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학 사회의 불청객 승려
고려 시기까지만 해도 승려는 귀한 신분이었다. 승려는 정신적인 지도자로 추앙받았으며,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누렸다. 승과(僧科)에 합격할 경우 국가로부터 직위와 토지도 지급받았다. 승려가 되려는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하였다. 그 때문에 국가에서는 향이나 부곡과 같은 특수 집단의 주민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였고, 한 집안에 아들 셋이 있을 경우 그 가운데 한 명의 출가만을 허용하였다.
조선이 개창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유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승려들은 부모와 임금을 버리고 출가하여 윤리를 멸시하는 존재로 낙인찍혔다. 국왕에 따라 불교를 신봉한 경우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불교는 정책적으로 통제의 대상이었다. 태조(太祖, 재위 1392~1398)는 전국에 산재한 사찰 가운데 242개만 인정하고 나머지 사찰의 토지는 환수하였으며 사원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 8만 명을 속공(屬公)하였다. 또 승려의 자격을 제한하는 도첩제를 강화하여 승려가 되려면 양반은 면포 100필, 일반인은 150필, 천인은 200필을 납부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처럼 불교 통제책이 시행되었지만 불교의 영향력이 쉽게 약화되지는 않았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성종 대 이전 불교가 성행했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료 5-2-01〕
사대부들이 그 친속을 위하여 모두 재(齋)를 올리고, 또 빈당(殯堂)에다 법연(法筵)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기제(忌祭)를 행하는 자는 반드시 중을 맞아다가 음식을 먹였다. 또 시승(詩僧)이 있어 관리들과 더불어 서로 수창하는 일이 자못 많았으며, 독서하는 유생들은 모두 절에 올라가서 하였다. 비록 절을 부수고 벽을 훼손하는 폐단이 있기는 하나 유학자와 중이 서로 의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세조 때 극에 달하였다. 중들이 촌락에 섞여 살면서 비록 제멋대로 행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사람들이 이를 꾸짖지 못하고, 조관(朝官)이나 수령들도 항의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중을 의지하여 뒤에서 이익을 얻는 자까지 있었다. 성균관 유생이 부처의 사리를 바치고 은총을 구하여도 사림들이 해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현(成俔, 1439~1504), 『용재총화(慵齋叢話)』
그러나 승려의 지위는 사림이 중앙에 진출하는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대에 들면서 추락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일정한 시험을 통과한 후 정전(丁錢) 30필을 납부하면 도첩을 받아 승려가 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성종은 도첩승마저도 허락하지 않고 도첩이 없는 중은 모두 찾아내 군에 보내도록 하였으며 사찰의 창건을 금지하는 등 강력한 불교 통제책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통제책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연산군 대에는 사원전이 혁파되고 중종 대에는 승과 제도가 철폐되었다. 이 때문에 승려들 사이에서는 ‘나날이 없어지고 다달이 무너져서 산에 절이 없고 절에 중이 없으며, 관리가 침탈하고 속인이 미워하여 눈에 눈물이 고이고 눈물에 피가 맺힌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17세기에 들면서 불교계의 상황에 변화가 감지된다. 속리사(법주사)의 중창과 관련된 다음 자료는 그러한 상황을 보여 준다.
〔사료 5-2-02〕
속리사는 큰 절인데 정유년에 쳐들어온 왜적들이 불태웠다. 승려들이 옛날 모습을 회복할 생각으로 도문(道文)이라는 승려가 법당을 지을 시주 담당자가 되었으며, 그 밖에 오층전⋅미륵전 등을 지을 시주 담당자 또한 5~6명이 넘었다. 이들이 속이고 꾀어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많게는 베 100여 필 그 다음도 30~40필을 시주하였고 토목 공사에 부역하는 자도 항상 200~300명이 넘어서 충청⋅전라⋅경상도의 재력이 태반은 이 공사에 쓰였다. (중략) 지금 세상에서는 아래로부터 공경⋅재상에 이르기까지 부처를 높여 받드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바람이 불면 풀이 눕듯 그리고 휩쓸리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효빈잡기(效嚬雜記)』
정유재란 때 불 탄 절을 중건하기 위해 많은 백성들이 시주를 하고 부역에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하삼도(下三道)1) 재력의 태반이 공사에 쓰였다는 것은 물론 과장된 것이지만 절의 중건에 상당한 자금이 투여된 것은 틀림없다. 고상안은 도문이 백성들을 속이고 꾀어 중건 자금을 마련한 것처럼 설명했으나 그것은 불교에 부정적이었던 고상안의 판단일 뿐이다. 공경⋅재상들까지 부처를 높이 받는다고 이야기한 데서 나타나듯 불교에 대한 인식에 분명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때 승군들이 활약한 것을 계기로 통제 위주의 불교 정책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승려로의 출가를 막는 규제를 없애는 등 정부의 불교 정책은 승려와 사찰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승려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였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들어 많이 건립된 고승비의 비문을 대부분 사족이 찬술했고 특히 정권의 핵심 요직에 있던 고위 관료가 찬술한 것이 대부분이었음을 통해 확인된다. 춘천의 유명한 승려였던 지안대사(志安大師)가 청평사에 머물자 춘천에 사는 사대부 대다수가 그를 찾아가 절을 했다고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불교와 승려의 권위가 점차 회복되는 양상은 『청성잡기(靑城雜記)』에 실린 ‘법사(法師)와 작가(作家)’에 관한 다음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사료 5-2-03〕
선문(禪門)에서 도를 전수받은 사람을 작가(作家)라 한다. 작가는 법사가 불경을 통달하고 선(禪)을 깨달아 교주(敎主)가 될 만한 자를 뽑아서 당호(堂號)를 내려 주고 신구(信具)를 주는데, 이렇게 하면 당장에 부처가 되어 높이 사좌(獅座)에 앉는다. 지금의 학승(學僧)들은 몇 년 동안 스승을 따라다니며 불경 1질을 배우고 나면 곧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중략) 이때[당호를 받을 때] 남녀의 경승(經僧)들과 신도들이 모두 열 지어 서 있는데, 당호와 신구를 화려하게 앞에 늘어놓으면 사람들은 감탄해 마지않는다. 중은 그제야 마지못해 일어나 절하고 부처가 법통을 전하듯이 정중하게 의식을 치른다. 그리고는 중 또한 슬그머니 잘난 체하며, 어제까지 한자리에 있던 동료는 도리어 북향하고 스승으로 섬겨 잠깐 사이에 귀천이 갈라지니 일반 중들은 말할 것도 없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 절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작가가 된 승려는 다른 사찰로 옮겨가서 몇 년 동안 불경을 본 뒤에 돌아와 그제야 비로소 법사로 자처를 하였고 사람들 또한 그를 법사로 대우하였다고 한다. 일단 작가가 되면 일반 승려와 신도들로부터 융성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경승들이 작가가 되기 위해 주변에 청탁을 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뇌물까지 바쳤다고도 한다. 불교계의 위상이 변화하면서 이제 승려들의 불법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고유(高裕, 1722~1779)가 창녕 현감으로 있을 때 처벌했다는 한 승려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유가 창녕 현감에 임명된 것은 1757년(영조 33)이었다.
〔사료 5-2-04〕
남명(南明)이라는 중은 문장이나 재주가 보잘것없는 자였다. 그는 서울에 사는 권세가들과 결탁하여 표충사(表忠祠)의 원장이 되었는데 세력을 믿고 악행을 일삼아 그가 이르는 곳마다 수령들이 급히 달아나고 풍속이 타락하였다. 비록 관찰사의 막중한 지체로도 그와는 대등한 예를 행하였다. 조금이라도 그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수령들이 번번이 죄를 뒤집어쓰고 파면되고는 하였다. 도내에서 쫓겨나고 승진하는 것이 모두 그 중의 수단에서 나왔던 것이다.
이희평(李羲平, 1772~1839), 『계서잡록(溪西雜錄)』
표충사는 서산대사와 송운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밀양에 지은 사당인데 이곳의 원장을 지낸 남명이라는 승려가 큰 위세를 부렸다는 것이다. 고유가 불러 잘못을 꾸짖는데도 대들자 결국 매를 때려 죽였다고 한다. 고유는 명판결을 많이 내린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어서 그에 관한 일화가 많이 전하는데 위의 이야기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남명은 다른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아 어떤 승려인지 알 수 없다. 고위 관료들이 고승의 비문을 써주었던 것을 보면 남명처럼 중앙 정계의 인물들과 관련을 맺고 있던 승려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도 1801년(순조 1) 양양 부사로 재직할 때 강원 감사에게 불법을 자행하는 승려의 행태를 고발한 일이 있었다.
〔사료 5-2-05〕
본부(本府)에 신흥사(神興寺)가 있는 것은 바로 한 고을의 난치병과 다름이 없으며, 그 절에 창오(昌悟)와 거관(巨寬)이라는 승려가 있는 것 역시 그 절의 난치병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놈들이 하찮은 중으로서 여러 해 동안 서울 근교의 산들에 머무르면서 중들을 꾀고 협박하여 절 재산을 탕진했는데, 말과 외모가 간사스럽고 종적이 수상합니다. 무뢰배와 결탁하고 외람되이 막중한 곳을 빙자해서2), 오로지 수령을 모함하고 관속들에게 위엄을 세우는 것만을 일삼는 것이 제 놈의 수법인즉, 관리가 관리 노릇 못한 지가 오래입니다. 토호들이 시골구석에서 무단(武斷)하고 관부(官府)를 쥐고 흔드는 일이 옛날부터 간혹 있었지만, 중들이 이같이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은 지금 처음 보는 일입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燕巖集)』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박지원에 따르면 창오와 거관(巨寬, 1762~1827)은 신흥사의 승려들이 관부의 문서를 위조하는 등 불법을 자행했다고 한다. 또한 신흥사는 본래 전답의 소출이 많아서 부자 절이라 일컬어지는데도 분수를 지키지 못해 승려들이 술에 취해 떠돌이 걸인들을 묶어 놓고 구타하여 6명이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간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후일 거관의 부도에 강원 감사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비문을 써주었다는 사실이다. 박지원이 협잡을 부리는 중으로 지목했던 인물이 강원 감사로부터 비문을 받았던 것을 보면 거관의 위상이 어떠하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승려는 천민 취급을 받던 불쌍한 존재라는 인식은 수정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