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라 건국 전승에 나타난 역사상
▣ 신라 시조 전승의 특징
이상에서 신라 시조 전승인 혁거세⋅탈해⋅알지 신화를 차례대로 살펴보았는데, 이들 신화를 종합하여 정리해 보도록 하자. 먼저 혁거세 신화는 천강 신화와 난생 신화의 모티브가 모두 포함되어 시조인 혁거세의 신성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그의 신이함은 왕비 알영과의 신성한 혼인으로 더욱 배가되고 있다. 알영은 지모 신적인 성격을 갖는 또 다른 신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알영 신화와 관련된 알영정과 용은 수신(水神)을 상징하며, 결국 농경과 깊은 관련을 보이는 존재이다. 혁거세의 신성함은 그의 죽음에서도 잘 드러난다.
탈해 신화는 난생적 요소만 있으며 천강(天降)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그가 동해 바닷가에서 출현하고 있기 때문에 해양 세력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또 호공의 집을 꾀를 써서 빼앗는 장면에서는 야장이라는, 철기 문화와 연관된 세력임을 짐작할 수 있다. 탈해의 활동 영역이 동해안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그의 세력 기반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으며, 그가 죽은 뒤에 동악(토함산)의 신으로 숭배되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
알지 신화에서는 난생(卵生) 요소는 없으며, 천강(天降) 모티브만을 포함한다다. 이러한 면만 제외한다면, 알지의 탄생을 묘사하는 장면은 혁거세 신화와 서로 통하는 면도 적지 않다. 이는 알지 신화가 혁거세 신화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음을 시사하며, 가장 후대에 성립된 시조 전승임을 반영한다.
혁거세⋅탈해⋅알지 신화는 각각 서로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는 이들을 시조로 내세우는 정치 세력 집단의 특성을 반영하거나 혹은 시조 전승이 성립된 시기가 서로 다름을 보여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3개의 왕실 시조 신화가 성립한 것은 3성이 교립하는 신라 사회 특유의 정치적 상황이 반영된 결과로, 이러한 점이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볼 수 없는 신라만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6촌장 설화도 각 성씨 집단 내지는 씨족과 관련된 설화로서 박혁거세 설화와 함께 신라의 건국 설화를 구성하고 있다.
사로 6촌은 사로국을 구성했던 여섯 개의 촌으로 사로국이 개창될 당시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등 6촌이 존재하였다고 한다. 6촌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경북 일원으로 보는 견해와, 경주시와 월성군 일대를 포함하여 보는 견해, 그리고 경주 시내나 경주 분지로 한정하여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신라 초기 6촌에서 6부로 전환되었다는 기사에 대하여 일부 연구자들은 본 기록을 신빙하여 유리 이사금 대에 6촌이 6부로 개편되었다고 보기도 하고, 일부는 그 시기를 뒤로 늦추어 파악하기도 한다. 또는 6촌 관련 사료의 신빙성을 문제삼아 아예 그에 관한 내용이 후대에 정리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 사로국의 위치와 유⋅이민
신라가 일어난 경주 일대의 자연 환경을 보면, 먼저 태백 산맥의 한 줄기인 동대 산맥과 주사 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어어지면서 동서의 경계를 이루고, 형산강 구조곡과 영천-경주 간 구조곡이 교차하는 지점에 제법 널찍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명활산⋅금오산⋅옥녀봉⋅선도산⋅금강산 등으로 둘러싸여 아늑하면서도 천연 요새를 이룬다. 도시를 구성하는 물줄기로는 남류하면서 서쪽 경계를 이루는 서천, 중심부를 관통하는 북천, 반월성을 싸고 도는 남천이 합류하여 형산강을 이루어 영일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은 제법 비옥한 농경 기반을 제공하여 일찍부터 선사 문화가 발전하였다.
경주 지역의 청동기 유적은 대동강 유역 다음으로 많다. 이는 신라 건국의 토대를 이룬 사로국의 역사적 기반을 보여 주는 셈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신라의 건국을 기원전 57년이라 하였으나, 사실상 소국 정치체의 형성은 이보다 이른 시기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찍부터 이 지역에는 청동기 문화와 철기 문화의 파동이 상당히 빨랐기 때문이다. 한반도 동남부에 자리잡은 경주 일대는 주민의 이동이나 문화적 파동의 종착지나 다름없었으며, 그 결과 여러 차례의 주민 이동에 의한 정치⋅문화적 변동이 있었다.
우선 가장 이른 시기에는 고조선계 이주민들의 이주가 있었다. 기원전 190년경 위만(衛滿) 세력에 의하여 내몰렸던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할 때 경주 지역에도 고조선계 이주민의 파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도 고조선 계통 주민들의 이주는 계속되었는데, 최종적으로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이 멸망하고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위만 조선계의 이주민들이 대거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그 일부가 경주 지역에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 본기에 “조선의 유민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산곡 간에 분거하여 육촌을 이루어 살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신라 사로 6촌을 형성한 고조선의 유민 집단은 위만 조선에게 밀려난 기자 조선의 유민일 수도 있고, 한에 패배한 뒤 이동한 위만 조선의 유민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경우가 모두 해당되어 조선의 유⋅이민이 서로 뒤섞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박혁거세가 등장하는 시기인 기원전 1세기경에야 위만조선 계통의 철기 문화가 경주 지역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경주 지역에서 6촌을 이루고 있던 조선 유민들이라고 한다면, 기자 조선의 유민들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 무렵에는 경주 일대만이 아니라 경상도 지역 전체에 걸쳐 위만 조선 계통의 청동기⋅철기 문화가 널리 유입되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한(漢) 계통의 철기 문화 역시 보급되면서, 전반적으로 금속제 유물의 수량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다량의 금속기를 바탕으로 소국 등 정치 세력 집단이 곳곳에서 등장하게 되는바, 대부분의 진한 소국들이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3성(姓) 설화와 정치 세력의 양상
신라의 건국 설화는 박혁거세 설화이지만, 이 외에도 초기에 신라에서는 3개 성씨를 갖는 왕실이 번갈아 왕위에 올랐으므로, 왕실의 시조 설화로서 석탈해 설화와 김알지 설화가 전한다.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설화와는 달리 3성의 왕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신라 국가의 형성 과정이 남달랐음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는 유⋅이민 세력의 경주 이주와 관련이 있다. 신라 왕실을 구성하는 족단으로는 박씨족과 김씨족, 석씨족이 있는데, 이들 3성 족단은 이주민 세력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3성의 이주 이전에도 선주 세력이 있었다. 즉 박혁거세가 최초의 지배자로 추대되기 이전에 경주 지역에는 6촌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신라의 모체인 사로국의 6촌, 즉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자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이다. 이 6촌이 연맹체를 이루어 사로국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박혁거세로 대표되는 박씨족의 등장이다.
박씨 족단 다음으로 사로국에 등장하는 인물은 탈해로 대표되는 석씨 족단이다. 탈해 집단이 동해안 아진포에 도착한 시기는 혁거세 39년(기원전 19년)으로 당시 사로국의 세력 범위는 지금의 경주 일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뚜렷한 정치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동해안 지역에 정착한 탈해 집단은 북방에서 가져온 우수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그곳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사로국의 중심부로 진출하였다. 설화의 내용에 의하면 동해안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운 탈해 집단이 사로국의 중심 지역까지 진출하여 선주 지배 세력인 혁거세 집단과 함께 지배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로국의 막강한 정치적 실력자였던 호공의 세력 기반을 흡수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호공와 결합한 탈해 집단은 사로국의 유력한 지배 집단으로 등장하게 되어 남해왕 이후에는 남해왕의 아들인 유리와 함께 왕위 계승권을 논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유리왕의 뒤를 이어 박씨 대신 사로국의 4대 왕으로 추대되었다.
다음 박씨, 석씨계와 더불어 사로국의 초기 지배 세력 집단으로 후일 신라를 대표하는 왕족이 된 김씨계의 시조 알지는, 탈해왕 대에 계림에서 신비스럽게 출생한 설화를 갖고 있는데, 김씨 집단이 박씨나 석씨 집단보다는 늦게 지배층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김씨계는 혁거세의 왕비가 된 알영계와 동일 계통으로 보이며, 파사왕과 지마왕의 왕비도 김씨계인 것으로 보아, 오히려 선주 토착 세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씨계는 우수한 철기 문화를 소유한 박⋅석씨 집단의 세력에 밀려 사로국 초기에는 혼인을 통하여 지배 세력의 기반을 유지하여 오다가, 2세기 중엽 이후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통해 얻은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비로소 왕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왕실의 교체는 곧 신라를 구성하는 세력의 다양성을 보여 줌과 동시에 그 정치적 변천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로국 최초의 지배자인 혁거세의 칭호는 ‘거서간(居西干)’이었다. 그 구체적인 어원을 알기는 어렵지만, 일종의 사로 6촌을 대표하는 부족장의 의미를 갖는다. 다음 그 뒤를 이은 남해왕은 ‘차차웅(次次雄)’으로 불렀는데, 이는 ‘무(巫)’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거서간과 그 기능과 성격이 다르지 않다. 즉 이 시기 지배자의 칭호는 제정일치적 사회의 모습을 보여 준다. 다음 박씨 집단으로 대표되는 사로국 세력은 석탈해와 연합함으로써 울산, 감포 방면으로 그 세력권이 확산되었는데, 보다 확대된 연맹체의 정치 기반을 상징하는 지배자의 명칭이 ‘이사금(尼師今)’이었다. 이처럼 처음 신라가 왕의 호칭으로 사용해 온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등은 그다지 권력자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던 것인데, 4세기 중엽 내물 마립간 때부터 쓰기 시작한 마립간 칭호는 '마루'의 지배자 혹은 으뜸가는 지배자라는 뜻 그대로 종전에 비하여 훨씬 강화된 권력자라는 느낌을 준다. 이 시기에는 사로국이 국가적 면모를 일신하여 국가 체제가 정비됨으로써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으며, 그 결과 박⋅석⋅김 3성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현상이 없어지고, 김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국가 체제를 갖추어 가면서 궁성 등 도성의 기반도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사료 4-2-01〕 『삼국사기』 잡지3 지리1
“처음 혁거세 21년(기원전 37)에 궁성을 축조하여 이름하기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파사왕 22년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았으며 월성 또는 재성이라 불렀다. 또한 신월성 동쪽에는 명활성(明活城)이 있다. 또 신월성 남쪽에는 남산성이 있다. 시조 이래 금성에 거처하였는데,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거처하는 일이 많았다. 그 외에 신월성 북쪽에 만월성과 북궁을 지었다.”
이들 중 왕궁성으로 사용된 것이 금성과 월성인데, 현재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은 월성(月城)으로, 오늘날 반월성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바로 석씨 왕계를 연 석탈해의 근거지였다. 다음 금성의 위치는 알기 어려운데, 『삼국유사』에는 “서남산 기슭에 있는 창림사지(昌林寺址)에서 궁실을 짓고 혁거세와 알영이 즉위 이전까지 거주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아직 그 유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