 정치 이념 외에 불교, 풍수지리 등이 통치 이념으로 채택될 경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다음의 경우가 구체적인 사례 중 하나입니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 전쟁 와중에 불교와 음양(陰陽; *풍수지리) 사상에 뜻을 두자, 태조의 참모이자 문신인 최응(崔凝)은 문덕(文德), 즉 유교 정치 이념에 입각하여 민심을 얻는 것이 왕조 통치의 요체라고 하면서, 태조의 생각에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사료 2-3-01〕 『보한집』 권 상
“전(傳)에 이르기를, ‘(세상이) 어지러울 때 문(文)을 닦아 인심을 얻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왕이 된 자는 전쟁 때 반드시 문덕(文德)을 닦아야 하며, 불교나 음양 사상으로 천하를 얻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태조 역시 최응의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지금 백성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전쟁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백성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방법으로 불교와 음양 사상을 임시로 허용하는 것이라 합니다. 다음은 최응의 의견에 대한 태조의 대답입니다.
〔사료 2-3-02〕 『보한집』 권 상
“그 말이 맞다.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는 산수가 영험하고 빼어나나, 황폐하고 구석진 곳에 처해 있다. 토속적으로 부처와 귀신으로부터 복과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 전쟁이 그치지 않아 안위(安危)를 알 수 없어, (백성들은)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하고 어찌 할 바를 모른다. 오직 부처와 귀신의 도움과 산수의 신령한 도움으로 우선이라도 효험이 있을까 생각할 뿐이다. 어찌 이것이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의 민심을 얻는 큰 법일 수 있겠는가? 난리가 진정되어 편안하게 되기를 기다려 풍속을 고치고 교화를 아름답게 할 수 있다.”
유교 정치 이념이 왕조의 통치 이념이라는 점에는 태조와 최응의 생각이 다르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 때문에 유교 정치 이념은 왕조 초기부터 통치 이념으로 채택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응이 전쟁 중이라는 절박한 시점에 불교와 음양 사상에 쏠린 백성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태조에게조차 서슴없이 비판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 외의 사상이나 이념이 통치 이념으로 채택될 경우 지배층 내부의 대립과 갈등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유교 정치 이념은 국왕과 관료 집단 중심의 정치 체제인 왕정(王政) 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념으로, 대체로 성종 대 이후 정착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국왕과 관료 집단 사이에 권력의 배분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 국면에 따라, 유교 정치 이념 외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이념과 사상이 통치 이념으로 등장하면서 새로운 정치 사상을 낳게 하였습니다.
고려 후기의 역사가 이제현은 스스로 고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국왕 문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사료 2-3-03〕 『고려사』 권 9 문종 37년; 이제현 사평(史評)
“(문종은) 경기의 한 군현을 옮기고 절을 지었다. 높은 집들은 궁궐보다 사치스럽고 우람한 누벽(壘壁)은 국도(國都)에 겨눌 만하며 황금으로 탑을 만들고 백물(百物)이 모두 이러하였다. 이는 소량(蕭粱: 불교를 혹신했던 중국 양(梁)나라 무제(武帝))에 견줄 만하다. 사람의 미덕(美德)을 이루어 주고자 하는 자가 이것에 탄식할 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위에서 인용되지 않은 글의 앞부분에서, 이제현은 문종이 재위한 때를 태평성대라 하고, 문종을 어질고 거룩한 현성지군(賢聖之君)으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현은 문종이 12년의 대역사 끝에 흥왕사(興王寺)를 창건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같이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제현은 불교를 중시하고 그것에 의지하여 왕조를 중흥하려 했던 문종의 정책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실제로 문종은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료 2-3-04〕 『고려사』 권 7 문종 9년 10월
“옛날 제왕들이 불교를 숭상한 것은 각종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태조 이래로 사원을 건립하여 복과 경사(景福)를 빌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 덕정(德政)을 닦지 않아 재변이 잦았다.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나라에 복과 이익을 끼치고자 한다. 관리들은 땅을 가려 사찰을 짓도록 하라. 문하성에서 상소하기를, ‘옛날의 성왕(聖王)과 명철한 군주(明王)는 사찰을 짓지 않고 태평을 이루었습니다. 오직 법문(法門)을 존경하고 정교(政敎)를 신중히 살피며 민력(民力)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 종묘와 사직은 오래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고려사』 권 7 문종 9년 10월)
문종은 자연 재변 현상이 자주 일어나자, 불력(佛力)에 의지하여 그것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문종은 역대 제왕들이 불교를 숭상했고, 태조 역시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나라의 복과 이익을 추구했던 사실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문하성의 관료들은 사찰 건립 대신 법문(法門)을 존경하고 민력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 왕조를 유지하는 방책이라 했습니다. 국왕과 관료 집단의 생각은 이같이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종은 이듬해인 1056년(문종 10)에 덕수현(德水縣)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그곳에 흥왕사를 건립하기 시작합니다. 최유선(崔惟善)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반대합니다.
〔사료 2-3-05〕 『고려사』 권 94 최유선 열전
“옛날 당나라 태종의 신성(神聖)함과 영무(英武)함은 천백 년 이래로 짝할 이가 없습니다. 고조(高祖)의 뜻을 따라 사람들이 승려가 되거나 사관(寺觀)을 창립하는 일을 금지하여, 역사책에서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우리 태조 신성왕(神聖王)은 훈요(訓要)에서, ‘국사(國師) 도선(道詵)이 국내 산천의 순역(順逆)을 관찰하여 무릇 가히 사원을 창건할 만한 땅에는 창건하지 않은 곳이 없다. 뒷날 사왕(嗣王) 및 공후(公侯)⋅귀척(貴戚)⋅후비(后妃)⋅신료(臣僚)들이 다투어 원우(願宇)를 지어 지덕을 훼손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조종(祖宗)의 쌓인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태평한 지 오래되었으니, 마땅히 비용을 아끼고 사람을 사랑하며 성대한 운세를 지켜 후대에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백성의 재산과 힘을 축내게 하고 불필요한 일에 비용을 대어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십니까.”
최유선은 사원 건립은 태조의 유훈에 배치되며,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한다면서 반대했습니다. 최유선의 생각 역시 앞의 관료 집단의 의견과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문종은 또한 풍수도참 사상을 이용하여 개경 근교에 장원정(長源亭)을 건립하였습니다.
〔사료 2-3-06〕 『고려사절요』 권 4 문종 10년 12월 조
“장원정(長源亭)을 서강(西江)⋅병악(餠嶽) 남쪽에 지었다. 도선(道詵)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에, ‘서강 가에 군자가 말을 탄 형국인 명당이 있으니, 태조가 통일한 병신년(936)으로부터 120년이 되는 해에 여기에 집을 지으면 국업(國業)이 연장된다.’ 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태사령 김종윤(金宗允) 등에게 명하여 터를 보아 짓게 한 것이다.”
문종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 후 꼭 120년이 되는 1056년(문종 10)에 흥왕사와 함께, 풍수도참 사상에 따라 장원정을 건립하려 했습니다. 문종의 이러한 정책에 대하여 신하들은 왜 반대했을까요? 이는 앞에서 살펴본 태조와 최응 사이의 견해차와는 다른 사안으로 여겨집니다. 단순히 사찰 건립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 시기에 이르면 왕권과 신권 간에 상당한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에서도 확인됩니다.
문종이 1060년(문종 12)에 탐라와 영암의 목재를 베어 배를 만들어 송나라와 외교를 재개하려 하자, 내사문하성 소속 관료들은 다음과 같이 반대합니다.
〔사료 2-3-07〕 『고려사』 권 8 문종 12년 8월
“국가가 북조(北朝)의 거란과 우호를 맺어 변방에 급한 일이 없고 백성은 삶을 즐기니, 이것이 나라를 보전하는 상책입니다. 옛적 경술년(1010년(현종 1))에 거란이 (고려에게) ‘동쪽의 여진과 결탁하고 서쪽의 송나라와 왕래하니 무슨 꾀를 쓰고자 함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또 상서 유참(柳參)이 사신으로 갔을 때 (거란의) 동경 유수가 남조(南朝)의 송나라와 통교한 사실에 의심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누설되면 반드시 틈이 생길 것입니다. 또 탐라는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빈곤하여 오직 해산물과 배를 타는 것으로써 생계를 꾸려 나갑니다. 지난해 가을에 재목을 베어 바다를 거쳐 불사(흥왕사)를 창건한 수고가 컸는데, 지금 또 이 일로 거듭 괴롭히게 되면 다른 변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문물 예악이 흥행된 지 이미 오래며 상선(商船)이 끊임없이 드나들어 진기한 물자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에 대하여 실로 도움받을 일이 없습니다. 만일 거란과 국교를 영원히 끊지 않으려면 송나라와 관계를 맺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관료 집단은 거란과의 우호 관계로 전쟁의 위협이 없고, 백성들도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최상의 상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각종 물자 및 문물 예악이 유입되고 있어, 송과의 외교 관계를 굳이 재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현재의 안정된 대외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왕조 유지의 상책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문종은 불력(佛力)에 의존하여 흥왕사 등의 사찰을 건립하고, 풍수도참 사상에 의존하여 장원정을 건립하는 등 왕조의 복리(福利)를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송나라와 관계를 재개하여 거란을 우회적으로 견제하고 압박하려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도모했습니다. 국정 운영을 두고 국왕과 관료 집단 사이에 커다란 의견 차이가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정치 이념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관료 집단의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민생의 안정과 문물 예악의 확립, 관료 집단 중심의 정치 운영을 도모하는 내치 위주, 문치주의 성향의 유교 정치 이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반면에 국왕은 내치 위주, 문치주의 이념을 인정하면서도 왕실의 부흥과 왕권의 강화, 즉 ‘흥왕(興王)’을 위해서는 유교 정치 이념이 아닌 불교와 같은 이념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신하들이 반대했던 흥왕사 창건은 왕권 강화의 상징적인 정책이기도 합니다. 이같이 국왕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사상적으로 유교 정치 이념과 함께했지만 때로는 불교와 같은 이념도 적극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통하여 기존의 정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문종은 이처럼 유교 이념 외에도 다양한 사상과 이념을 수용하면서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통하여 왕실과 왕권의 강화, 나아가 국가 주도의 새로운 지배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책을 외치론(外治論)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관료 집단은 민생의 안정과 안정적인 대외 관계를 통하여 내치의 안정과 문치주의 위주의 유교 정치 이념을 고수하려 했는데, 이러한 정책을 내치론(內治論)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문종 당시 두 집단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이러한 정치 사상으로 표면화된 것은 아닙니다. 정치 사상이 분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체로 숙종 때가 되면 국왕 주도의 지배 질서 구축이 본격화되면서 분화가 구체화됩니다. 이에 대하여 관료 집단이 반발하면서 외치론과 내치론이라는 새로운 정치 이념이 대두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유교 정치 이념은 또 다른 형태의 정치 사상으로 분화, 발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