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경 천도 운동; 정치 사상의 분화와 발전에 기여하다
1132년(인종 10) 3월 이지저의 금나라 정벌에 대한 반대 상소와 함께 같은 해 8월 임원애의 묘청 처단 상소 등 개경 세력의 반발이 잇따르자, 그해 11월 묘청은 다시 국왕에게 서경의 대화궁에 거처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의(御衣)라도 대화궁에 가져다 둘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사료 3-3-01〕 『고려사절요』 권 10 인종 10년 11월 조
“11월 중서시랑 평장사 문공인과 내시 예부원 외랑 이중부가 어의(御衣)를 받들고 서경으로 가서 법사(法事)를 행하였다. 이때 묘청 등이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마땅히 대화궐(大華闕)에 오랫동안 거처하셔야 합니다. 아니면 근신을 보내어 예의를 갖추어 어좌(御座)를 설치하고 어의를 모셔 두고 공경히 받들기를 주상께서 계신 것과 같이 하면 복과 경사가 친히 계신 것과 다름없을 것이니, 이것을 일러 법사를 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인종은 어의를 대화궁에 보낸 직후 다음과 같은 교서를 반포합니다.
〔사료 3-3-02〕 『고려사절요』 권 10 인종 10년 11월 조
“짐이 박덕한 사람으로 조종의 기업을 이어받았는데 마침 쇠퇴한 말세를 당하여 누차 변고를 겪고 아침저녁으로 힘써 중흥을 이룩하기를 바랐다. 옛 사람의 교훈에, ‘수만 년을 쌓으면 반드시 동지(冬至) 갑자(甲子)일을 만나 일월과 오성(五星)이 모두 자(子)에 모이므로 ‘상원(上元)’이라 일컬어 역의 시초가 된다.’ 하였다. 이제 11월 6일 동지의 밤은 갑자에 해당하여 삼원(三元; 상⋅중⋅하원)의 시초가 되니 묵은 것을 버리고 새 것으로 개혁할 것이다. 이에 유사에 명하여 옛 현인의 유훈을 좇아 서경에 대화궐을 창건하노니, 대신⋅대부⋅백관들은 함께 혁신의 정치를 도모하여 영원한 앞날의 복을 더하도록 하라.”
인종은 왕조 중흥을 위하여 서경에서 혁신의 정치, 즉 유신의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대화궁 창건도 그러한 목적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묘청의 처단을 주장했던 국왕의 장인 임원애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국왕은 그때까지도 묘청 일파를 신임하여 그들과 함께 서경에서 왕조를 중흥하려는 정치 의지를 내보였습니다.
1133년(인종 11) 11월 이중⋅문공유 등이 묘청의 심복이 되어 그를 성인이라 칭하는 국왕의 측근인 김안⋅정지상⋅이중부 등을 내칠 것을 상소했으나, 국왕은 이듬해 1134년 1월 묘청을 삼중 대통 지누각원사(三重大統知漏刻院事)라는 직함을 내리고 자의(紫依)를 주어, 여전히 그를 신임합니다. 또한 인종은 그 해 2월 서경에 행차하여, 3월 대화궁에 머뭅니다. 이는 서경 세력을 신임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펼치려는 국왕의 의지가 변함없음을 보여 주는 행위였습니다. 그러자 그 해 5월 임완은 서경에 대화궁을 지은 지 7, 8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효험도 없을 뿐더러, 도리어 재변(災變)이 잦은 것은 하늘의 경고이므로 묘청을 처단할 것을 상소합니다.
개경 정치 세력이 이와 같이 묘청의 처단을 강하게 주장하자, 이 무렵(1134년)부터 서경 세력과 더불어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고자 했던 인종의 정책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다음의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료 3-3-03〕 『고려사절요』 권 10 인종 12년 9월 조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였다. 이때 묘청 도당이 서경으로 순행하기를 청하여 역모를 성취하려 하였다. 왕이 양부(兩府)에서 이를 의논하자, 김부식이 아뢰기를, ‘올 여름에 벼락이 건룡전을 친 것은 길한 징조가 아닌데, 벼락을 친 그곳으로 재앙을 피하러 간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더욱이 지금 가을 곡식을 거두지도 않았는데 행차하게 되면 반드시 벼를 짓밟게 될 것이니,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아끼는 뜻이 아닙니다.’ 하면서, 간관과 더불어 상소를 올려 서경 행차가 불가하다는 사실을 굳게 말했다. 왕이 말하기를, ‘말한 바가 지당하니 짐이 감히 서쪽으로 순행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에 일관의 건의에 따라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인종은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정치 세력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서경으로 순행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장원정으로 행차합니다. 그 이유는 재변(災變)이 있었던 서경 궁궐로의 행차는 옳지 않은 것이며, 농사철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생업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따라서 서경 대신 장원정으로 행차했다는 것은 서경 세력과 함께 새로운 정치를 도모했던 인종의 의지가 좌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개경 정치 세력의 완강한 반대라는 현실 정치의 벽을 결국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는 인종과 개경 정치 세력이 타협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다음의 기록이 참고가 될 것입니다.
〔사료 3-3-04〕 『고려사절요』 권 4 인종 10년 12월 조
“(문종은) 장원정(長源亭)을 서강(西江)⋅병악(餠嶽) 남쪽에 지었다. 도선(道詵)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에, ‘서강 가에 군자가 말을 탄 형국의 명당이 있으니, 태조가 통일한 병신년(936)으로부터 120년이 되는 해에 여기에 집을 지으면 국업(國業)이 연장된다.’ 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태사령 김종윤(金宗允) 등에게 명하여 터를 보아 짓게 한 것이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문종은 후삼국 통일 후 120년 되는 해인 1056년(문종 10)에 장원정을 건립하면 국업이 연장된다는 도선의 풍수도참 사상에 따라 장원정을 건립합니다. 또한 문종은 같은 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흥왕사(興王寺)를 건립합니다. 왕실의 중흥과 왕권을 강화하려는 문종의 염원이 장원정 건립에 담겨 있습니다.
인종의 장원정 행차 역시 문종의 정치적 지향과 다를 바 없습니다. 풍수도참 사상도 정치 사상의 하나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가 두 국왕의 장원정 건립과 행차에 각각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은 서경의 정치 세력과 결합할 수 있었고, 서경 세력이 한때 정국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과 사상적 지향이 동일했기 때문입니다.
서경 행차를 단념한 인종은 이후 여러 차례 장원정에 행차합니다. 그것은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정치 세력의 반대로 인한 정치적 타협의 결과입니다. 또한 서경의 묘청 일파와 결합하여 풍수도참, 불교 및 도교 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를 꾀하려 했던 인종의 정치 실험이 좌절되었음을 뜻합니다. 한편 이로 인해 유교 정치 이념이 풍수도참, 불교 및 도교 사상을 축으로 한 정치 이념을 압도하면서,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장원정 행차는 1134년(인종 12) 9월로, 묘청의 난(1135년 1월)이 일어나기 4개월 전입니다. 이를 계기로 인종은 서경 정치 세력과 결별하게 됩니다. 그 해 12월 우정언 황주첨(黃周瞻)이 묘청과 정지상의 뜻을 받들어 왕에게 칭제 건원을 청했으나, 왕이 답하지 않았습니다. 묘청 일파의 서경 천도 운동은 이로써 사실상 실패합니다. 묘청 일파는 1135년(인종 13) 1월 서경에서 마침내 반란을 일으킵니다.
〔사료 3-3-05〕 묘청의 반란과 난의 진압
1) “무신일에 묘청과 유감(柳旵)이 분사시랑 조광(趙匡) 등과 더불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의 명령을 위조하여 유수와 관원을 잡아 가두고, 또 위승선(僞承宣) 김신(金信)을 보내어 서북면 병마사 이중(李仲) 등과 여러 성의 군사⋅장교, 서경에 있는 상경(上京)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또한 모두 구류하였으며, 군사를 파견하여 절령(岊嶺) 길을 단절하였다. 또 사람을 보내 위협하여 여러 성의 군병을 징발하였고,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였다. 정부의 부서를 정하고 그 군대를 ‘천견충의(天遣忠義)’라 하였다. 묘청이 조광 등과 더불어 관풍전(觀風殿)에 모여 군마를 호령하며 두어 길로 나누어 곧장 상경(上京)으로 향하려 하였다.”(『고려사절요』 권 10 인종 13년 1월 조)
2) “왕이 임원애에게 도성에 머물러 호위하라 명령하고, 김부식에게 부월(鈇鉞)을 내려 보내면서, ‘도성문 밖의 일은 장군이 처결하라. 그러나 서경의 적도 모두 나의 적자(赤子)이다. 그 괴수만을 죽이고 부디 많이 죽이지 말라.’ 하였다.”(『고려사절요』 권 10 인종 13년 1월 조)
3) “이날 밤에 성중이 요란하여 조광이 어찌할 바를 몰라 온 가족이 스스로 불을 질러 타 죽고, 낭중 유위후(維偉侯)와 팽숙(彭淑)⋅김현근(金賢瑾)은 모두 목매어 죽었으며, 정선(鄭璇)⋅유한후(維漢侯)⋅정극승(鄭克升)⋅최공필(崔公泌)⋅조선(趙瑄)⋅김택승(金澤升)은 모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적이 그의 괴수 최영(崔永) 등을 잡아서 나와 항복하니, 김부식이 받아서 관리에게 회부하여 군사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늙은이와 어린아이, 부녀자들에게는 성에 들어가서 각기 집을 보존하도록 하였다.”(『고려사절요』 권 10 인종 14년 2월 조)
4) “(3월) 김부식을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로 삼았다. (중략) 4월 김부식이 개선해 돌아왔다.”(『고려사절요』 권 10 인종 14년)
사료 1)은 묘청이 1135년(인종 13) 1월 4일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그 군대를 ‘천견충의(天遣忠義)’라 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전합니다. 1월 4일은 난이 일어난 사실이 개경에 알려진 날짜이며, 실제로 반란은 그 이전에 일어난 것으로 판단됩니다. 사료 2)는 그 해 1월 10일 김부식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진압군이 편성된 사실을 알려 주는 자료입니다. 사료 3)은 1136년(인종 14) 2월 20일 난이 진압된 사실을 알려 줍니다. 사료 4)는 그 해 3월 국왕은 난을 진압한 공로로 서경에 머물던 김부식에게 공신호를 내리고 최고위직인 문하시중에 임명한 사실과 함께, 다음 달 김부식이 개경으로 개선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1년 1개월 만에 묘청의 난은 진압됩니다.
고려 왕조의 왕정 체제를 뒷받침했던 주류 정치 사상은 유교 정치 이념입니다. 풍수도참 사상과 불교, 도교 사상 등이 민간에 널리 유행했지만, 인종 이전에는 정치 사상으로서 주류의 지위를 차지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배층 가운데 이러한 사상을 개인적으로 숭배한 경우는 적지 않았지만, 이자겸의 난 이후 국왕 인종이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기 위하여 이러한 사상을 신봉했던 묘청⋅백수한 일파의 서경 세력과 결합하면서, 풍수도참 사상과 불교, 도교 사상 등은 하나의 정치 사상으로서 정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인종이 묘청⋅백수한 등 서경 세력의 지덕 쇠왕론(地德衰旺論)에 따라 서경 천도를 통하여 새로운 정치를 꾀했던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일찍이 문종도 도선의 풍수도참 사상에 입각하여 국업을 연장하기 위해 장원정을 건립했으며, 숙종은 왕조 건국 후 160년이 지나면 개경의 지덕이 쇠한다는 도선의 사상을 내세워 남경 천도를 꾀합니다. 이들 국왕은 이를 통하여 기득권을 지닌 외척과 문벌을 억누르고 왕권을 회복하려 했습니다. 서경 세력과 인종이 지향했던 정치 이념은 이런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강력한 대외 정책과 부국 강병론을 통하여 왕실의 권위 회복과 왕권 강화를 시도하는 가운데 불교와 도교, 풍수도참 사상이 정치 사상으로서 등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 사상은 숙종과 예종 초, 그리고 인종 때 두 차례 외치론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사상은 뿌리를 내리는 데 실패했습니다. 앞에서 살폈듯이 숙종과 예종 초에 추진되었던 여진 정벌과 부국 강병론, 즉 외치론은 문치주의에 기반한 유교 정치 이념을 소유한 문벌과 유교 관료 집단의 내치론에 밀려 실패하고 맙니다. 이자겸의 난으로 왕실과 국왕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자, 인종은 풍수지리와 음양 사상 등을 지닌 묘청⋅백수한 등 서경 세력을 새로운 정치 파트너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김부식 등 개경의 유교 관료 집단과 외척의 반대로 역시 실패합니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서경 정치 세력의 등장과 반전의 내면에 흐르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고려의 정치 사상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수용하고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그 내용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묘청의 난과 같은 정치적인 도전과 실패는 당시의 정치⋅사회에 커다란 혼란을 낳았지만, 정치 사상사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역사의 발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