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보는 한국사잡록(雜錄)⋅필기(筆記)류 자료를 통해 본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3. 평민의 삶

3) 떠도는 백성들

관의 착취로 인해 마을에서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백성들은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가장 흔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산속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는 것이었다. 화전을 일구고 사는 것이 적발되면 또 세금을 물어야 했지만 그래도 관을 피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 후기의 유명한 학자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산민(山民)」이라는 시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이웃은 없고 / 개와 닭도 산기슭에 의지해 사네 / 숲 속에는 사나운 호랑이 많아 / 나물도 마음대로 못 뜯는다네 / 슬프다 외딴살이 어찌 좋으리 / 험하고 험한 산골짝에서 / 평지에 살면 더없이 좋으련만 / 가고 싶어도 벼슬아치 두렵다’고 화전민의 고단한 삶을 읊었다.

절에 투탁(投託)하는 것은 살길을 찾는 백성들이 흔히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1537년(중종 32) 성균관 진사 유건(柳健)은 상소에서 백성들이 관원들의 침탈을 견디지 못해 “얼고 주려 거의 죽게 된 백성들이 잇달아 아이를 데리고 절에 올라와 머리를 깎아 승려를 만들고 서로 울고 간다.”고 백성들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절에 맡기면 굶어죽지는 않을 것 같아 아이들을 맡기기도 하고 자신이 승려가 되기도 하였지만 승려로서의 삶도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승려도 각종 침탈에 시달렸기 때문인데 그러한 상황은 다음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료 3-3-01〕

읍지(邑誌)에 절 이름이 많이 실려 있는데 무릇 십여 곳이다. 이 중 묵방⋅금곡⋅두려 등 3곳은 관동들 중에 노약자가 모두 그 절이 한창일 때의 규모를 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오직 두려에 암자 하나가 남아 있다. 그곳 중은 종이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데 얼마 안 있어 떠난다고 했다. 평민으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자들은 편안히 백성 노릇을 하기 위함인데, 막상 중이 되고 보면 요역 또한 빈번하고 관의 주구와 서리의 침탈이 날로 심해질 뿐이다. 그래서 중들은 다시 흩어져 일반 백성으로 돌아가 버리니, 이곳의 절이 대부분 폐쇄된 까닭이다.

이옥(李鈺, 1760~1812), 『봉성문여(鳳城文餘)』, 「승사흥폐(僧寺興廢)」

좀 더 편안한 생활을 위해 승려가 되었는데 수시로 부과되는 요역과 관의 침탈을 견디지 못해 다시 절을 떠나고 있던 것이다.

마땅한 생계 수단도 없고 도피처도 없는 백성들은 길거리에 나앉아 걸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흉년이 드는 해에는 걸인이 급증하였다. 이익(李瀷, 1681~1763)은 흉년이 들면 걸인들이 길에 연이어 표주박을 들고 자루를 메고서 염치없이 달려드는데 자신이 그런 걸인이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무관으로 『풍천유향(風泉遺響)』이라는 병서를 찬술했던 송규빈(宋奎斌, 1696~1778)은 「무자년(1768) 가을 거지를 슬퍼함(戊子秋哀丐者)」이라는 시를 지었다. 가을이면 1년 농사의 결실을 거두는 수확의 계절인데 거지가 되었다니 무슨 연유일까? 걸인은 자신이 거지가 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료 3-3-02〕

  • 반년간 모진 고생하였지만 / 가을에 도리어 황무지가 되었다네
  • 열 식구 모두 배고픔을 호소하는데 / 어찌 창고에 무엇이 있기를 바라겠소
  • 동쪽 집은 마소를 팔고 / 서쪽 집은 대추나무며 뽕나무를 베어내는데
  • 환곡 갚을 시기는 이미 닥쳤고 / 신포 또한 급해졌다고
  • 관청 하인은 사납기 호랑이 같아 / 문에 다다라 멋대로 빼앗고 약탈하니
  • 한 집 안을 둘러보아도 / 네 벽에는 오직 무너진 담뿐
  • 포승줄에 매여 갈까 몹시 두려워 / 낡은 옷가지도 모두 팔았답니다.

…(중략)…

  • 식솔을 거느려 떠돌이 거지가 되니 / 천지는 어찌 그리 망망한지
  • 통곡하며 고향 마을을 떠나 와 / 피눈물을 조상의 무덤에 뿌렸다오

유재건(劉在建, 1793~1880),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걸인은 자신은 본래 강원도에 살던 백성인데 봄에 서리와 우박이 내리고 이어 메뚜기 떼와 해충까지 겹쳐 흉년이 들었는데 관의 세금 독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끌고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걸을 통해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구걸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식사를 하려다가 외손자에게 ‘두 아들을 데리고 다니는 걸인이 그중 한 아이를 물에다 던지니, 조금 큰 아이가 자기는 어머니를 빌어먹여야 한다고 외치며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수저를 내려놓고 상황이 이러한데도 정쟁을 일삼는 관료들의 행태에 분노를 표하기도 하였다. 이익도 추위가 매서웠던 겨울 어느 날 저녁 한양 거리를 지나다가 어떤 장님 걸인이 남의 집 문밖에 앉아 울면서 하늘에 대고 “죽여 주옵소서.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소연하는 것을 보았는데 30년이 지난 후에도 그 장면을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진다고 밝혔다.

걸인이 많아지면서 걸인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행패를 부리는 등 조선 후기에 걸인은 사회 문제가 되었다. 1787년(정조 11)에는 전라도 진안에서 걸인 4명이 사람을 때려 죽게 한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걸인이 와서 구걸할 때는 먼저 멸시하는 마음을 억제하고 불쌍히 여겨 도와주어야 하고, 만약 도와줄 물건이 없거든 부드러운 말씨로 타일러서 보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걸인은 본심을 잃은 자들이 많기 때문에 혹 멸시하다가는 도리어 성을 내 욕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걸인을 대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당시 걸인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걸인들이 늘어나면서 그들 사이에도 나름의 조직이 형성되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소설 「광문자전(廣文者傳)」의 주인공 광문은 실존했던 거지였다. 달문(達文)으로도 불렸던 광문은 일찍이 종루의 저잣거리에서 빌어먹고 다니다가, 거지 아이들의 추대를 받아 패거리의 우두머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한양 걸인들의 상황이 좀 더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사료 3-3-03〕

도성 안에 모여 사는 거지들이 해마다 항상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들의 생활 규칙은 거지들 중에서 1명을 뽑아 왕초로 삼고, 기거동작과 모이고 흩어지는 모든 것을 그의 명령에 따라 하여 감히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는 것이었다. 아침저녁으로 거지들은 구걸한 음식을 모아 왕초에게 공경히 바치고, 왕초는 태연히 앉아 있었다. 서울에 왕초 1명이 있고, 서문시(西門市)와 이현시(梨峴市)에 각각 인을당(人乙堂)이 1채씩 있어 두 왕초가 나누어 거처하면서 뭇 거지들을 맡아 관리하고 지휘하였는데, 사람들이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서울을 총괄하는 왕초 걸인이 있고, 서문과 이현에 지역을 관리하는 두 명의 왕초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청정잡기』 외에 다른 곳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이들 걸인들이 1760년(영조 36)에 자신들의 잔치를 벌이면서 당시 명성이 가장 높았던 용호영(龍虎營)의 악대를 불러 공연을 시켰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위에 소개한 자료의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악대의 우두머리였던 이씨가 자신들의 잔치에 와 달라는 거지 왕초의 부탁을 무시하자 왕초가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겁을 먹고 가서 공연을 했다는 것이다. 걸인은 사회적 약자였지만 함부로 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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