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버거운 백성의 의무
조선 시대 양인 농민들은 누구나 국가에 대해 전세(田稅)⋅부역(賦役)⋅공물(貢物)의 의무를 져야 했다. 이러한 의무는 양인 신분을 얻는 대가이기는 했지만 농민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우선 전세는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으로 그 자체가 무겁지는 않았지만 전세 책정 과정에서 부정이 자행되고, 전세를 납부할 때 수수료나 운송비 등의 명목으로 각종 잡세가 붙어 농민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또한 전세는 땅주인이 내는 것이지만 소작 농민들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소작농의 경우 부담이 더 무거웠다. 김응하(金應河, 1580~1619)의 다음 일화는 전세 책정 과정의 문제점을 잘 보여 준다.
〔사료 3-1-01〕
장군 김응하는 철원 사람이다. 젊어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양전감관(量田監官)이 되었는데 균전사(均田使)가 전품(田品)을 높여 세금을 많이 받으려고 했다. 김 장군이 고집하면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말하기를, “메마른 땅에 많은 세금을 걷으면 백성이 견딜 수 없어 한때만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만 대를 두고 원망을 살 것이니, 저는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균전사가 노하여 곤장을 쳤지만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균전사가 비로소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워하며 그의 의견을 따랐다.
정재륜(鄭載崙, 1648~1723),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균전사가 세금을 많이 걷기 위해 토질이 좋지 않은 전답임에도 불구하고 토지 등급을 높이려다가 김응하의 제지를 받았던 것이다. 1603년(선조 36)의 일인데 이 때문에 철원 농민들은 오래도록 김응하의 고마움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박답(薄畓)1)에 높은 등급의 세금을 매기는 바람에 경작을 포기하는 일도 있었으니 농민들이 고마워한 것은 당연하였다.
부역은 노동력을 징발하는 것으로 군역(軍役)과 요역(徭役)이 중심이었다. 이 가운데 군역은 17~18세기 부세 가운데 가장 큰 부담이었다. 군역의 대상자는 16세부터 60세까지의 성인 남자였지만 관에서는 어린아이는 물론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까지 군역을 부과하여 큰 원성을 샀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군역의 괴로움 때문에 자신의 양물을 자른 사건을 접하고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를 지어 당시 현실을 비판한 바 있다. 이옥(李鈺, 1760~1812)은 아들 넷을 둔 이웃 여인이 다섯째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계집종을 보내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그 여인은 뜻밖에도 고을에 군정이 하나 더하니 관아의 관리야 기쁘겠지만 돈이 없는 자신의 집안에서는 하나도 즐거울 것이 없다고 짜증을 냈다. 이옥이 그 이유를 묻자 여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료 3-1-02〕
아아! 백성에게는 역역(力役)이 있어 역역마다 각각 세금을 징수하니 쌀을 내고 보를 서야 하죠. 속오(束伍)와 아병(牙兵)이 다 그렇고 수군이 가장 중요하여 군사와 군보를 모집한다고 아주 닦달합니다. 낳은 지 고작 석 달이면, 이정은 이름을 보고하여 강보에 싸인 아이가 관부에 이름이 오르고 과기(瓜期)2)가 즉각 이루어지죠. 급기야 관리가 가을이 되기 무섭게 와서는 화급히 돈을 재촉하는데 새끼 가진 범같이 소리가 사나워 집 문에 다다라 성난 얼굴로 서 있지요. 큰 아이는 200전, 작은 아이는 150전, 만약 당일 아침 관아에 납부하지 않으면 관문으로 붙잡아 들어간다고 으름장이죠.
이옥(李鈺, 1760~1812), 『경금소부(絅錦小賦)』
토산의 현물을 바치는 공납 역시 큰 부담이었다. 공납은 매년 항상 정해져 있는 상공(常貢), 정부에서 필요할 때 불시에 부과하는 별공(別貢), 국왕에게 바치는 진상(進上)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납의 부담이 무거워진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이 책정되어 공안(貢案)에 한 번 등록되면 거의 변경되지 않는 데 있었다. 이럴 경우 해당 지역민들은 다른 군현에서 공물을 구해 바쳐야 했다. 이 때문에 대납이라는 방식이 생겨났다. 즉 특정 물품을 중앙에 대신 납부해 주고 현지 민인들에게 그 대가를 받는 방식이었다. 방납(防納)은 16세기에 들면서 크게 성행했는데 권세가들을 비롯하여 승려⋅상인 등이 방납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많은 이득을 챙겼고 그럴수록 백성들의 부담은 커져 갔다. 공납에 대한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사료 3-1-03〕
① 햇곡식을 바치는 것은 네 종류가 있고 두 차례 봉진한다. 처음에는 기장⋅조⋅피 세 가지를, 다음에는 쌀 한 가지를 봉진한다. 봉진하는 시기는 정해진 기한이 있는데 미처 익기도 전이다. 그래서 반드시 1년 전의 곡식을 미리 준비해서 교묘하게 햇곡식처럼 만드니 이루(離婁)3)라도 진위를 판별할 수 없고 오직 도회관(都會官)4)만이 할 수 있다. 다른 읍에서는 배우려고 해도 같게 만들 수 없다. 이 때문에 베를 가져가 바꾸어 바치는데 요구하는 값이 너무 심하다. 그 유래는 오래되었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효빈잡기(效嚬雜記)』
② 진상하는 아다개(阿多介)5)는 작은 표범 가죽을 써서 만드는데 털의 무늬가 아롱지면서 누른빛이 있는 것을 사용한다. 가운데 두르는 선은 수달피를 쓰고 바깥에 두르는 선은 사슴 가죽을 쓰며, 누에고치 솜과 씨를 뺀 면화로 솜을 놓는데 방납하는 가죽 값이 많게는 베 400여 필에 이른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효빈잡기(效嚬雜記)』
①은 불합리한 규정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햇곡식의 공납에 대한 이야기이다. 곡식이 익기도 전에 햇곡식을 바치도록 요구하는 바람에 가짜 햇곡식을 만들기에 이르렀고 그러한 기술이 없는 지역에서는 비싼 돈을 내고 가짜 햇곡식을 사서 바치고 있다는 것이다. ②는 고가의 진상품 아다개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록에 보면 국왕이 신하에게 아다개를 하사하는 기사가 가끔 나오는데 이 아다개가 바로 진상품으로 올린 것이다. 위의 자료에 나타나듯 아다개는 매우 귀한 것으로 방납하는 비용이 베 400필에 이르렀다고 한다. 『효빈잡기』의 저자 고상안은 궁궐에서 “깔고 앉는 여덟 자의 요가 서민 열 가구의 재산인 줄 어찌 알겠는가?”라며 크게 탄식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명목의 세금이 생겨나 백성들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했다. 임진왜란 때 재정 확보를 위해 발행되었던 공명첩(空名帖)은 본래 세금은 아니지만 강제로 받게 함으로써 세금화된 것이다. 공명첩은 없어지지 않았으며 대원군 집정기에는 경복궁 공사 자금 마련을 위해 대량으로 발행되기도 하였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공명첩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실려 있다.
〔사료 3-1-04〕
호서의 어느 강변에 강씨라는 늙은 과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조금 부유하게 살고 있었지만 자녀를 두지 못하고 개 한 마리와 살고 있었다. 그 개의 이름은 복구(福狗)라고 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그곳을 지나다가 ‘복구’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어느 남자의 이름으로 생각하였다. 그 후 그는 강복구(姜福九)라는 이름으로 감역(監役)을 임명하고 그 대가를 받기 위해 그 집을 방문하자 과부는 탄식하면서 “손님께서 복구를 한 번 보시겠습니까?”라고 한 후 고함을 질러 복구를 불렀다. 그러나 어떤 개 한 마리가 꼬리를 저으며 다가오자 그 손님은 크게 웃으며 그곳을 떠나갔다. 이로부터 호서에 ‘구감역(狗監役)’이 있게 되었다. 이것을 볼 때 다른 일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황현(黃玹, 1855~1910), 『매천야록(梅泉野錄)』
같은 내용이 정교(鄭喬, 1856~1925)가 쓴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도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기가 막힌 과부가 개를 보고 “네가 비록 개지만 관직을 받았으니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느냐?”며 개에게 감투를 씌워 주었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실제 있었던 것인지 과장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공명첩이 큰 폐단이 되고 있었던 상황을 반증하고 있다. 평범한 백성 노릇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관의 각종 요구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때로 관에 직접 호소하기도 하였다. 정약용이 수령으로 부임했던 황해도 곡산에서는 향리들이 제멋대로 세금을 징수하는 데 분개한 이계심이라는 백성이 천여 명을 모아 관에 들어가 호소하였다. 관에서 그에게 형벌을 내리려고 하자 천여 명이 한꺼번에 이계심을 둘러싸고는 대신 고문받기를 청하였다. 아전과 관노들이 곤장을 들고 백성들을 마구 때리자 그때서야 주민들이 해산하였다. 이계심도 이때 도망하여 숨어 있다가 정약용이 무죄로 처리해 주어 비로소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조선 사회에는 민란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만약 정부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면 1862년(철종 13)의 임술민란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