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왜 천인 감응(天人感應) 사상이 고려 왕조기에 성행했을까
유교 정치 이념은 국왕과 관료 집단이 지배와 통치의 중심이 되는 왕정(王政; 또는 군주정) 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념의 하나입니다. 중국 한나라에서 통치 이념으로 채택된 이래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에서 이를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던 왕조들이 적지 않습니다. 고려 왕조 역시 유교 정치 이념이 채택되었고, 그에 입각한 각종 문물과 제도가 수용되면서 빠른 시일에 성공적으로 지배 체제의 안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특히 광종 대 과거제의 수용에 따라 능력과 실력을 겸비한 인재가 관료 집단으로 충원되면서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였습니다. 왕조 건국의 주역이었던 지방 세력 중에서도 새로운 이념과 체제에 동화되지 못한 층은 점차 지배 질서에서 배제되는 등 지배층의 빠른 교체가 이루어졌으며,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지 않은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유교 정치 이념과 함께 그에 걸맞은 제도와 문물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국왕과 관료 집단은 동일한 정치 이념을 공유함으로써 커다란 갈등과 마찰 없이 대내외 현안들을 처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권력 배분을 둘러싼 국왕과 관료 집단, 즉 왕권과 신권의 대립과 갈등을 제어하고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을 경우, 왕정 체제는 위기에 쉽게 노출되는 단점을 지닙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고려 왕조 때에 이른바 천인 감응(天人感應) 사상 혹은 천인 합일(天人合一) 사상이 유행하게 됩니다.
이 사상은 일찍이 유교에 의한 사상 통일을 이루었던 중국 한나라의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이론화 되었습니다. 그는 하늘과 인간은 하나로서, 서로 감응하는 존재로 이해하였습니다. 즉 자연 현상의 하나인 재이(災異)는 정치와 도덕이 문란하여 음양의 운행이 교란하여 발생하는 것이며, 반대로 군주가 바르면 음양의 운행이 정상화됨으로써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군주는 하늘, 즉 천(天)의 대행자인 초인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군주의 잘못에 대해서는 하늘이 재이를 통해서 즉 천견(天譴)을 통해 경고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의 사상은 군주로 하여금 왕도 정치를 실현하여 천하를 바르게 하고, 덕교(德敎)에 힘쓰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동중서의 천인 감응 사상은 고려 왕조기에 수용되어 널리 유행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이 당시 어떤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였는지 살피는 일은 당시의 정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자료는 인종(1123-1146년 재위) 때 임완(林完)이 올린 상소문입니다. 임완은 중국 송나라에서 귀화하여 인종 때 관료로 활약했던 인물입니다. 당시 국왕 인종은 이자겸의 난을 직접 체험하면서, 개경의 문벌 귀족 중심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인종은 추락된 왕실과 국왕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인 서경 세력과 결합함으로써 서경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정치를 펼치고자 했습니다. 임완은 천인 감응 사상을 내세워 인종의 정치를 견제하려 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개경 정치 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임완 열전은 이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데, 그의 상소문 가운데 일부를 먼저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료 2-2-01〕 『고려사』 권 98 임완 열전
“일찍이 동중서(董仲舒) 책문에, ‘나라에 장차 실도(失道)의 패란(敗亂)이 있을 경우, 하늘이 먼저 재이를 내려 경고한다. 그런데도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면 또 다시 괴이(怪異)한 재이를 내려 경고하고 두려워하게 한다. 그런데도 그 변화를 알지 못하면 상(傷)하여 패망하게 된다. 이는 하늘의 마음이 인군(人君)을 인애(仁愛)하여서 그 혼란을 그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스스로 크게 무도(無道)한 세상이 아니면, 하늘은 모두 붙들고 안전하게 하고자 한다. 인군은 하늘의 경고에 답하는 일에 힘써 실(實)을 가지고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하늘에 응하는 일은 실(實)로써 해야지 문(文)으로 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실(實)은 덕(德)이며, 문(文)은 요즈음의 도량(道場)과 재초(齋醮)의 종류와 같은 것입니다. 인군이 덕을 닦아서 하늘에 응하면 복(福)을 기약하지 않아도 복은 스스로 오는 것입니다. 덕을 닦지 않고 헛되이 허황된 문(文)만 일삼는다면, 무익할 뿐 아니라 하늘을 모독할 따름입니다.”
임완이 인용한 중국 한나라 동중서(董仲舒)의 글에 따르면, 자연의 여러 가지 재이 현상은 국왕의 실정에 대한 하늘의 경고이며, 그것을 막기 위해 군주는 실(實)의 정치인 덕치(德治)를 해야 하며, 헛된 문(文)과 같은 불교 의례인 도량이나 도교 의례인 재초와 같은 행사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임완은 당시 국왕 인종이 서경 세력인 묘청 일파에 기대어 각종 도량과 재초 행사를 행하는 것을 비판하기 위하여, 동중서의 천인 감응 사상을 인용하여 국왕이 자연 재이 현상을 막는 유일한 수단은 수식(修飾)과 형식에 치우친 불교나 도교와 같은 의례를 배격하고, 유교 이념에 입각한 덕치 혹은 인정(仁政)을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천인 감응 사상이 고려에 수용되어 유교 정치 이념에 입각한 정치를 강조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사상은 유교 정치 이념 자체의 충실성을 제고시켜, 유교 정치 이념의 발전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음을 알려 줍니다.
성종 때 최승로의 상소문인 ‘시무 28조’에 따르면 덕치와 인정이 유교 정치 이념의 중심이라고 강조하면서 도량과 같은 공덕재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글이 바로 그러합니다.
〔사료 2-2-02〕 『고려사』 권 93 최승로 열전; 시무책 제2조
“가만히 듣건대 성상께서 (불교의) 공덕재(功德齋)를 베풀기 위해 친히 차를 댓돌에 갈기도 하고 보리를 찧는다고 하니, 이는 성상의 몸을 피곤하게 하는 것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폐단은 광종 때 시작한 것으로, 남을 헐뜯는 말을 믿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서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현혹되어 죄업을 없애고자 하여 백성의 고혈을 빨아 많은 불사(佛事)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중략) 지금 성상께서 왕위에 있으면서 하시는 일은 광종 때와 같지 않으나, 다만 이러한 불사는 오직 성상의 몸만 수고롭게 할 뿐 이익을 얻는 바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군왕의 체통을 바르게 하여 무익한 일을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최승로는 공덕재와 같은 불교 의례는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군주의 체통을 저버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유교 이념에 충실한 덕치와 인정만이 군주 정치의 요체임을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최승로가 천인 감응 사상을 수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종 때에는 이 사상이 지배층에 유포되어 공유되었음을 다음의 글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사료 2-2-03〕 『고려사』 권 7 문종 9년 10월
“옛날 제왕들이 불교를 숭상한 것은 각종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태조 이래로 사원을 건립하여 복과 경사를 빌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 덕정(德政)을 닦지 않아 재변이 잦았다.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나라에 복과 이익을 끼치고자 한다. 관리들은 땅을 가려 사찰을 짓도록 하라. 문하성에서 상소하기를, ‘옛날의 성왕(聖王)과 명철한 군주(明王)는 사찰을 짓지 않고 태평을 이루었습니다. 오직 법문(法門)을 존경하고 정교(政敎)를 신중하게 살피고 민력(民力)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 종묘와 사직은 오래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의 글에서 문종이 덕정을 닦지 않아 잦은 재변이 일어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천인 감응 사상을 수용하고는 있지만, 다만 사찰을 건립하여 재변을 막으려 했습니다. 이에 대해 신하들은 정치와 교화를 신중히 하고 백성의 힘을 손상하지 않는 덕치와 인정만이 재변을 막는 길이라 하면서 사찰 건립에 반대하였습니다. 유교 정치 이념의 또 다른 형태인 천인 감응 사상은 이같이 당시 고려 지배층에 널리 유포되어 공유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글에 주목해봅시다.
〔사료 2-2-04〕 『고려사』 권 8 문종 12년 8월
“수년(數年) 이래 수한(水旱)이 고르지 못하여 재변(災變)이 자주 나타나니, 이는 모두 형정(刑政)이 잘못되어 원망과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만약 위로 하늘의 경고(天譴)에 답하고 아래로 백성의 바람을 위로하려면 마땅히 죄수를 용서하고 형을 관대히 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덕을 닦는 길밖에 없다. 양경(兩京)의 문무(文武), 남반(南班) 원리(員吏) 가운데 죄를 범하여 쫓겨난 자와 주(州)⋅부(府)⋅군(郡)⋅진(鎭)의 향리와 장교(將校)로서 죄를 범하여 쫓겨난 자가 있으면 담당 관청은 그 경중을 참작하여 종전대로 임용하라. 아첨하고 간사하여 사사로운 죄를 다시 범한 자는 제외하고, 공도사장(公徒私杖) 이하는 면죄(免罪)하라.”
문종은 앞의 글에서 재이 현상을 막기 위하여 사찰 건립을 시도했지만, 3년이 지난 후에는 이같이 잦은 재이 현상은 형정(刑政)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죄를 지어 쫓겨난 관리들을 다시 임용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천인 감응 사상은 이같이 군주의 실정 때문에 재이 현상이 나타나며, 군주는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에 대하여 자성(自省)하여 덕치를 펼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상은 유교 정치 이념 자체의 충실성을 제고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사상이 고려의 정치 사상에 미친 첫 번째 의미는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한편 이 사상은 왕권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논리로 활용되면서 유교 정치 이념의 변화와 발전에도 상당한 역할을 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사상은 유교 정치 이념의 한계로 나타나는 왕권과 신권의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고 견제하는 논리로 활용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임완이 동중서의 천인 감응 사상을 인용했던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의 상소문에서 다른 부분을 다시 인용하기로 하겠습니다.
〔사료 2-2-05〕 『고려사』 권 98 임완 열전
“대화궁(大華宮)을 지으면서 백성을 수고롭게 하여 백성이 원망하고 탄식합니다. 지난해 (서경에) 순행하실 때 불탑(佛塔)에서 재앙이 있었고, 금년 순행에서는 유성(流星)이 떨어지고 말이 놀라는 일이 잇따랐습니다. 이 궁궐은 복을 빌기 위해 지었는데 7, 8년이 지나도록 상서로운 조짐은 없고 재앙만 있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늘의 뜻은 ‘간사한 사람이 임금을 현혹하니,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하늘은 속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이전에 있었던 여러 변고는 하늘이 폐하를 경고하고 놀라게 한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한 명의 간신을 아깝게 여기시면서 하늘의 뜻을 저버리려 합니까? 원하건대 강한 권위로써 묘청의 목을 베어 하늘의 경고에 답하고, 민심을 위로하십시오.”
위의 글에서 임완은 서경에 궁궐을 지었는데도 잇따라 나타난 재앙은 하늘의 경고라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그는 인종의 서경 천도 계획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 계획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임완은 이같이 동중서의 천인 감응 사상을 통해 서경 천도를 강행하려는 군주권을 비판, 견제하였던 것입니다.
천인 감응 사상은 고려 왕조의 유교 정치 이념이 발전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는 고려 왕조의 통치 이념인 유교 정치 이념의 충실성을 제고하여, 그것이 고려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 정치 이념의 한계 중 하나인 왕권과 신권의 대립과 갈등을 완화하고, 왕권에 대한 비판⋅견제의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천인 감응 사상이 고려 지배층에 널리 유포⋅공유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할과 기능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