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승자의 도덕률이 담긴 왕건과 견훤의 편지
중국의 통일 왕조인 당나라가 907년에 무너지면서 중국 대륙에는 이른바 5대 10국이라는, 지속 기간이 평균 50년에서 70년에 불과한 15개의 단명 왕조가 번갈아 들어섰고, 분립과 대립의 혼란 상황은 960년 송나라가 건국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 무렵 한반도의 사정 또한 중국 대륙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887-897년 재위) 때에는 조세를 거두어 들일 수 없을 정도였고, 중앙 정부는 왕조에 반기를 든 지방 세력의 대두와 농민 반란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신라 왕실 출신인 궁예와 신라 변방의 장수인 견훤은 마침내 후고구려(900년)와 후백제(901년)를 각각 건국합니다. 통일신라와 함께 이 시기를 우리는 후삼국 시대라고 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궁예, 견훤, 왕건과 같은 영웅 군주들의 지략과 군사력만을, 지배와 정복을 일상사로 하던 이 시기의 정의이자 도덕률로 여겨 왔습니다. 이처럼 이 시기의 전쟁은 이러한 도덕률로 무장한 세 영웅 군주의 패권 다툼으로 비춰져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기력이 소진되어 쇠약하기 짝이 없던 신라국의 향배가 결과적으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 짓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곧 신라와 민심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영웅 군주들의 정치 이념과 사상이 이 시기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의 기록이 이러한 문제를 고찰하는 데 참고가 될 것입니다.
〔사료 1-1-01〕 『삼국사기』 권 50 견훤 열전
“신라는 그 운이 끝나고 도의가 땅에 떨어지자 온갖 도적들이 고슴도치의 털과 같이 일어났다. 가장 심한 자가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다. 궁예는 신라의 왕자이면서 신라를 원수로 여겨 반란을 일으켰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모반의 마음을 품고 도읍에 쳐들어가 임금과 신하 베기를 짐승 죽이듯, 풀 베듯 하였다. 두 사람은 천하의 극악한 사람이다. 궁예는 신하에게 버림을 받았고, 견훤은 아들에게 화를 입었는데,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짓이다. (중략) 흉악한 두 사람이 어찌 왕건에 항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 준 사람일 뿐이었다.”
고려 중기 역사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세 영웅 군주에 대하여 평가한 글입니다. 김부식은 이 글에서 궁예는 신라의 왕자 출신이면서 신라를 배반하였고, 견훤은 신라의 녹을 먹던 신하이면서 국왕과 백성을 함부로 살육했기 때문에 패망한 영웅 군주가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신라 왕실과 민심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승자가 될 수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비록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만 신라를 정통으로 보고, 신라와 민심의 지지를 얻은 것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는 것이 김부식의 생각 속에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존왕(尊王)주의 내지 존왕 사상이라는 유교적 가치관이 난세를 극복하는 또 다른 덕목으로 내세워지고 있음을 읽게 됩니다. 이는 후대 사람인 김부식만의 생각이었을까요? 당대에도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견훤과 왕건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 속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편지를 살펴보기 전에 그간의 사정을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견훤은 927년(태조 10) 9월 지금의 경북 문경 지역의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하고, 경주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금의 영천 지역인 고울부(高鬱府) 지역까지 진출하여 신라를 압박하는 등 무력 시위를 벌입니다. 다급해진 신라는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왕건이 거느린 군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은 경주를 점령하여 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하였으며, 경순왕을 새 국왕으로 즉위시키는 조치를 취합니다.
이 소식을 접한 왕건은 군사 5천으로 신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내려가다, 지금의 대구 팔공산인 공산동수(公山桐藪) 전투에서 자신의 오른팔과 같은 장수 신숭겸을 잃고 군사도 거의 전멸하다시피 합니다. 왕건 혼자 겨우 탈출에 성공했을 정도로 이 전투는 백전노장 왕건에게도 그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힘들고 치욕스러운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것이었습니다. 반면 승전에 고무된 견훤은 후삼국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에 한껏 고무되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전투가 끝난 지 3개월 후인 그 해(927년) 12월, 승리에 고무된 견훤은 왕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사료 1-1-02〕 『고려사』 권 1 태조 10년 12월
“지난날 신라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당신을 신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며, 종달새가 매의 날개를 부축하려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토를 폐허로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선수를 써서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정벌하였다.
그때 나는 백관들에게는 해를 가리켜 맹세하고 6부(신라)에는 정의로운 풍습을 지키도록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간신들이 도망을 치고 신라 임금은 자결하는 사변이 일어났다. 나는 드디어 경명왕의 외종제요 헌강왕(獻康王)의 외손인 사람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붙들어 주었으니 없어졌던 임금을 다시 들여 세운 공로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중략) 나는 원래 신라를 존중하며 의리에 충실하고 큰 나라에 대한 정의가 깊은 터이므로 오월국 왕의 조서를 듣고 즉시 그 뜻을 받들고자 한다.”
공산동수 전투의 승리에 한껏 도취되어 도도하고 자신감으로 충만한 견훤의 생각이 잘 드러난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이 편지에서 신라에 대한 견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견훤은 편지에서 “나는 원래 신라를 존중하며 의리에 충실하고 큰 나라에 대한 정의가 깊다.”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라를 침범하여 국왕을 죽이고 새로운 국왕으로 갈아치웠는데, 이는 신라가 고려와 연결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토를 폐허로 만들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두 나라의 연결은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신라를 침범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견훤은 외형적으로는 신라를 정통 왕조로 여기고 있습니다. 신라 국왕을 살해했지만, 끝내 신라를 차지하지 못하고 새로운 국왕을 다시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즉 정통 왕조라는 신라의 상징성, 그에 따른 존왕(尊王)주의라는 대의(大義)를 쉽게 깨뜨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견훤은 편지의 또 다른 부분에서 자신의 지략과 무력이 왕건을 압도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사료 1-1-03〕 『고려사』 권 1 태조 10년 12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의 충고를 듣지 않고 다만 유언비어에 귀를 기울이어 백방으로 우리를 엿보고 침략하였다. 그러나 당신의 군대는 나의 말 대가리를 보거나 쇠털을 뽑기도 전에 초겨울에는 벌써 고려의 도두(都頭) 색상이 성산(星山)진 아래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하였고 같은 달에 좌상 김락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내었다. 우리가 죽이고 노획한 것도 많았으며 추격하여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았다. 강약의 역량이 이와 같으니 승패의 형편은 알 만한 일이다.”
위의 글은 현실적으로 무력과 지략이 지배와 정복의 시기를 지배하는 도덕률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왕주의라는 정치 이념이 이 시대를 견제하고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되는 사실입니다. 유교적 가치 기준으로 보면 존왕주의는 매우 당연하면서도 보편적인 가치이지만, 지배와 정복의 시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존왕주의는 질서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또 다른 이념의 무기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점은 왕건의 편지에도 나타납니다.
해를 넘긴 928년 1월 왕건은 견훤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습니다.
〔사료 1-1-04〕 『고려사』 권 1 태조 11년 1월
“나는 위로는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밑으로는 여러 사람들의 추대에 못 이겨 외람하게도 두령의 권한을 가지고 정치 무대에 나서게 되었다. (중략) 그런데 뜻밖에 맹세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포한 행위가 다시 시작되어 벌과 독사 같은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이리와 승냥이 같은 행패가 경기(京畿)를 소란케 하였다. 금성 서울(*신라 수도 경주)은 곤경에 빠지고 신라 대왕은 크게 놀랐다. 이러한 때에 정의에 입각하여 신라 왕실을 높이는 일에 과연 누가 제환(齊桓), 진문(晋文)의 패업을 이루었는가? 기회를 타서 나라를 뒤엎으려는 당신의 간계는 왕망(王莽), 동탁(董卓)의 행동을 본받아 지극히 높은 신라 왕으로 하여금 억울하게도 당신에게 아들이라고 청하게까지 하였으니 높고 낮은 것은 차례를 잃었고 위와 아래의 모든 사람들은 다 근심에 휩싸였었다. 그때 나는 생각하였다. 충성한 원로가 없으면 어찌 국가를 다시 편안케 할 수 있으랴. 나의 마음은 미운 것을 참고 용서하여 두지 않으며 뜻이 존왕 대의에 간절하기 때문에,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국가의 위기를 붙들고자 하였다. 그런데 당신은 털끝만 한 작은 이해에 눈이 어두워 천지와 같은 두터운 은혜를 잊어버렸다. 군왕을 죽이고 궁궐을 불태웠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백성들을 무찔러 없앴다. 궁녀들은 약취하여 수레에 태워 갔으며 진귀한 보물들은 약탈하여 짐짝으로 실어 갔다. 당신의 죄악은 걸, 주보다 더하며 잔인하기가 맹수보다 심하다. 나의 지극한 원한은 신라 왕실이 무너진 데 맺혔고 깊은 성의는 백성의 원수를 물리치는 데 간절하였다. 그래서 역적을 처단하는 데 힘을 다함으로써 미미한 충성을 표시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무기를 든 후 두 번이나 해가 바뀌었다. 육전에서는 우레와 같이 달리고 번개와 같이 쳤으며, 수전에서는 범과 같이 때리고 용과 같이 뛰었다. 움직일 때마다 반드시 성공하였으며 일을 시작해서 허탕을 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위의 편지에서 왕건은 자신의 행위를 중국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이 패업(霸業)으로 주나라 왕실을 높였던 행위에 빗대었습니다. 또한 전한과 후한의 왕실을 무너뜨리려 했던 왕망과 동탁을 견훤에 비유했습니다. 왕건은 “자신은 존왕의 대의에 간절하기 때문에 (신라) 조정을 구원한 것이며, 털끝만 한 작은 이해에 눈이 어두워 군왕을 살해한 (견훤의) 죄악은 은나라와 주나라를 각각 망하게 한 걸(桀)과 주(紂) 임금보다 더하다.”라고 했습니다.
두 편지에서 초점이 되는 것은 신라 침입을 둘러싼 책임 문제입니다. 견훤은 존왕의 대의에 입각하여 신라를 바로잡기 위해 침입하여 국왕을 교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건은 국왕을 살해한 행위는 존왕의 대의를 무너뜨린 것이며, 은나라와 주나라를 각각 패망으로 이끈 걸(桀)과 주(紂) 임금보다 더 잔악한 행위라고 비난했습니다.
두 사람 편지에서 함께 나타난 존왕주의 이념은 후삼국 통합 전쟁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가를 알려 주는 하나의 지표가 됩니다. 즉 후삼국 통합 전쟁을 궁예, 견훤, 왕건이라는 영웅 군주들의 패권 다툼으로만 치부해 왔던 우리들에게 존왕주의라는 정치 이념은 이 시기 역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군사력이 현실적으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치열한 싸움터에 사활을 걸었던 두 영웅 군주이지만, 명분상 신라를 정통 왕조로 내세우는 존왕주의 이념을 강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민심을 얻어야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던 것입니다. 치열한 전쟁터 속에서도 존왕주의 이념이 생생히 살아 움직였다는 사실은 누가 승자가 되든 새로 건국될 왕조는 패도(覇道)가 아닌 왕도(王道)에 입각한 탄탄한 왕정(王政) 체제가 들어서리라는 예측을 하게 합니다. 정치 사상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한편, 후삼국 전쟁의 흐름을 크게 갈라놓은 분수령은 바로 견훤의 경주 침입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그 동안은 누구나 이 사건이 있고 나서 3년이 지난 930년의 고창군(지금의 안동) 전투를 후삼국 전쟁의 분수령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물론 두 영웅 군주 사이에서 그 향배를 저울질하던 고창군 주변 30여 성의 성주들이 고려국에 귀부함으로써 전쟁의 국면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성주들이 왕건 진영으로 넘어온 이유는 이들이 왕건의 존왕주의라는 대의명분에 더 찬동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경주 침입 때문에 결과적으로 견훤은 존왕주의라는 대의명분을 잃고 민심마저 잃어, 전쟁의 국면을 매우 불리하게 만든 자충수를 두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왕건은 공산동수 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건질 정도로 영웅 군주로서의 체면은 크게 손상되었지만, 정통 왕조인 신라를 구한다는 존왕주의의 대의명분에 충실했기 때문에 도리어 민심을 얻어 승자가 된 것입니다. 대의를 위해 소중한 것을 버릴 수 있을 때 오히려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왕건의 경우에도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