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보는 한국사잡록(雜錄)⋅필기(筆記)류 자료를 통해 본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1. 양반의 삶

4) 양반의 여러 모습

조선 후기에는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한 변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돈에 대한 관심의 증가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조선 지식인들은 ‘청빈(淸貧)’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면서 화폐가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하였다. 그 결과 이제 경제에 초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성대중(成大中)은 자신의 아버지대만 해도 사대부들이 재물에 대해 이처럼 초연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당시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사료 1-4-01〕

지금은 친구들끼리 선물할 때 돈이 없으면 야박하다고 여긴다. 또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감히 돈을 손에 대지 못했으니, 어른들이 금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귀천을 막론하고 아이들에게 돈을 채워 주기를 마치 주옥이나 장난감같이 하니, 풍속이 천박하게 변함이 마침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친구들에게 돈을 선물하는 사대부의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도 돈을 주는 것 역시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이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현실이었다.

경제적 변화가 발생하면서 양반층도 분화되었다. 대대로 벼슬을 하면서 많은 재산을 축적한 부류도 있는 반면 정권에서 소외되어 서서히 몰락해 가는 이들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할 경우에는 그나마 지방 사회에서 행세할 수 있었지만 가난한 양반은 이름만 양반일 뿐이었다. 경제적으로 평민들보다 못한 부류도 적지 않았다. 생업에 종사했던 양반들의 이야기는 쉽게 찾아진다.

〔사료 1-4-02〕

① 선비 이식(李栻, 1659~1729)은 집이 가난하였다. 어려서 과천의 청계산 밑에서 살며 밤에는 책을 읽고 낮에는 땔감을 모아 도성으로 들어왔다. 근력이 남들보다 좋아 등에 진 나뭇짐이 곱절이었고, 한 입으로 값을 다르게 부르지 않아 사람들도 값을 깎지 않았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② 판서 서유대(徐有大, 1732~1802)는 젊어서 고아로 곤궁하였다. 충청도 덕산에 살았는데 가난해서 끼니를 해결할 수 없자 손수 남초 밭을 일구어 재산을 모은 후 무과에 급제하였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이식은 개국공신 이곤(李坤, 1462~1524)의 7세손이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땔나무를 하며 학문을 닦다가 천거를 받아 수령 자리에 올랐고, 서유대는 명문 달성 서씨의 후손이었으나 남초 밭을 일구어 공부를 해서 후일 무과에 급제하여 무인의 길을 걸었다.

반면 양반 체면 때문에 생업에 나서지 못하는 부류도 있었다. 양반들은 대개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판서를 지낸 엄숙(嚴肅, 1716~1786)은 자신의 세 가지 불행 가운데 하나로 ‘양반이 되어서 평민천민처럼 마음껏 생계를 꾸리지 못하는 것’을 들기도 하였다. 장한종(張漢宗, 1768~1815)이 쓴 『어수신화(禦睡新話)』에는 「홍생아사(洪生餓死)」라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소의문 밖에 두 딸과 함께 살던 홀아비 홍 생원이 훈조막(熏造幕)1)의 역부들에게 밥을 빌어먹다가 역부들에게 핀잔을 들은 후 더 이상 구걸하지 않고 모두 굶어 죽었다는 내용이다. 줄거리가 워낙 극단적이어서 실제 있었던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사실이든 허구이든 어쨌든 당시 양반의 모습을 보여 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양반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꺼렸지만 가난한 양반들은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했다. 양반들 가운데 소작인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영남 지방의 지주들 사이에는 노비, 친구, 양반에게는 소작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양반이 소작을 주지 말아야 할 대상에 포함된 것이 흥미롭다. 그 이유는 양반들의 비상식적인 태도 때문이었는데 그에 대해 성대중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료 1-4-03〕

지금은 양반이 온 나라에 깔려 있으니 음직도 조상의 공업도 다 끝나고 토지도 노비도 없으며 문도 무도 익히지 않아 모습과 언동이 평민만도 못한 주제에 그래도 조상의 훌륭한 유업을 들먹이며 남에게 사역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한갓 남의 땅을 움켜쥐고서 이름만 소작인일 뿐 자기는 쟁기질도 호미질도 제대로 하지 않고 평민들을 부리려 하니 평민들이 그 말을 듣겠는가. 이 때문에 농사일에 번번이 때를 놓쳐 땅 주인만 피해를 입게 되며, 땅 주인이 조금이라도 책망하면 마구 욕을 해대고 그나마 소출도 다 주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하니 땅 주인이 땅을 빼앗지 않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으면 팔아야 하는데 팔려고 하면 틀림없이 빼앗기게 된다. 이래서 서로 땅을 주지 말라고 경계하는 것이니, 흑립(黑笠)을 쓴 양반들이 어찌 더 빈궁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가난해서 남의 땅을 소작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이 특권 의식을 버리지 못해 제멋대로 평민을 부려먹거나 지주들에게 욕을 해대는 등 갖은 행패를 일삼는다는 것이다. 영남 지방의 경우 다른 지역보다 양반의 권위가 강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벌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양반들의 행태가 이러했기 때문에 지주들은 양반에게 소작을 주지 않으려 했고 그로 인해 양반들은 소작지도 얻지 못해 더욱 곤궁해질 수밖에 없었다.

김득신, 풍속화
지주로 보이는 이가 농민들이 타작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소장 : 간송미술관)
자료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미술작품 > 작가별 작품 > 동양작가 > 조선시대 작가 > 김득신 > 추수타작 [秋收打作] - 김득신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양반들의 의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오랫동안 사대부들이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던 것은 검소, 염치와 같은 덕목들이었다. 하지만 사대부들은 검소의 미덕을 잃고 경쟁하듯 사치를 부렸다. 사치풍조에 관한 자료는 사실 조선 시대 전 시기에 걸쳐 발견되지만 후기로 갈수록 그 양이 늘어난다. 다음은 조선 후기 사대부들의 사치 풍조와 관련된 두 자료이다.

〔사료 1-4-04〕

① 근래에 사대부가에서는 술이 집에서 담근 것이 아니거나, 과일이 먼 지방에서 온 진귀한 것이 아니거나, 음식이 여러 품목이 아니거나, 그릇이 온 상에 가득 차지 않으면 감히 모임을 만들지도 않으며, 반드시 여러 날을 마련한 뒤에야 초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투어 비난하며 인색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치한 풍속을 따르지 않는 자가 드물다.

심재(沈 , 1722~1784), 『송천필담(松泉筆談)』

② 연회를 벌이거나 유람할 때 명승지를 찾아가며 가져가는 도시락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조정에서 근무하면 식사를 집에서 가져오는데, 아침 점심으로 보내오는 음식은 한 그릇에 100여 전의 값을 들여 대여섯 그릇을 만든다. 그 진기한 요리와 귀한 반찬은 남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다. 하인들까지 배불리 먹고도 남아 추울 때에는 얼고 더울 때에는 부패한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사대부들 사이에 검소한 것이 오히려 인색한 것으로 취급되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었으며, 관료 사회에서도 사치를 즐기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심노숭은 백성들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된 것은 사대부들의 사치풍조 때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검소함이 더 이상 미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러한 상황은 사대부 사회에 균열이 생기고 있던 한 단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사대부들 가운데는 염치를 상실하고 양반 신분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염치를 상실한 행위의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는 평민들의 집을 제멋대로 빼앗는 일이다.

〔사료 1-4-05〕

예전에는 사대부들이 괜찮은 여염집을 보고서 요양을 한다거나 혹은 집을 빌려 혼사를 치른다는 등의 명목으로 곧바로 가솔(家率)들을 이끌고 안채로 들이닥치면 여인네들이 마치 난리라도 만난 것처럼 도망치고, 새로 들어온 사람은 마치 원래 자기 집처럼 태연히 거처하였다. 그 집에 비축해 둔 곡식과 가마솥 등을 그대로 쓰면서 혹은 해가 바뀌도록 나가지 않는데, 집주인은 밖에서 노숙하면서도 괴롭다는 말 한마디 못하였다. 이렇게 집을 뺏긴 여염집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하니, 조석으로 끼니를 때울 뿐 아무것도 비축할 것이 없었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지만 민가를 빼앗는 일은 실제 있었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잠저에 있을 때부터 이러한 폐단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즉위하자마자 남의 집을 빼앗아 들어간 사람은 3년 동안 유배를 보내도록 명령을 내리면서 비로소 사라졌다.

이처럼 사회⋅경제적 변화에 양반 사회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바로 당파 간의 갈등이었다. 중앙 정계에서의 각 당파들이 얼마나 치열한 다툼을 벌였는가는 잘 알려져 있지만 지방 사회의 상황을 보여 주는 자료는 많지 않다. 이옥(李鈺, 1760~1812)의 『봉성문여(鳳城文餘)』에 들어 있는 다음 자료는 단편적이지만 지방 당인들 간의 갈등 양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사료 1-4-06〕

삼가(三嘉)2)의 선비들이 향교의 교문을 신축하면서 향음주례를 행하여 낙성식을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현감이 향대부로서 주인(主人)의 일을 맡았으나 고을에 빈(賓)으로 모실 만한 사람이 없었다. 고을 향교에는 또한 붕당이 있어 서인남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나이로 치면 남인의 선비가 마땅히 빈이 되어야 하는데, 주인이 무리들에게 이끌려서 서인의 선비를 끌어다가 빈으로 앉히니 남인의 선비들이 원망하여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옥(李鈺, 1760~1812), 『봉성문여(鳳城文餘)』 「향음주례(鄕飮酒禮)」

이옥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연루되어 기구한 삶을 살았던 지식인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1795년(정조 19) 정조로부터 소품문을 썼다는 이유로 충군(充軍)3)의 처벌을 받은 이후 우여곡절을 겪다가 1799년 삼가현에 내려가 생활하게 되었는데 위의 글은 그곳에서 견문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삼가 지방은 본래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영향을 크게 받은 곳이라 북인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데 광해군 때 북인 정권이 몰락하고 나서는 서인남인이 섞여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 후기 양반들은 지배층으로서의 건전성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었다.

1)관청에 공납하는 메주를 만들던 곳
2)합천
3)군에 소속되는 것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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