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보는 한국사이야기 고려사2. 고려 중기 정치 이념의 성립

5) 내치론(內治論); 부국 강병 정책을 비판하다

정치 사상사를 연구하면서 느끼는 매력 중 하나는 다양한 이념과 사상이 공존하는 가운데, 서로에 대한 견제와 비판을 통하여 새로운 이념과 사상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일입니다. 특히 왕조나 정권 변동기에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변동기의 역사가 역사 연구자의 매력을 끄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12세기 숙종이 즉위할 무렵은 대내적으로 외척 가문을 비롯한 문벌 귀족 중심의 정치가 이루어지던 때입니다. 이에 따라 특정 문벌 가문 사이의 혼인과 관직 수수를 둘러싼 파당(派黨)화, 족당(族黨)화 현상이 심해지면서 신진 세력의 정치 참여 기회는 점차 줄어들게 되고 여러 가지 정치적 폐단과 갈등이 나타납니다. 정치권 바깥에서는 권세가의 토지 탈점과 그로 인한 대토지 소유화 현상으로 불만을 품게 된 백성들이 도망하고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등 사회적 위기 의식이 팽배해집니다.

대외적으로도 거란은 끊임없이 압록강 일대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고려를 압박하고 있었고, 이에 고려는 송과 외교 관계를 재개하여 거란의 압박을 우회적으로 벗어나려 했습니다. 한편 고려와 거란의 국경 지대에 산재하던 여진 부족은 이 무렵 점차 세력을 규합하면서 고려 국경 지대에서 군사 충돌을 유발하는 등 신흥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합니다. 이같이 급격한 대외 정세의 변동 역시 고려 왕조에 커다란 위기 의식을 불러 왔습니다.

지배층 내부에서 이러한 대내외 정세에 대하여 가장 우려한 집단은 왕정(王政) 체제의 정점에 있던 국왕과 관료 집단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거주지를 벗어나 대량으로 유망(流亡)하는 현상은 왕조의 재정 기반을 흔드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왕조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일이었습니다. 국경 지대에서의 잦은 군사적 충돌도 이러한 위기 의식을 고조시켰습니다.

앞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왕과 측근 세력이 외치(外治)론, 즉 신법과 부국 강병론이라는 정치 이념으로 일련의 개혁을 시도했던 것은 이렇게 급변하는 대내외 정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주도한 신법, 즉 공리(功利)주의적인 부국 강병책은 순조롭게 추진될 수 없었습니다. 관료 집단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측근 중심으로 정책이 무리하게 추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정책이 성공할 수 없었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 정치⋅경제⋅사회의 주요 현안에 대한 정치 이념의 차이 때문입니다.

관료 집단은 한 세기 전 현종 때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한 문치주의 정치 이념으로써 왕정 체제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할 만큼 큰 정치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외척 가문 등 왕실을 위협할 정도로 정치 세력화한 고위 관료 집단뿐만 아니라, 측근을 중심으로 한 국왕 주도의 새로운 정책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먼저 왕실과 왕권 강화를 위하여 불교, 풍수도참 사상까지 거리낌 없이 수용한 신법 정책, 즉 외치론에 대하여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종 때 공경(公卿) 대신이 다투어 신법(新法)을 올리자, 고영신(高令臣)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사료 2-5-01〕 『고려사』 권 97 고영신 열전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 떠들썩하게 (신법으로) 고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성헌을 모두 지키고, 그것을 잃지 않는 것만이 가능합니다.”

숙종예종 때 재상을 지낸 최사추(崔思諏) 역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사료 2-5-02〕 최사추의 묘지명

“공은 정사를 처리하면서 조상의 법을 함부로 고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또 새로운 법을 만들어 풍속을 동요시키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벼슬에서 물러난 지 10년 동안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관직에 있을 때보다 덜해지지 않았다.”(『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최사추 묘지명; 김용선 역주, 한림대 출판부, 2006년)

위의 사실은 당시 신법을 반대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선대부터 만들어진 법을 따르면 되지, 굳이 새로운 법을 도입하여 풍속을 동요시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곽상(郭尙) 역시 당시 평장사 윤관이 화폐 유통 정책을 시행하려 하자, 풍속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고 극력 반대했습니다.(『고려사』 권 97 곽상 열전)

이러한 관료 집단의 생각은 반개혁적인 모습으로 비쳐질 여지가 없지 않으나, 정치 사상적 차원에서 유교 정치 이념에 배치되는 개혁은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개혁 정책을 둘러싼 지배층 내부의 갈등과 대립은 이같이 정치 사상의 차이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점은 예종 때 관료인 정극영(鄭克永)의 생각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료 2-5-03〕 『고려사』 권 98 정극영 열전

“『전한서(前漢書)』를 살펴보니, ‘천하의 걱정거리는 (백성이) 흙같이 무너지는 데 있다.’고 합니다. 진섭(陳涉)이라는 자가 궁핍한 시골에서 일어나 한 팔을 걷고 크게 호통하자, 천하가 바람같이 쫓았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백성이 곤궁한데 위에서 구휼하지 않고, 아래에서 원망하여도 위에서 알지 못하고, 풍속이 어지러워도 정사를 닦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섭은 이 세 가지 잘못에 편승한 것입니다. 이를 ‘(백성이) 흙같이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신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말을 참지 못하겠습니다. (중략)

근세(近世) 이래 백성이 부역에 괴로워하고 대병(大兵;* 여진 정벌)을 일으킨 뒤로 해마다 기근이 계속되었습니다. 계책을 올리는 자들은 한갓 법에 의존하여 민심을 흔들고, 관리들은 가혹한 정치로 국체(國體)를 상하게 합니다. 공사(公私)가 고갈되고 간악한 무리가 다투어 일어나, 위로는 왕조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아래로는 물의(物議)가 분분합니다. 만약 사변(事變)이 한 번 일어나면 탄식한들 어찌하겠습니까? (중략)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허심탄회하게 널리 뭇 어진 이를 맞이하시어, 조정의 기강이 문란케 된 바를 상고하고 올바른 길이 허물이 된 것을 분별하여야 합니다. 무슨 정책을 시행해야 나라 형세가 편안할 수 있으며, 무슨 혜택을 베풀어야 백성이 살아날까 하여 그 근원을 추구하고 장래에 대비하여야 화기(和氣)가 멀리까지 가득 차서 태평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정극영은 중국 한나라에서 진섭의 난이 일어난 원인으로 민생을 구휼하지 않은 일, 불만의 소리를 듣지 않은 일, 군주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일 등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이를 교훈으로 삼아, 그는 국왕에게 어진 이를 불러들여 그들의 의견을 기탄없이 받아들이고, 백성의 곤궁함을 구휼하며, 정사를 잘 돌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건의했습니다. 결국 민생의 안정과 군주의 수덕(修德)이 통치의 요체라는 것이 정극영의 생각입니다. 이는 바로 유교 정치 이념이 지향하는 정치의 핵심적인 내용이기도 합니다.

정극영은 여진 정벌과 수도 천도와 같은 신법 정책의 시행으로 백성들이 가혹한 부세와 부역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나라의 형세가 불안한 데 대한 처방으로 국왕에게 유교 정치 이념에 입각한 통치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의 생각은 결국 그 동안 시행되었던 신법 정책에 반대한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적극적인 대외 정책, 부국 강병책 같은 외치(外治)보다는 민생의 안정, 이를 위한 군주와 지배층의 수덕(修德)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으로, 민생의 안정이 왕조의 안정과 직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치(內治)가 외치에 우선하여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유교 정치 이념에 충실한 정치를 강조했던 정극영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 관료 집단 일반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진 정벌의 부사령관으로 참여한 오연총(吳延寵) 역시 당시 관료 집단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종서경의 용언궁(龍堰宮) 터에 새 궁궐을 지으려는데 대해 다음과 같이 반대합니다.

〔사료 2-5-04〕 『고려사』 권 96 오연총 열전

“지금 용언궁을 짓는 데에는 세 가지 불가능한 이유가 있습니다. 밝은 지혜를 가진 문종도 술수(術數)에 빠져 서경에 좌우궁(左右宮)을 지었다가 곧 감응이 없다고 하여 끝내 그곳에 순어(巡御)하지 않아 재력만 허비한 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근래 남경(南京)을 개창한 지 8년이 지났으나 좋은 감응이 없는 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서경의 옛 궁궐이 지금 지으려는 용언궁(龍堰宮)과 그리 멀지 않아, 지세의 길흉이 반드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명백한 증거가 없는데도 옛 궁궐을 버리고 새 궁궐을 짓기 위해 집을 헐고 백성을 동요시키는 것이 셋째 이유입니다. (중략) 바라건대 국왕은 구궁(舊宮)에 순어하여서 사직의 장구한 계책을 강구하고 억설(臆說)을 좆아 망령되이 공역을 일으켜 사람들의 원망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면 합니다.”

위의 글에서 궁궐 신축에 따른 재정 낭비와 노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불만, 풍수도참 술사(術士)들의 주장과는 달리 감응이 나타나지 않는 점 등을 들어, 오연총은 서경의 용언궁 신축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민생의 안정을 중시했던 그는 결과적으로 풍수도참 사상보다는 유교 정치 이념에 입각한 정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숙종예종 초 부국 강병론의 신법 정책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임을 잘 보여 주는 예가 됩니다.

수도 천도론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여진 정벌로 얻은 9성을 돌려주고 여진과 화평을 유지하자는 견해도 대두합니다.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사료 2-5-05〕 동북의 9성과 관련된 사료

(1) “(여진 정벌로 인해) 무공(武功)이 이미 이루어졌고, 국위(國威)도 이미 떨쳤으니 마땅히 군사를 거두어 만전(萬全)을 도모할 때입니다. 다시 깊이 적지(賊地)에 들어가 성지(城地)를 두는 것은 지금은 비록 성공할지라도 뒷날 그것을 지키기가 어려울까 두렵습니다.”(『고려사』 권 95 박경인 열전)

(2) “토지는 본래 백성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는 일은 그 땅(*9성)을 돌려주어 백성을 쉬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제 되돌려 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契丹)과 더불어 사이가 나빠질 것입니다.”(『고려사』 권 96 김인존 열전)

(3) “나라에서 처음 9성을 쌓고 거란에게 알린 글에, ‘여진의 궁한리(弓漢里)는 우리의 옛 영토이고, 그 주민도 우리의 백성이다. 그런데 (여진이) 근래 변방을 침범하기를 그치지 않아, 이곳을 수복하여 성을 쌓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궁한리의 추장 가운데 거란의 관직을 받은 자가 많아, 거란은 (그들을 통해) 우리가 거짓말한다고 하여 반드시 책망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동쪽으로 여진을 방비하고, 북쪽으로 거란을 방비하게 된다면, 9성이 삼한의 이익이 되지 못합니다.(『고려사절요』 권 7 예종 4년 5월 조)

윤관 영정
출처: 문화체육관광부 선현의 표준영정

자료 (1)은 여진 정벌에 참여한 박경인(朴景仁)이 윤관9성을 수축하려 하자, 그에 반대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박경인은 여진 정벌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나, 그곳에 9성을 수축할 경우 뒷날 여진의 반격으로 도리어 많은 희생을 치를 것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이는 뒷날 9성 환부(還付)와 함께 정벌 사령관 윤관에게 패전(敗戰)의 책임을 묻는 명분이 됩니다. 자료 (2)와 (3)은 김인존(金仁存)의 상소문입니다. 9성 수축이 거란과의 외교 마찰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국경 방어선이 거란과 여진으로 확대되어 고려에 상당한 부담을 안겨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김인존은 9성 수축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위의 자료에는 9성 수축에 대한 반대와 함께 수축된 9성을 여진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논의가 담긴 것이지만, 이를 통해 당시 관료 집단 사이에서 숙종예종 때의 여진 정벌 자체에 대하여 상당한 반대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료 2-5-06〕 『고려사절요』 권 7 예종 4년 7월 조

“재신과 추신 및 대성(臺省)⋅제사(諸司)⋅지제고(知制誥)⋅시신(侍臣)⋅도병마사 판관 이상 문무 3품 이상을 선정전에 모아 9성을 돌려주는 일에 대해서 의논했다. 모두 돌려주는 것이 옳다고 말하였다. 왕은 선정전에서 여진 사신에게 9성을 돌려줄 것을 허락하였다.”

위의 자료는 당시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는 일에 대부분의 관료들이 찬성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국왕이 왕정 체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관료 집단의 동의 없이 단행한 정책이 어떤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지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숙종예종 및 그 측근 세력은 수도 천도, 여진 정벌, 화폐 유통 등 외치(外治) 위주의 강력한 대외 정책과 재정 정책, 때로는 불교와 풍수도참 사상을 수용하여 공리주의적 부국 강병책인 신법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관료 집단은 그러한 외치보다는 내치(內治)를 더 중시하고, 국왕과 관료 집단의 수덕(修德)을 통한 도덕성 제고와 민생의 안정을 추구하려 했습니다.

12세기 초 수도 천도와 여진 정벌, 화폐 유통 등 주요 정치 현안을 둘러싸고 국왕을 중심으로 한 측근 세력과 관료 집단 사이의 치열한 대립과 갈등은 단순히 정치적인 이해 관계에 따른 이합집산이나 파당적인 형태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러한 대립과 갈등은 각 집단이 지향하던 정치 이념 내지 정치 사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국왕과 측근 세력은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중시하고 과감한 재정 개혁을 통하여 국가 주도의 유통 경제권을 회복하려는 공리주의적 부국 강병의 이념을 추구했습니다. 이를 외치론(外治論)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관료 집단은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대외 관계를 유지하면서, 민생의 안정과 지배층의 도덕적 각성을 통하여 내치의 안정을 추구하려는 정치 이념을 지녔습니다. 이를 내치론(內治論)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 과정 속에서 당시의 정치 이념과 사상은 나름대로 다양하게 분화,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